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가 조선인이라는 왜곡…가왜(假倭)의 실체
왜구가 조선인이라는 왜곡…가왜(假倭)의 실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06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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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황국사관에 기초한 상상적 산물…막부 스스로 자국 왜구 금압에 나서

 

일본 사학자 나카무라 히데다카(中村榮孝, 1902~1984)는 왜구가 조선인으로 구성된 해적집단이란 주장을 처음 들고 나온 사람이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고려의 재인(才人), 화척(禾尺) 등과 같은 특수부락민과 신분 해방을 원하는 천민이 왜구라고 속이고 폭동을 일으킨 예가 많으며, 이들의 길 안내를 받아서 해구(海寇)들이 육지 깊숙이 침입하는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려의 불만 세력이 왜구의 핵심이고 자기네들은 어쩌다가 그들의 길안내를 받아서 침입한 적이 있다는 얘기다.

주객이 전도된 주장이다. 물론 왜구를 가장해 약탈에 나선 고려인들이 있었음은 <고려사>에 등장한다. 이를 <조선왕조실록>엔 가왜(假倭)라는 단어로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고려사 전체를 통해 500번 이상 등장하는 왜구출몰 기사 가운데 가왜에 해당하는 경우는 3건에 불과하다. 3건으로 500건의 왜구를 고려인이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고려사에 나오는 대목을 살펴보자.

화척(禾尺)들이 무리를 지어 왜구를 사칭하면서 영해군(寧海郡)을 침략하여 관아와 민가를 불살랐다. 판밀직(判密直) 임성미(林成味), 동지밀직(同知密直) 안소(安沼), 밀직부사(密直副使) 황보림(皇甫琳),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강서(姜筮) 등을 보내 그들을 추격하여 사로잡았다. 임성미 등은 포로로 잡혀갔던 남녀 50여 인과 말 200필을 바쳤다. 화척은 양수척(揚水尺)을 말한다. (우왕 84)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 이무(李茂)가 포로가 된 화척(禾尺) 30여 인과 말 100필을 바쳤다. 여러 도의 안렴사와 수령들이 각각 포로로 잡은 화척들을 바치자 왕이 순군(巡軍)에 가두어 국문하도록 하니, 주모자는 참형에 처하고 처자식과 말은 적몰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었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여러 도의 안렴사들에게 공문을 보내 화적들을 여러 주에 분산 배치하는 한편, 평민과 동일하게 차역(差役)의 의무를 지웠으며,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참형에 처하도록 했다. (우왕 84)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의 화척(禾尺재인(才人) 등이 왜구를 사칭하여 평창(平昌원주(原州영주(榮州순흥(順興횡천(橫川) 등지를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다. 원수(元帥) 김입견(金立堅)과 체찰사(體察使) 최공철(崔公哲)50여 인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처자는 주군(州郡)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우왕 96)

 

화척과 재인은 천한 일을 하는 특수집단의 사람들이었다. 화척은 주로 도살업에 종사하는 백정들을 말하고, 재인은 가무를 통해 생활하던 천인집단이었다. 특히 화척은 거란이나 몽골족 등 이민족이 주류를 이뤘다. 고려의 일반 양인들은 이들과 함께 거주하거나 혼인하는 것마저 꺼렸다.

화척과 재인들은 자기들끼리 집단을 이뤄 여러지역을 옮겨 다니며 거주하다가 걸식, 방화, 살인등을 자행하는 일들이 많았다. 심한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이민족의 침입 때 협조한 일도 있었다. 이들은 왜구의 출몰로 사회가 혼란해지고 기강이 문란해지자 왜구를 가장해 도적행각을 벌인 것이다.

 

왜구(오른쪽)가 명군(왼쪽)과 싸우는 모습 /도교대 소장
왜구(오른쪽)가 명군(왼쪽)과 싸우는 모습 /도교대 소장

 

가왜는 우왕 8~9(1382~1383)에만 나타난다. 그 원인은 앞서 공민왕 9(1360)에 화척과 재인을 징집해 서북면(평안도)에 병졸로 배치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가 나온다.

양광도(楊廣道전라도(全羅道)에 사신을 보내 제주(濟州) 사람 및 화척(禾尺)과 재인(才人)을 추쇄하여 서북면의 수졸(戍卒)로 충당하였다.” (공민왕 9, 9)

경작지도 없고 국가에 대한 부역도 가해지지 않았던 화척, 재인들을 군인으로 징집한 것은 그들에겐 사활이 걸린 문제였을 것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가왜로의 활동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장득진은 고려말 왜구침략기 의 동향이란 논문에서 천민집단으로 계급적 모순에 시달리고 있던 화척, 재인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가왜로 대두되었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그들에게서 민족 내지 국가라는 의식을 기대하기란 힘든 일이다. 곧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또한 봉건지배층에 항거하기 위해 가왜로서 활동한 것이 아닌가 한다.”고 해석했다.

 

고려사에는 나카무라가 주장하듯이 화척과 재인이 왜구의 길잡이가 되었다는 내용이 없다. 나카무라는 고려말 왜구가 자기 조상이 한 짓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다.

나카무라는 1926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사편수회 촉탁이 되어 조선사 편수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철저하게 황국사관에 입각해 조선사를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의 입장에서 자기네 조상을 도둑질하는 사람으로 모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나카무라는 고려사는 물론 조선왕조실록을 샅샅이 뒤지며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하려 했다. 그는 극히 일부의 자료를 과대포장함으로써 조선사람이 왜구라고 우긴 것이다.

 

14~16세기 왜구 침몰지역 /위키피디아
14~16세기 왜구 침몰지역 /위키피디아

 

세종실록에 판중추원사 이순몽(李順蒙)이 상소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신이 듣자옵건대, 고려 왕조의 말기에 왜구가 흥행하여 백성들이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간의 왜인들은 10명에1, 2명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본국의 백성들이 거짓으로 왜인의 의복을 입고서 당()을 만들어 난을 일으켰으니, 이것도 또한 감계(鑑戒)되는 일입니다.” (세종 281028)

이순몽이 호패법을 다시 시행하자고 상소하면서 들은 얘기를 적은 것일 뿐이다. 상소문의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일수는 없다. 이런 애매한 기록들이 나카무라에겐 좋은 창작 소재가 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가왜(假倭)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조선사람이 일본인으로 위장해 약탈하는 행위다.

태종 시기에 김인우가 울릉도와 독도의 상황을 아뢰었다. "신이 일찍이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로 있을 때에 들었는데, 무릉도(武陵島)의 주회(周回)7()이고, 곁에 소도(小島)가 있고 …… 옛날에 방지용(方之用)이란 자가 있어 15()를 거느리고 입거(入居)하여 혹은 때로는 가왜(假倭)로서 도둑질을 하였다고 합니다.“ (태종 1692)

 

왜구와 명나라 해전 /위키피디아
왜구와 명나라 해전 /위키피디아

 

조선시대에는 제주도 출신 해민이 왜구와 비슷한 약탈행위를 한 정황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다. 그들을 두독야지 또는 두독야라고 불렀다.

(경상도내의) 사천과 고성·진주 지방에, 제주의 두독야(豆禿也)라고만 이름을 칭하는 사람이, 처음에는 2, 3척의 배를 가지고 출래(出來)하더니, 이제는 변하여 32척이 되었으며, 강 기슭에 의지하여 집을 지었는데, 의복은 왜인과 같으나, 언어는 왜말도 아니고 한어(漢語)도 아니며, 선체는 왜인의 배보다 더욱 견실하고, 빠르기는 이보다 지나치는데, 항상 고기를 낚고 미역을 따는 것으로 업()을 삼았습니다. (성종 885)

근년에 제주(濟州) 세 고을의 인민이 자칭 두독야지(豆禿也只)라 하면서 처자(妻子)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경상도·전라도의 바닷가 연변(沿邊)에 옮겨 정박하는 자가 수천여 인인데, (성종 81121)

왜선이 도둑질할 때 바람이 순하면 돛을 달고 바람이 없으면 노를 젓는데, 오로지 배가 경쾌하여 쓰기에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청컨대 여러 포()에 두독야지선(豆禿也只船)의 체제에 의하여 가벼운 배를 만들어서 예기치 못할 일에 대비하게 하소서. (성종 201210)

 

가왜 현상이 있었던 것은 역사기록을 토대로 볼 때 사실인 것 같다. 다만 고려 또는 조선 왕조의 수탈구조에서 저항한 계층 갈등이었지, 왜구의 본질은 아니었다.

 

고려말 왜구가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은 막부측 인사들의 언급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고려 사절 나흥유(羅興儒)에 대한 답례사절로 일본 승려 양유(良柔)1376(우왕 2) 답방으로 고려에 와 일본 승려 주좌(周佐)가 부친 글을 올렸다. 일본 승려 주좌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하건대 우리나라 서해도(西海道)의 한 지역인 구주(九州)는 난신(亂臣)들이 할거하고 있으면서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은 지가 또한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서쪽바닷가 지역의 완악한 백성들이 틈을 엿보아 귀국을노략질한 것이지, 저희들이 한 일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우리 조정에서도 장수를 보내 토벌하고자 그 지역 깊숙이 들어가 서로 대치하며 날마다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구주를 수복하게 된다면 천지신명에 맹세코 해적질을 금지시키겠습니다.” (우왕 210)

일본 막부는 천지신명에 맹세하며 남조측 난신들의 해적질을 금지시키겠다고 했다. 나카무라는 이런 대목은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 북조의 규슈단다이(九州探題)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은 고려의 끈질긴 왜구금압 요구에 부응해 우왕 4(1378)에 소수이지만 69명을 고려에 파견해 고려군과 합동작전을 펼친 적도 있다.

일본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원료준(源了浚)이 승려 신홍(信弘)을 시켜 자기 휘하의 군사 69인을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와서 왜적(倭賊)을 체포하였다.” (우왕 46)

 


<참고자료>

이영저, “왜구, 고려로 번진 일본의 내란” 2020, 보고사

마주 보는 한일사 I", 한일공동역사교재 편찬위원회, 2006, 사계절, P196~217

<고려사>,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조선왕조실록> , 국사편찬위원회

장득진, 고려말 왜구침략기 의 동향”, 한국사데이타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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