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왜구③…아기장수 아지발도의 정체
고려말 왜구③…아기장수 아지발도의 정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04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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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 남조측 장군, 식량 구하기 위해 고려 침략…실패후 왜구 소멸

 

고려말 왜구는 1380년 아지발도(阿只抜都)라는 소년 왜장의 침략으로 절정을 이룬다.

아지발도는 15~16세의 소년이었고, 고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기발도(阿其拔都)라고도 표기하는데, ‘아기는 어린아이란 뜻이고, 발도는 몽골어로 바투르’(용감한 자)란 뜻으로, 아기장수라는 호칭으로 해석된다. 우리 사료에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고, 고려말 왜구 중 이름이 남아 있는 독특한 인물이다. 일본어로는 아키바츠(あきばつ)로 읽는다.

 

아지발도 일행이 고려 땅에 도착한 날은 우왕 6(1380) 77일이다. 이들은 500척의 대규모 군단을 이끌고 서주(西州) 진포구(鎭浦口, 충남 서천군 장항 일대)에 도착했다. 당시 왜선을 기준으로 배 한 척당 13명 정도가 탔다고 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하면 6,000~7,000명에 이르는 대병력이다. 아지발도의 왜구는 진포구에 선단을 밧줄로 묶어 두고 금강을 따라 올라갔다.

<고려사>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왜구가 서주(西州)를 침입하고, 이어 부여현(扶餘縣정산현(定山縣운제현(雲梯縣고산현(高山縣유성현(儒城縣) 등지를 침략하였다가 마침내 계룡산(雞龍山)으로 들어갔는데, 부녀자와 아이들이 왜구를 피해 산으로 올라갔다가 대부분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양광도원수(楊廣道元帥) 김사혁(金斯革)이 왜구를 공격하여 쫓아버렸다. 이에 왜구들이 청양(靑陽신풍(新豐홍산(鴻山) 등지를 약탈한 뒤 가버렸다.” (우왕 67)

 

8월에 우왕은 해도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심덕부(沈德符최무선(崔茂宣)에게 전함 100척을 주어 왜구 전함을 추격해 나포하도록 명령했다. 이 무렵 고려는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火筒都監)을 만들어 화약과 화포를 제조해 해전에 투입했다. 최무선 등은 진포에 정박해 있던 왜구 함선을 불태우고 사로잡혔던 고려인 334명을 되찾고 왜구 추격에 나섰다.

아지발도는 옥주(沃州, 충북 옥천)에서 자신들의 전함이 불타버린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경상북도 상주를 쑥대밭을 만들고 경상남도 함양에서 고려군 500명을 도륙했다. (우왕 68)

 

황산대첩비(전북 남원) /문화재청
황산대첩비(전북 남원) /문화재청

 

이제 이성계(李成桂)가 등장할 차례다. 고려 조정은 전국에서 군대를 징발해 이성계에게 지휘를 맡겼다. 이때 아지발도는 운봉(남원)의 인월역에 진을 치고 남원성을 포위해 공격하고 있었다. 아지발도는 "광주(光州)의 금성(金城)에서 말의 물을 먹이고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겠다"고까지 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아지발도는 남원성 포위를 풀고 이성계 군을 유인했다.

오히려 고려의 토벌대장 이성계가 왜구가 쏜 화살에 왼쪽 다리를 맞았고, 적에게 두어겹 포위를 당했다. 고려 병사들은 겁에 질려 우왕좌왕했다. 아지발도 군의 전력은 막강했다.

이 대목에서 이성계의 신화가 나온다. 물론 조선의 역사기술자들의 약간의 포장을 했을 것이다. 이성계는 겁에 질린 병사들에게 비겁한 자들은 물러나라, 나는 죽을 각오로 싸울 것이다고 외쳤다. 이에 고려군은 왜구의 포위망을 뚫고 전세를 역전시켰다는 것이다. 이 전투가 그 유명한 13809월의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용맹하고 날쌘 모습을 가상히 여겨 생포할 것을 명했지만, 그의 여진족 동료인 이지란(李之蘭)이 반대했다. 이에 이성계는 "내가 투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곧 쏘아라"고 하고 말을 달려나가며 쏘아 투구 꼭지를 맞혔다. 투구 끈이 끊어져 기울어지자 아지발도는 급히 바로 썼지만, 뒤이어 이지란이 쏘아 아지발도를 죽였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우리 태조(太祖)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운봉(雲峯)에서 왜구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는데, 남은 적들은 지리산(智異山)으로 도망갔다고 적었다.

아지발도를 잃은 왜구는 거의 궤멸되다시피 했고, 강물이 피로 물들어 6~7일 동안 붉은 빛이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아지발도가 이성계 화살에 맞고 흘린 피가 스며든 곳이 있는데, 남원시 인월면의 남천 강변에 남아있는 피바위에 얽힌 전설이다.

황산전투에서 달아난 왜구 70여명은 지리산으로 달아나 그해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4, 무등산 규봉사(圭峯寺)에 나타났다. 고려군이 왜구 잔당들과 전투를 벌였고, 살아남은 일부는 바다로 탈출하려다 죽거나 사로잡혔다. (우왕 74)

 

아지발도의 피가 적셨다는 피바위(남원) /문화재청(문화재지킴이)
아지발도의 피가 적셨다는 피바위(남원) /문화재청(문화재지킴이)

 

그러면 아지발도는 누구인가. 일본 사료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없다. 일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큐슈(九州)의 무사 가문인 아카보시 씨(赤星氏)와 아지히 씨(相知比氏)의 이름이 사투리 발음으로 전해졌다는 설도 있다.

왜구 연구자 이영 교수(방통대)의 분석에 따르면, 아지발도 왜구는 부대의 기강이 엄정한 집단이었고, 강력한 무장을 갖췄다. 중기갑 기병인 철기(鐵騎)를 보유하고, 얼굴 전면에 구리로 만든 안면보호구 호아테(頬當)를 착용했다. 또 뛰어난 전투수행 능력을 갖췄으며, 강한 공격성을 지녔다. 겨울철을 지리산에서 보낼 정도로 생존능력도 뛰어났다.

아지발도는 10대 중반의 소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의 두목들이 그에게 복종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다. 신분적으로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아지발도 행로 추정 /그래픽=박차영
아지발도 행로 추정 /그래픽=박차영

 

이들은 어떻게, 왜 일본을 빠져 나왔을까. 이영교수는 이들이 규슈의 남조 세력인 정서부(征西部)의 주력부대일 것으로 추정했다. 이 교수는 막부에 의해 규슈탄다이(九州探題)로 임명된 이마가와 료순(今川了僔)가 정서부의 본거지를 토벌할 때, 138062~14일 사이에 일대의 배들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내용에 주목했다. 그 배가 지나간 지역은 오늘날의 나가사키현 시마바라(島原)반도 일대다.

당시 규슈의 남조는 기쿠치씨가 주축이 되었는데, 기쿠치(菊池)씨는 가네요시 왕자를 받들어 정서부를 꾸려 나갔다. 기쿠치씨는 히고(肥後)를 영지로 두었는데, 지금의 구마모토(熊本). 구마모토와 나가사키는 아리아케해(有名海)를 내해로 두고 있었다. 기쿠치씨의 사라진 배는 시마바라 반도 사이의 해협을 지나 고토(五島)열도와 제주도를 거쳐 한반도 서해안으로 향했을 것이다.

당시 무로마치 막부의 대리인 료순은 기쿠치씨의 거점을 봉쇄하고 있었다. 료순의 오랜 봉쇄에 정서부의 세력들이 식량 부족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아지발도에게 식량을 구해오라고 시켰고, 아지발도는 전함을 이끌고 금강하구로 쳐들어 왔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아지발도의 왜구가 토벌당할 때 노획한 말이 1,600필이 되었다고 한다. 이 말은 어디서 났을까. 일본 연구자들은 500척의 배에 군사와 그 많은 말을 일본에서 실어 나르기가 불가능에 가깝다며 아지발도가 일본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당시 원나라가 제주도에 말을 길렀다. 아지발도가 제주도의 몽골병사들을 부추겨 말을 싣고 왔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사> 열전 최영전에는 공민왕 27(1374) 제주도의 몽골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최영장군이 진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에서는 아지발도가 몽골 반란자들의 협조를 얻어 제주도에서 말을 조달했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어쨌든, 큐슈 남조측 장수였던 아지발도는 대병단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했으나 실패했다. 그가 많은 식량을 구해 오길 기다리던 남조측 기쿠치씨들은 아지발도가 돌아오지 않자 실망하게 된다. 그들은 2년을 이어온 농성을 풀고 본거지를 내놓았다. 규슈의 남조측은 세력을 잃게 되고, 그후 왜구의 준동은 꺽이기 시작한다.

1392년 남조 조정은 더 이상 항전할 힘을 잃고 북조와 막부에 투항했다. 이로써 57년에 걸친 일본의 남북조시대는 막을 내린다.

 


<참고자료>

Wikipedia, 阿只抜都

<고려사>,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이영저, “왜구, 고려로 번진 일본의 내란”, 2020, 보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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