사라진 고대왕국…이서국, 신라 패권에 도전하다
사라진 고대왕국…이서국, 신라 패권에 도전하다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01 20: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고대의 투키디데스 함정?…신라 팽창에 불안 느껴 선제공격, 김씨 세력 지원에 패배

고대 이서국(伊西國)이라는 나라는 경북 청도군 이서면과 화양읍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유물이나 유적지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여러차례 또렷하게 기록되고 있다. 신라의 발상지이자 수도인 경주(금성)을 공격할 정도였으니, 나름 상당히 세력을 형성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신흥 신라에 의해 결국 패망했다.

지정학적으로 보면, 청도는 경주와 이웃해 있다. 이서국은 일찍부터 경주와 교류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팽창하는 신라와 이를 저지하려는 이서국은 충돌하게 되었고, 결국 신라의 승리로 끝났다.

 

이서국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자주 언급된다.

노례왕(弩禮王) 14년에 이서국 사람들이 와서 금성(金城)을 공격하였다. 운문사(雲門寺)에 예로부터 전해오는 제사납전기(諸寺納田記)를 살펴보면, “정관(貞觀) 6년 임진(서기 632)에 이서군(伊西郡)의 금오촌(今郚村) 영미사(零味寺)에서 밭을 바쳤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즉 금오촌은 지금의 청도(淸道) 땅이니, 곧 청도군이 옛날 이서군이다. (삼국유사 기이편 이서국조)

건무 18(서기 42)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 (삼국유사 기이 노례왕조)

14대 유례왕 때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에 쳐들어왔는데, 우리도 군사를 많이 동원하여 막았지만 오래 버틸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와서 우리를 도와주었는데, 모두들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힘을 합쳐 적군을 쳐부수었다. 그러나 적군이 물러간 뒤에는 이 군사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나무 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가신 임금님께서 도와주셔서 공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일로 인해서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이라고 불렀다. (삼국유사 기이 미추왕 죽엽군조)

유례 이사금 14(서기 297) 봄 정월,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기에 우리 군사를 크게 일으켜 막았으나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이상한 병사들이 왔는데,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그들은 모두 귀에 대나무 잎을 꽂고 있었다. 우리 군대와 함께 적을 공격하여 깨뜨렸으나 그 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竹長陵)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먼저의 임금이 음병(陰兵, 신령한 비밀 군대)을 보내 전쟁을 도왔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례이사금조)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문화재청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문화재청

 

이 네가지 기사를 놓고 비교하며 이서국을 분석해 보자.

신라가 경주분지의 부족국가였을 때엔 청도에 본거지를 둔 이서국은 산맥을 경계로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는 6부족 연맹체로 만족하지 않았다.

개국 초기엔 왜병의 침입으로 생존이 위협당했던 신라는 4대 탈해이사금 때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멸망시켰고, 5대 파사 이사금때엔 음집벌국(音汁伐國)과 실직(悉直),압독(押督)의 항복을 받고(102),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 병합했다.(108)

이로써 신라는 경주 일대의 지배권을 형성했다.

이어 아달라 임금때 계립령(156)과 죽령(158)을 열었다고 한다. 소백산맥을 열어 그 곳에 감물(甘勿)과 마산(馬山) 두 현을 설치하고 백제와 대치했다.

이제 신라는 소백산맥 안쪽, 즉 경상북도에 웅거하는 소국들을 하나씩 토벌해 나갔다. 벌휴이사금 2(185)엔 경북 의성에 위치한 소문국(召文國) 정벌했다. 조분 이사금은 경북 김천의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하고(231), 이어 경북 영천으로 비정되는 골벌국 항복을 받았다.(236) 조분이사금은 안동의 고타군(古陁郡)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조공으로 받았으니(242), 신라의 영향력이 안동까지 미쳤다. 첨해 이사금 16(245)엔 경북 상주의 사량벌국(沙梁伐國)을 토벌했다.

신라의 팽창이 가속화되면서, 이서국이 독자적인 부족국가로 존립하기 어려워진다.

 

청도군 일대 /김현민
청도군 일대 /김현민

 

그러면 이서국(伊西國)은 어떤 나라였을까. 문화재청의 자료에 따르면, 이서국은 삼한시대 부족국가 중 소국이었던 우유국(優由國)이 모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다소 혼란된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는 노례왕(弩禮王) 14년에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했고(이서국조), 신라가 건무 18년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노례왕조)고 했다. 삼국유사의 노례왕(弩禮王)은 신라 3대 유리(儒理)이사금이다. 유리임금 14(서기 42)에 이서국이 신라 수도를 공격한 기사가 삼국사기엔 없다.

삼국유사 저자 일연은 멸망했다는 이서국 사람들이 14대 유례왕(儒禮王) 때에 금성(金城)에 쳐들어왔다는 기사를 썼다. 이 기사는 삼국사기에서 거의 똑같이 언급해 사실성이 높다. 그렇다면 멸망한 나라가 다시 국권을 되찾아 신라를 공격한 것인가.

일부 사학자들 가운데 일연이 노례왕과 유례왕을 혼동해서 정리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이서국의 금성 공격이 유례이사금 14(서기 297)에 이뤄졌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후대 학자가 해석하기 어렵다고 선대 고수의 착각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편의적이다. 일연의 애매한 표현에도 뭔가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선 이서국이 신라 수도 금성을 두 번 공격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수 있다.

첫 번째 공격 시기가 삼귝유사에 서술한 유리 이사금 14(서기 42)이다. 이땐 신라가 경주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부족국가여서 청도의 이서국 군사들이 산을 넘어 경주를 침공할 충분한 여력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의 반격으로 이서국이 멸망했다.

이서국은 다시 일어섰다. 일연은 다시 일어난 나라도 이서국이라고 표현했지만,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이서고국’(伊西古國)이라고 표현했다. 옛 이서국이 새로 부활했다는 의미로 기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례이사금 14(서기 297) 때 이서국의 공격은 부활한 이후 두 번째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 신라는 경상북도 안동, 김천, 영천, 의성 등을 지배하는 강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이때 이서국이 침공했을 때 신라가 군사를 크게 일으켰으나 막지 못했다고 서술했다. 작은 이서국이 경상도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강국 신라를 선제공격한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스파르타가 아테네에 대항한 것처럼.

 

그러면 신라와 이서국의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그 이유는 이서국이 신라의 영토 확장에 불안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테테 출신 철학자 투키디데스가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를 쓰면서 기존 맹주였던 스파르타가 급격히 성장한 아테네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 두 나라는 지중해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게 됐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정치평론가 그레이엄 앨리슨(Graham Allison)은 이를 정치학 용어로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이라고 명명했다.

신라가 경북 동해안에서 북부로 종횡무진하며 영토를 확대하고 패권을 형성해 가자, 그때까지 독립을 유지했던, 혹은 멸망했다가 다시 독립한 이서국이 신라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던 것으로 볼수 있다.

전쟁은 이서국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공통적으로 서술하는 장면은 이서국 또는 이서고국이 먼저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 했다. 이서국은 신라를 제압하기 위해 선제공격했고, 신라가 오히려 우왕좌왕 했다.

물론 신라로서도 경북 동부와 북부를 제압한 이후 서쪽과 남쪽으로 진출하는데 이서국이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을 다 차지할 때까지 이서국을 남겨두었던 것은 그 나라가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서국의 바로 북쪽에 있는 압독국(경산)과 읍즙벌국(경주 안강)이 파사이사금 때인 102년에 멸망한데 비해 이서국이 297년까지 유지했다. 이서국은 200년 이상 신라와 대결하며 버티고 있었던 강한 부족국가였던 것이다.

 

전투 과정에 흥미롭다.

느닷없이 귀에 대나무잎(竹葉)을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신라군을 돕고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그들은 유례 이사금의 전왕인 미추이사금의 왕릉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 군대를 죽엽군(竹葉軍)이라 부르고, 미추왕릉을 죽장릉(竹長陵) 또는 죽현릉(竹現陵)이라 한다는 것이다.

이 설화적인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할까.

신라 14대왕 유례이사금은 석()씨다. 앞서 13대 미추(味鄒) 이사금은 김()씨다. 석씨 왕조가 이어지다가 13대 때 잠시 김씨에게 권력을 넘겨준후 유례가 다시 석씨 왕조를 이어간 것이다.

하지만 석씨 왕조의 군사력만으로 이서국의 군사를 물리칠수 없었다. 그때 김씨 세력의 군대가 나타난 것이다. 미추의 부인은 조분이사금(석씨)의 딸이고, 유례는 조분왕의 맏아들이다. 따라서 유례와 전왕 미추는 처남 매부 사이다.

하지만 신라시대는 씨족 혈통이 강조된 사회다. 처남-매부 관계보다 석씨 왕조가 곤경에 처하자 김씨 세력들이 나서 지원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죽엽군은 그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하니, 석씨의 왕실군대를 능가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신라는 17대 내물이사금부터 김씨 세력이 정권을 줄곳 장악하게 된다.

군벌을 형성하고 있던 김씨 세력들이 이서국 군대를 제압한 이후에 그들의 성소(聖所)인 미추왕릉에 집결해 제사를 드리고 해산한 것이다. 죽엽군은 해산한 이후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안동지역으로 갔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타군(古陁郡)이라 불리던 안동지역은 별도의 국가가 아니라 신라의 지방으로 편입해 있었는데, 아마도 김씨 세력의 근거지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국사학자들의 해석이 있다.

 

사학계는 이서국이 신라 제14대 유례이사금 14(297)에 멸망한 것으로 보는데 이견이 없다. 다만 유리왕 때(42)의 공격에 대해 분명한 해석을 제시하지 못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은 그 자체로 살려둘 필요는 있다고 본다.

이후 신라는 이서국을 이서군(伊西郡)으로 편성해 직할 영토로 삼았다. 신라는 이 일대에 화랑 수련장을 만들어 삼국통일의 발판을 만들었다. 이서 일대에는 신라의 서진정책 (西進政策)에 따라 당시 사용했던 군대 주둔지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청도 읍내에서 북쪽으로 개의 등처럼 보이는 산이 있는데, 이를 주구산(走狗山)이라 하고, 그 산의 성을 주구산성이라고 하고 이서산성이라고도 불렀다. 현지 사람들은 이 산성이 이서국이 신라가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막고자 성을 쌓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고려 왕건이 신라의 항복을 받은 뒤 신라의 잔병이 이 성에서 저항하자 개의 형상을 닮은 지형을 이용한 계략을 받아들여 이들을 토벌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성의 지세가 달리는 개’(走狗)의 모양이니, 밤에 공격하지 막고 낮에 공격했다는 것이다.

 

이서국이 멸망할 당시의 신라 지배영역 /그래픽=김현민
이서국이 멸망할 당시의 신라 지배영역 /그래픽=김현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