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왜구④…대일 외교압박과 국방강화 병행
고려말 왜구④…대일 외교압박과 국방강화 병행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05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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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사절 보내 ‘금압’ 요구…막부의 남조 제압, 왜구 쇠퇴

 

공민왕은 1366(15) 김일(金逸)을 금적사(禁敵使)로 일본에 파견했다. 그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에 해적을 금압(禁壓)하도록 교섭을 했다.

경신왜구(1350)가 발호한지 16째가 되던 해였다. 이 무렵 몽골()은 중국 도처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에 쫓겨 중원을 거의 잃고 화북지역도 위태로울 때였다. 일본의 신정권인 무로마치 막부는 100년전에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원정의 공포를 잊지 않고 있었다.

고려의 외교사절 김일은 막부에 중국 황제를 들먹이며 왜구를 진압해줄 것을 요구했다. 고려는 막부가 왜구를 금압하지 않으면 중국 원나라와 힘을 합쳐 다시 일본을 공격할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막부는 고려 사신의 요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규슈의 남조세력(정서부)이 제압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려와 중국이 연합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넌다면 큰일 날수도 있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려의 속임수였다. 당시 원나라는 수세에 몰려 있었고, 중국 중원에는 뚜렷하게 강자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알본도 중국의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막부는 고려 사절의 요구를 듣기는 했지만 즉각적인 행동으로 나서지 않았다. 김일이 돌아온 후에도 다시 왜구가 고려를 쳐들어 왔다.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는 마침내 규수지역의 남조세력을 완전히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책임자로 쇼군 집안의 일족으로 핵심인물인 이마가와 료순(今川了俊)을 선택했다. 1371년에 료순은 규슈탄다이(九州探題)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막부를 자극하는 일이 발생했다. 1372년 중국에서 새로 명조(明朝)를 수립한 주원장(朱元璋)이 규슈지역 남조세력을 이끄는 가네요시 왕자(懐良親王)를 왜구 단속을 조건으로 일본 국왕으로 책봉한 것이다. 명나라가 남조를 합법적 정부로 인정하면 북조는 중국과 고려에게 반란세력이 된다. 두 번이나 원나라의 공격을 받은 북조의 막부는 다급해졌다. 쇼군 요시미쓰는 료순에게 다이자부(大宰府)를 탈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경남 통영 최영장군 사당 /문화재청
경남 통영 최영장군 사당 /문화재청

 

그러면 고려는 왜 경신왜구 출몰 이후 16년 동안 왜구금압을 요구하는 사절을 일본에 보내지 않았을까. 그것은 남방보다는 북방이 더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영 교수(방통대)의 견해를 인용하면, 공민왕(재위 1351~1374) 초기는 몽골이 쇠퇴하고 명()이 흥기하는 때였다. 왕조가 사직을 보전하려면 북방정책에 치중해야 했다. 왜구에 대해서는 미봉책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공민왕 3(1354) 고려는 원()의 요구에 따라 최영(崔瑩) 장군을 앞세워 3만명의 군대를 파병해 장사성(張士誠)의 난 진압을 지원했다. 그러나 원은 반란 진압에 실패했고, 고려는 원나라가 쇠락할 것이란 정세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후부터 고려는 북방에서 남방으로 눈을 돌려 왜구에 대한 방어를 우선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마가와 료슌 /위키피디아
이마가와 료슌 /위키피디아

 

우왕 원년인 1375, 고려는 나흥유(羅興儒)를 사절로 다시 보냈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나흥유가 일본에 도착하니 일본은 그를 첩자로 의심해 가두었다. 본래 고려의 승려였던 양유(良柔)라는 자가 이를 알고 나흥유를 풀어줄 것을 청해 풀려났다고 한다.

당시 막부는 고려와 중국을 경계했다. 100년전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의 원한도 사라지지 않았겠거니와, 남조 측과 접근하는 것을 경계했을 것이다. 나흥유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 마침 명나라가 큐슈 남조의 가네요시 왕자측에 보낸 사신이 막부측 료순에게 잡혀 있었다.

 

막부측은 다급해 졌다. 명나라가 이미 남조를 지지한데다 고려마저 북조에 등을 돌리게 되면 외교적으로 고립될 뿐 아니라, 자칫 내전이 국제전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었다. 중국에선 몽골이 1367년 대도(大都, 베이징)에서 퇴각해 사막 북쪽으로 쫓겨나고 명나라가 들어섰다. 조만간 중원이 안정되면 명나라-고려가 남조와 연합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흥유는 막부에게 왜구 금압을 요구했다. 북조와 막부를 대신해 료순은 나흥유를 극진히 대접했다.

 

료슌은 드디어 남조의 정서부(征西部)를 향해 무력 행동을 개시했다. 1377년 료슌은 규슈 사가현 교외의 치후와 니나우치에서 남조 세력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류슌은 남조의 핵심세력인 기쿠치씨를 대파했다. 이후 남조측은 아리아케(有明)만으로 후퇴하고, 류슌은 정서부 세력을 포위했다.

 

고려는 또다시 13776(우왕 3)에 안길상(安吉祥)을 금적사(禁賊使)로 임명해 일본에 왜구 진압을 더 강하게 압박했다. 규슈탄다이 료순은 안길상 파견에 대한 답례로 부하 신흥을 고려로 보내 왜구의 고려 약탈에 대해 분격하고 부끄럽게 여긴다고 설명했다. 남조를 궤멸시켜 왜구의 뿌리를 뽑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이어 그해 9월에 고려는 정몽주(鄭夢周)를 일본에 또 파견했다. 막부측의 왜구 금압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왜구 진압을 위해 고려는 명나라와 공동전선을 폈다. 명태조 홍무제는 고려에 사절을 보내 외구가 중국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중간에서 방어해줄 것을 요구했다. 공민왕은 홍무제의 요구를 따르면서 화약과 화포 지원을 요청했다. 최무선(崔茂宣)이 화약 개발에 성공했지만 중국 수준을 따라잡지 못했고, 중국의 우수한 기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명나라 내부에서는 고려에 화약기술 이전에 반대의견이 있었지만 홍무제는 고려와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선진 화약기술을 제공했다.

 

수세에 몰린 남조측은 최후발악적인 왜구활동을 전개한다. 이영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1372~1381년 사이 외구출몰 횟수는 299건으로, 고려말 왜구 전체 출몰회수의 50%를 넘는다.

아지발도(阿只抜都)1380년에 식량을 구하기 위해 료슌의 포위망을 뚫고 고려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약탈에 나선 것도 이 시기였다. 북조의 포위 압박 속에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남조측 정규군이 왜구로 돌변, 약탈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고려 해안 뿐 아니라 명나라 해안까지 진출했다. 왜구 진압은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되었다.

 

1340년대 규슈 일대 남조측과 북조측 세력 판도 /コトバンク
1340년대 규슈 일대 남조측과 북조측 세력 판도 /コトバンク

 

고려말의 왜구진압은 외교와 국방의 두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고려 조정은 여러차례 무로마치 막부에 사절을 보내 왜구 금압을 요구하는 한편, 군비도 증강했다. 공민왕 22(1373)에 고려는 수군을 창설했다. 바다로 쳐들어온 왜구를 육지에서 방어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바다에서 격퇴하는 것이 더 유리했다. 1377년에는 최무선의 건의에 따라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설치해 화약 무기를 제조했다. 그 덕분에 아지발도의 대규모 군단이 침입해 왔을 때 적선 500척을 불태우고 내륙 깊숙한 남원에서 그들을 제압할수 있었다.

외교와 국방력 강화라는 양날의 칼은 남조측의 왜구 소동을 잠재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1380년 이후 왜구의 침탈은 급격히 쇠퇴했다.

 

왜구 침략은 고려와 일본의 외교관계를 재개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여몽연합군의 두차례 일본 원정으로 적대관계에 있던 고려와 일본 막부는 외교를 제개했다. 이마가와 료순은 정몽주가 13788월에 귀국할 때 왜구에 잡혀간 고려인을 돌려보냈다. 그후 료슌은 조선이 건국한 뒤인 1395년까지 10여차례에 걸쳐 피로인(被擄人)들을 송환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南北朝時代 (日本)

<고려사>,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이영저, “왜구, 고려로 번진 일본의 내란‘, 2020, 보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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