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흑인왕국⑩…위대한 짐바브웨 문명
아프리카 흑인왕국⑩…위대한 짐바브웨 문명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0.29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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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쇼나족 선조가 건축한 11~15세기 석조 유물…중국, 아랍과도 교역

 

포르투갈의 빈센테 페가도(Vicente Pegado) 대령이 아프리카 내륙 깊숙이 탐험허다가 어머어마한 고대 유물을 보고 놀랐다. 그는 1531년에 남긴 저술에서 이렇게 썼다.

림포포 강과 잠베지 강 사이 내륙 평원의 금광에 엄청난 규모의 석조 요새가 있다. 그 돌을 붙이는데 모르타르도 사용하지 않았다. 구조물은 언덕에 둘러싸여 있고, 그런 것들이 여러 개 있다. 모르타르도 사용하지 않고 22m나 되는 석탑이 세워져 있다. 원주민들은 아 구조물을 심바오에(Symbaoe)라 부른다. 그 뜻은 현지어로 궁전이라고 한다.”

페가도가 설명한 심바오에가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 유적이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 /위키피디아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 /위키피디아

 

그후 이 유적은 잊혀졌다가 19세기말에 유럽인들의 본격적인 탐색과 연구가 진행되었다. 1868년에 미국인 사냥꾼 아담 랜더스가 그 곳을 방문했지만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고, 그는 독일의 지리학자 카를 마우흐(Karl Mauch)에게 유적지까지 안내했다. 1871년 마우흐는 이 곳을 방문하고 현지어를 옮겨 짐바브웨를 알리게 되었다.

이 독일 지리학자는 그곳을 구약성경에 나오는 전설적인 황금의 나라 오빌(Ophir)이라고 믿었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왕에게 황금을 주었는데, 그 황금의 생산지가 오빌이라는 것이다. 마우흐의 그럴듯한 주장은 유럽인과 아프리카 백인 사이에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황금의 나라라는 전설이 떠돌면서 도굴자들이 덤벼들어 유적지는 파헤쳐졌지만, 금은 나오지 않았다.

영국의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Cecil John Rhodes)가 고고학자와 지리학자들을 데리고 이곳을 탐방했다. 그가 데리고 온 학자는 이 곳이 페니키아와 아랍인들이 지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이렇게 거대한 석조 건축물을 지을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이후 이곳을 식민통치한 영국인들의 주류 이론이 되었다. 영국은 이 곳을 식민화하면서, 세실 로즈의 이름을 따 로디지아(Rhodesia)라고 불렀다. 1)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 /위키피디아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 /위키피디아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넓이는 7.22 으로, 여의도 면적의 2.5배 정도 된다. 전성기에는 18,000명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 고고학자들은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앞서 추정된 구역성경의 나라도, 페니키아나 아랍이 지은 것도 아닌, 원주민 쇼나(Shona)족의 조상들이 건축한 건축물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또 이 곳은 거대한 왕국의 수도였으며, 유적지는 왕궁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 곳에 왕궁을 둔 나라의 이름을 짐바브웨 왕국(Kingdom of Zimbabwe)이라고 통칭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 /위키피디아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 /위키피디아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계곡 일대에 여러 석조구조물이 퍼져 있는 복합 유적군이다. 유적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한다.

핵심적인 유적은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힐 콤플렉스‘(Hill Complex)이고, 직경 100미터에 달하는 '엔클로저'(Great Enclosure), 그리고 골짜기에 넓게 자리잡고 있는 '골짜기의 유적'(Valley Complex)이 있다.

힐 콤플렉스는 높이 90~120미터의 화강암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으며, 한때는 '언덕 요새'라고 불리기도 했다. 방어용이라는 설과 단순히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건설되었다는 설이 있다.

엔클로저는 거대한 타원형 건축물 집단으로 높은 수준의 돌 쌓는 기술을 동원해 건설한 것으로, 윗부분에 산 모양의 장식이 되어 있는 석벽과 원추형의 기묘한 석탑, 주거 흔적이 발견된 유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엔클로저는 한때 신전으로 오인되기도 했는데, 종교적인 건축물이라기보다 왕궁에 가까운 건축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곳은 왕실의 복합 주거지로 추정되는데, 두께가 9.5m, 높이가 11m에 달하는 벽에 의해 보호받는다. 내부에는 10m 높이의 돌로 된 '원뿔형 탑'이 있다. 성벽은 길이가 250m나 된다.

'골짜기의 유적'은 폐허 상태로 버려져 있는데, 당시 이 곳에 생활했던 사람들의 주거용 집과 가축용 축사, 또는 창고 등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의 집합체이다.

남부 아프리카에는 이런 석조 유적물들이 200개가 되는데,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짐바브웨 새 /위키피디아
짐바브웨 새 /위키피디아

 

유물 중에는 짐바브웨의 새’(Zimbabwe Bird)가 있다. 활석을 깎아 만든 새의 모형인데, 현지의 새를 본뜬 조각품이다. 짐바브웨의 새는 현재 이 나라의 국기, 동전과 지폐, 각종 국가 장식물에 사용되고 있다. 2)

 

짐바브웨 국기 /위키피디아
짐바브웨 국기 /위키피디아

 

고고학자들의 추정에 의하면, 이 유적지를 축조하고 유물을 만든 짐바브웨 왕국은 서기 1000년에 시작해 1450년경에 멸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로는 도자기, 철제 징, 상아 가공품, 철선, 동선, 철제 농기구, 청동제 방패, 구리 잉곳, 금 구슬, 금 팔찌와 목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도자기는 중국산과 페르시아산으로 확인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유물을 통해 짐바브웨 왕국이 중국과 페르시아, 아랍국가들과 교역을 했을 것으로 유추했다. 교역 항구는 동아프리카에 아랍인들이 개척한 킬와(Kilwa) 왕국으로 추정되었다. 즉 내륙에서 상아와 금을 킬와로 운반해 아랍과 페르시아로 수출했고, 그 수출품이 중국으로 갔으며, 또 킬와를 통해 외국의 물건을 사왔다는 것이다. 짐바브웨 왕국의 주생산품은 금과 상아, 곡물이었을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먼 이 거대한 왕국이 왜 멸망했을까. 학자들은 크게 두가지로 분석한다. 첫째는 기후재앙이다. 가뭄이 몇 년째 이어져 석조도시의 인구들이 북쪽으로 이동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둘째는 금의 고갈이다. 1450년 경에 금 생산이 고갈되면서 사람들이 도시를 버렸다는 것이다. 3)

 

짐바브웨 국기 /위키피디아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 /위키피디아

 

영국인들은 로디지아를 통치할 때 흑인들이 이런 건축물을 지을 리 없다면서, 고고학자들에게 정치적 압력을 행사했다. 식민당국의 압력에 로디지아를 떠난 학자들도 있다. 로디지아 식민당국은 교과서는 물론 박물관 안내서에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흑인 조상들이 만들지 않았다고 공식화했다. 라디오, 신문에도 그렇게 주장했다. 고고학자들도 저 건축물을 흑인이 만들었다고 주장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피지배자가 웅대한 건축물을 지을수 있다는 것이 지배자에겐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흑인운동가들은 그레이트 짐바바웨를 독립의 상징으로 삼았다. 1980년 로버트 무가베 흑인정권은 나라 이름을 짐바브웨로 바꾸고, 국기에 짐바브웨 새를 새겨 넣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 /위키피디아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 /위키피디아

 


1) Wikipedia, Great Zimbabwe

2) Wikipedia, Zimbabwe Bird

3) Wikipedia, Kingdom of Zimbab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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