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군이 중공군 인해전술과 싸운 설마리전투
영국군이 중공군 인해전술과 싸운 설마리전투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0.11.01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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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백명 영국군, 3만명 중공군을 3일간 싸워 서울 지켜내…현지에 전투비

 

경기도 파주 감악산은 산세가 험악해 조선시대에 산적 임꺽정이 활동했던 지역으로 유명하다. 감악산에서 내려오면 설마리(雪馬里) 계곡이 있다. 이 계곡과 주변의 야산은 서울과 평양 사이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삼국시대에 신라, 고구려, 백제가 영토 확장을 하면서 싸우던 격전지다. 신라는 이 곳에 칠중성(七重城)을 쌓아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했다.

신라와 당나라가 싸울 때 당나라 장군 설인귀(薛仁貴)20만의 당군을 거느리고 패배해 퇴각했는데, 설인귀가 말을 타고 정신없이 퇴각했다는 고개가 설마치(薛馬峙) 고개다. 설마리라는 이름도 당나라 장군 설인귀에서 나왔다.

 

파주 영국군 설마리 전투비 /문화재청
파주 영국군 설마리 전투비 /문화재청

 

당나라군이 물러난지 1,300년쯤 후인 1951년에 중공군이 설마리에 나타났다. 그들을 대적한 군대는 영국군이었다.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에 영국군이 중공군과 싸우던 설마리 전투비가 있다. 영국 글로스터셔 연대(Gloucestershire regiment) 연대 소속 제1대대 부대원 662명이 중공군 3만명과 싸우다 분패한 전적지다.

 

글러스터셔 부대의 휘장 /위키피디아
글러스터셔 부대의 휘장 /위키피디아

 

때는 19514.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195114일 서울을 다시 빼앗겼다가 3월에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38도선을 다시 탈환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서울을 4월에 다시 점령하기 위해 70만명의 대군을 밀어붙여 춘계 대공세를 시작했다. 중공군은 대병력을 집결시켜 서울을 향해 밀고 왔고, 그 중 제19병단이 문산~파주 방면을 공격했다.

 

설마리 전투 지도 /위키피디아
설마리 전투 지도 /위키피디아

 

영국의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는 19514월 파주군 적성면 임진강변 148 고지 일대에 배치되었다.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하기 위해 감악산 설마리 계곡을 선택했다. 영국군은 포병단의 지원르 받았으나, 전선이 넓어 불리했다.

421일 밤 10시경 영국군은 중공군 정찰대를 발견해 사살했는데, 다음날 중공군 3만명이 임진강 도하를 시작했다. 영국군 대대는 조명탄 지원을 받으며 중공군 187사단의 도하를 막았으나 밤이 되자 중공군의 포격은 더 거세졌다.

424일 영국군 대대는 설마리 진입로를 봉쇄하고 고지에 집결했다. 영국군은 저녁까지 반격을 시도했으나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에 포위되어 빠져 나갈수 없었다. 야간이 되자 중공군이 공격했는데 대대는 방어해 냈다.

425일 영국군 대대는 미국 공군의 지원을 받아 중공군 공격을 저지했다. 미군 제1군단 사령부는 국군 1사단과 미군 3사단의 병력을 보내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영국 부대를 구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연합군은 중공군 공세를 뚫지 못하고 구출작전은 실패했다. 425일 미군 사령부는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에게 진지를 포기하고 자력으로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설마리 전투에서 파괴된 영국 전차 /위키피디아
설마리 전투에서 파괴된 영국 전차 /위키피디아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대대원은 300여명이 되지 않았는데, 태반이 부상자였다. 대대장 카엔 중령은 기동이 불가능한 부상자들을 두고 갈수 없었다. 그는 몇 명이 포로가 될 것을 각오하고 나머지 걸을수 있는 부대원은 탈출하라고 지시했다. 이날이 1951425일이었다.

3개 중대가 남쪽으로 탈출을 시도했고, 나머지 1개 중대는 북쪽 파평산 기슭으로 탈출했다. 남쪽으로 향하던 3개 중대는 탈출에 성공하지 못했다. 북쪽으로 탈출하던 중대는 미군 탱크 대대에 구출되었다. 대대원 662명중 탈출에 성공한 인원은 37명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포로가 되거나 전사했다. 적에게 포로로 잡힌 이들 중에 30명이 추가로 전사했다.

이 전투는 한국전쟁 중 영국군의 희생이 가장 컸던 전투였다. 하지만 영국군이 3일간 전선을 지켜줌으로써 유엔군이 서울을 방어하는데 시간을 벌어 주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잡힌 병사들은 1953년 포로교환협정에 의해 석방되었다.

 

설마리 전투는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이 치른 대표적인 전투 중의 하나로, 고립방어의 대표적인 전투로 기록된다. 1957629일에 추모비가 건립된 이후로 매년 합동추모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엘리자베스 영국여왕도 설마리 전투비를 다녀갔다. 영국인들은 이 고지를 글로스터 고지라 부른다.

영국의 글로스터셔 연대는 1694년에 조직되었다. 영국 글로스터셔 카운티의 이름을 붙여 만든 이 연대는 1801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이집트를 상징하는 부대마크를 사용하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때 워털루 전투에도 참여했으며, 1차대전, 2차대전은 물론 버마전투, 이집트전투등 영국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설마리전투 추모공원 /박차영
설마리전투 추모공원 /박차영
설마리전투 추모공원 /박차영
설마리전투 추모공원 /박차영
설마리전투 추모공원 /박차영
설마리전투 추모공원 /박차영
설마리전투 추모공원 /박차영
설마리전투 추모공원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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