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왜구②…규슈 전황에 연동된 약탈
고려말 왜구②…규슈 전황에 연동된 약탈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0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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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 전쟁이 규슈로 확전…군량미 확보, 궁핍 해결 위해 왜구로 돌변

 

일본의 남북조(南北朝) 시대는 야망과 배신, 이합집산으로 점철되어 있다. 권세가들은 이편에 섰다 저편에 섰다를 반복했고, 어느 순간엔 누가 어느 편인지 헷갈릴 때도 종종 있다. 요약하자면 남북조 내란은 천황의 권위를 세우려 했던 천황파와 무사(사무라이)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막부파의 싸움이기도 하고, 천황 가문에서는 다이가쿠지(大覚寺) 계통과 지묘인(持明院) 계통의 대립이기도 했다.

일본 남북조시대는 1336~1392년 사이 57년간을 일컫는데, 왜구가 고려를 약탈한 기간은 1350년 이후 40여년간이다. 남조와 북조의 대립은 초기에 두 황제의 거점인 교토(京都)와 요시노산(吉野山)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때엔 왜구의 고려 약탈이 없었다. 이어 남조의 일파가 규슈(九州)를 장악하면서 전투는 고려 코밑으로 전개된다. 그들은 고려 해안에서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침구(侵寇)하게 된다.

 

남조측 거점인 요시노산의 단풍 /위키피디아
남조측 거점인 요시노산의 단풍 /위키피디아

 

고려의 기록물에는 왜구의 침략 사실이 많은데 비해 일본측은 고려를 약탈한 사실을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신라 말기에 신라 해적들이 규슈지역을 약탈한 일이 일본에는 많은 기록을 남겼지만, 우리 기록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본인들은 자기네끼리 싸운 내용을 <태평기>(太平記)에 상세하게 기록했다.

양국 기록의 간극을 이영 교수(방통대)가 메웠다. 이영 교수는 일본 전란기의 역사와 고려조의 왜구기록을 분석한 결과, 고려말 왜구가 일본의 내란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도출해 냈다. 그는 저서 <왜구, 고려로 번진 일본의 내란>에서 남북조시대의 규슈 전황을 파헤치며 그들이 왜 고려를 노략질했는지를 시기별로 설명했다.

 

북조의 거점인 교토와 남조 거점인 요시노 /위키피디아
북조의 거점인 교토와 남조 거점인 요시노 /위키피디아

 

11세기 후반 고려 문종 이후 일본의 대마도, 이키섬, 사쓰마(薩摩)의 상인들은 조선에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고 그 보답품을 받아갔다. 12~13세기에 고려는 내정문란으로 왜국 상선에 보답품을 줄 여유가 없어 선박 척수와 기한을 제한하게 되었다. 왜인들은 고려의 통상 축소로 궁핍하게 되었고, 1223(고종 10)에 처음으로 고려를 침략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고려의 지방관이 왜구의 노략질을 방어할수 있었다. 그후 두차례 걸친 몽골-고려의 일본 원정(1274, 1281)을 전후애 왜구의 침탈은 80년 이상 중단되었다.

왜구가 80년의 침묵을 깨고 고려에 다시 등장한 것은 1350년 경인년이었다.

 

1350~52년 경인 왜구

13499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의 혼외아들이자 다카우지의 동생 다다요시(足利直義)의 양자인 아시카가 다다후유(足利直冬)가 권력싸움에서 쫓겨 규슈로 들어오게 된다. 다다후유는 규슈의 무사들을 급속히 규합해 규슈의 권력 중심지 다자이후(太宰府)를 향해 북진했다. 다자이후를 거점으로 삼던 쇼니 요리히사(少弐頼尚)가 다다후유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자신의 영지인 쓰시마섬에 군량미 확보를 명령했다.

이에 쓰시마에 있던 소()씨들이 군대를 동원해 고려를 약탈했다. 쓰시마섬의 소씨 휘하 병력이 고려를 침략한 것이 1350년 경인 왜구의 실체라고 이영교수는 설명한다.

고려말 왜구의 근거지는 쓰시마섬과 이키섬(壱岐島), 규슈 본토였는데, 규슈의 군사적 대치가 왜구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

 

1352년 쇼니씨, 쓰시마로 이동

북규슈의 영주이자 군벌이었던 쇼니 요리히사는 다다후유를 사위로 삼으면서 제휴를 했다. 하지만 1352년 다다후유의 후원자인 양부 다다요시가 형 다카우지에게 독살당하자 다다후유의 세력이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쇼니 요리히사도 북규슈의 다자이후를 잃고 쓰시마로 도망간다. 농토가 좁은 쓰시마 섬에 요리히사의 군사들이 몰려오자 식량이 부족해 졌다. 1352년 쇼니씨와 쓰시마의 토착세력 소씨가 고려로 약탈을 떠나게 된다.

 

오호바루전투도 /위키피디아
오호바루전투도 /위키피디아

 

1359년 오호바루전투와 왜구

13598, 규슈 지쿠고(筑後)의 오호바루(大保原)에서 북조측을 대표한 쇼니 요리히사와 남조측의 가네요시 왕자(懐良親王), 키쿠치 다케미쓰(菊池武光)의 군대가 일대 회전을 벌였다. 북조는 6만기, 남조측은 4만기의 병력을 각각 동원했는데, 결과는 남조측 정서부(征西部)의 승리였다.

오호바루전투는 북조측의 쇼니 요리히사가 도발한 전투였다. 쇼니씨는 도발에 앞서 2년동안 군량미를 조달했는데, 그들의 무사는 공민왕 6~7(1357~58)의 왜구로 등장한다.

고려사 공민왕 6926일조에 따르면, 왜구는 승천부(昇天府) 흥천사(興天寺)에 들어가 충선왕(忠宣王)과 한국공주(韓國公主)의 영정을 탈취해 갔다. 쓰시마섬의 한 신사에 보관되어 있는 불화는 이때 왜구가 훔쳐간 것으로 추정된다.

공민왕 7(1358)에 왜구는 조창과 조운선을 노리며 고려 조정의 세곡미를 약탈해 갔다. 전쟁 준비를 위한 곡물 비축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강화도 인근 교동도를 근거지로 해서 개경으로 드나드는 조운선을 노골적으로 약탈했다.

이때 왜구는 고려로만으로 모자라 중국 산둥(山東)반도 일대로 쳐들어갔다.

이렇게 2년 동안 집중적으로 약탈해 넉넉히 군량미를 비축했지만, 북조군은 남조군과 전투에서 패했다. 쇼니씨는 다자이후를 빼앗기고 산속과 해안지대로 도주했다. 그들은 먹을 게 부족했을 것이다. 공민왕 8~10년의 왜구는 패주한 쇼니씨의 패잔병들로 간주된다. 그들은 내륙 깊숙이까지 쳐들어왔는데, 그만큼 식량사정이 어려웠음을 반증한다.

1361년부터 1372년까지 11년 동안 남조측 정서부는 다이자후를 차지하며 규슈를 사실상 지배하게 된다.

 

북규슈 치쿠젠(筑前)에 세워진 다이자후(大宰府) 터 /위키피디아
북규슈 치쿠젠(筑前)에 세워진 다이자후(大宰府) 터 /위키피디아

 

초자바루 전투

13629, 북조군은 다이자후를 탈환하기 위해 초자바루(長子原)에서 남조군과 격돌했다. 전투 결과 남조측 정서군이 승리했다. 이때 쇼니씨측 무사들이 공민왕 11(1362)에 군량미를 준비하기 위해서였건, 패주후 궁핍한 생활을 이겨내기 위해 고려를 약탈하게 된다.

고려는 세곡미 운반을 육로로 전환하고, 해안의 주민들을 내륙으로 이동시켰다. 왜구들의 노력질도 내륙으로 이동했다. 이때 왜구는 지리산까지 쳐들어 왔다.

공민왕 13(1364)에 쇼니씨들은 부족한 식량을 메우기 위해 12번이나 침략해 왔다. 이 해에 공민왕은 조운선을 보호하기 위해 경기병마사를 보내 대처했는데, 인천시 앞바다 이작도(伊作島)에서 왜구에 대패하고 만다.

고려사(공민왕 13322) 이렇게 기록했다. “전라도(全羅道)의 조운선이 왜구에 막혀 통행하지 못하자, 왕이 경기우도병마사(京畿右道兵馬使) 변광수(邊光秀)와 경기좌도병마사(京畿左道兵馬使) 이선(李善)에게 명령하여 가서 조운선을 호위하게 하였는데, 왜적을 만나 대패하여 병마판관(兵馬判官) 이분손(李芬孫)과 중랑장(中郞將) 이화상(李和尙)이 전사하였으며, 병사들 중 전사한 자가 열에 여덟아홉이었다.”

 

이상에서 보듯, 1350년 경인 왜구에서 1364년 이작도 해전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주체는 북조를 지지하는 쇼니(少弐)씨의 무장세력이었다. 그들은 남조의 정서부에 몰려 북규슈 해안과 쓰시마로 쫓겨나 군량미 조달과 식량난 해결을 위해 고려를 침탈한 것이다.

그런데 이후 정서부가 몰락하면서 이번엔 규슈의 남조측 핵심세력인 기쿠치(菊池)씨가 해적으로 돌변한다. 공민왕 15(1366) 고려는 처음으로 일본 무로마치 막부에 사절단을 파견해 왜구의 진압을 요구했다. 이때 막부는 자신들이 한 짓이 아니라, 자신들이 제어할수 없는 남조의 난신(亂臣) 탓으로 돌렸다. 이때는 막부가 지지하는 북조가 어느 정도 정권을 안정시키는 단계였다. 막부는 그 이전에 자신들이 위태로웠을 때 고려에 저지른 약탈행위마저 남조의 잘못으로 돌린 것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南北朝時代 (日本)

이영 저, “왜구, 고려로 번진 일본의 내란” 2020, 도서출판 보고사

정진술 등, “한국해양사” 2007, 도서출판 신서원, 239~2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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