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사①…아퐁소 1세, 독립왕국 성취하다
포르투갈사①…아퐁소 1세, 독립왕국 성취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08 17: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작령에서 출발…레온-카스티야 왕국 내분 과정에서 독립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의 서쪽 끝에 대서양에 맞닿아 있다. 면적은 92,212으로 우리나라의 90% 정도이고, 인구는 1천만명 정도다. 이 작은 나라는 한때 아프리카, 남미의 브라질, 아시아의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의 마카오, 대만, 일본 규슈의 데지마(出島)에 이르기까지 세계 해양을 지배했다.

페르나움 멘데스 핀토 /위키피디아
페르나움 멘데스 핀토 /위키피디아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다. 1513년 포르투갈인 프란시스코 호드리게스가 그린 지도에 한국이 처음으로 꼬레(Core)로 등장하고, 포르투갈인 페르나움 멘데스 핀토(Fernão Mendes Pinto)15427월에 명나라 군사를 따라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한강근처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 소국이 세계해양 진출의 선도국으로 나선 배경은 대서양에 면해 있는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해 일찍부터 바다에서 활로를 찾았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함께 이베리아 반도의 나라로, 두 나라는 같은 문화와 종족이면서도 분리되었다. 그 출발점은 포르투갈 왕국으로부터 시작된다.

포르투갈은 8세기초 이슬람의 침략으로 빼앗긴 영토를 찾으려는 북부 기독교왕국의 리콩키스타(Reconquista) 전쟁에서 시작된다. 북부 고산지대로 쫓겨난 기독교도들은 아스투리아 왕국(Kingdom of Asturias)을 세우고, 9세기초에 포르투갈 북부 지역의 포르투스 칼레(Portus Cale)라는 항구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아스투리아 왕국은 비마라 페레스(Vímara Peres) 백작에게 변경지역을 맡겼다. 페레스는 일대에 이슬람교도인 무어인들을 쫓아내고 포르투갈 백작령을 다스렸다. 포르투갈이란 국명이 칼레 항구’(Port of Cale)라는 말에서 생겨났다는 것은 태생적으로 해양을 지향하는 운명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스투리아 왕국이 레온, 카스티야, 갈라시아 왕국으로 나눠질 때 백작령은 레온왕국에 소속되었으나, 준독립적 지위를 확보했다. 레온, 카스티야, 갈라시아, 아라곤은 오늘날 스페인의 원조다.

레온과 카스티야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레온의 아퐁소 6세가 승리하고 스스로 히스패니아의 황제라고 칭했다. 아퐁소 6세에게는 우라카(Uracca)와 테레사(Teresa)라는 딸이 있었다. 우라카는 정실 왕비에게서 낳은 공주이고, 테레사는 혼외의 딸이었다. 아버지 아퐁소 6세가 죽고 우라카는 레온의 여왕이 되었고, 테레사는 포르투갈 백작령을 물려받았다. 한 살 차이인 두 이복 자매는 앙숙이었다. 1)

 

우라카는 아버지 아퐁소 6세의 뜻에 따라 8살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 남부 부르고뉴(부르군트)의 귀족 레이몽(Raymond)과 정략결혼을 했다. 아버지의 생각은 강한 세력의 힘을 배경으로 남부의 이슬람 세력을 내쫓려는 것이었다. 우라카는 성년이 되면서 레이몽과 사이에 딸과 아들을 낳았다. 레이몽은 우라카가 28살 되던 해에 사망했다.

부왕 아폰소는 죽기 직전에 후계자로 우라카를 지명했는데, 귀족들은 우라카가 재혼을 하는 조건으로 왕위 승계를 지지했다. 우라카의 신랑감으로 레온과 카스티유의 귀족들이 경쟁했는데, 부왕은 어느 쪽을 선택하다간 왕국이 분열될 것을 두려워 아라곤 왕국의 왕자 아폰소와 혼담을 추진했다. 레온-카스티유, 아라곤의 연합왕국을 형성한다는 게 부왕의 야심이었다.

하지만 혼담이 성사되기 전에 아폰소 6세는 1109년 여름에 사망했다. 우라카가 왕위를 계승하려면 결혼을 해야 했다. 귀족들은 아라곤 왕자와의 결혼을 반대했다. 아라곤의 영향력이 커진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때 테레사와 그녀의 남편 엔리케(Henrique)는 아라곤의 편을 들었다. 엔리케는 장인이 추진하던 결혼을 중단할수 없다며 혼담을 마무리짓자고 했다. 우라카도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으나 부왕의 유언을 거부할수 없는데다 왕위의 공백을 빨리 수습해야 했기 때문에 아라곤의 아폰소와 결혼에 합의했다. 결혼조건은 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차기 왕위를 계승하며, 자식이 없이 우라카가 사망할 경우 아라곤측이 계승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우라카가 전남편에게서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밀고 있던 귀족들에겐 매우 불쾌한 결혼조건이었다.

우라카와 아폰소는 결혼했지만, 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아폰소는 위압적으로 우라카를 누르려고 했고, 우라카는 반발했다. 부부 사이가 금이 가자, 레온과 카스티야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아라곤은 반란을 진입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했고, 이 때 포르투갈의 엔리케 백작과 테레사는 아라곤측에 섰다.

 

1070년 포르투갈 백작령 /위키피디아
1070년 포르투갈 백작령 /위키피디아

 

우라카와 테레사 사이에 전면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테레사의 남편 엔리케는 레온을 침략해 영토를 확장했다. 1112년 엔리케가 죽은후 테레사는 4살인 아들 아퐁소 엔리케스에게 백작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여왕이라 칭하고 전권을 행사했다. 남편이 죽고 난 후 두 자매의 전쟁은 격화되었다.

테레사는 남편이 죽은후 애인을 두었다. 포르투갈 북쪽 갈리시아의 영주 페르난두 페레스(Fernando Pérez)였다. 테레사는 정부에게 코임브라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아들 아퐁소 엔리케스는 성장하면서 점점 어머니와 정부를 싫어하게 되었다. 1121년 테레사는 북부 국경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언니 우라카의 군대에게 포로가 되었다. 성직자들이 협상을 중재했다. 협상에서 테레사는 포르투갈 백작령을 통치하되, 우라카의 신하가 된다는 조건에 합의하고 풀려났다. 2)

 

포르투갈 왕국 초대국왕 아퐁소 1세 /위키피디아
포르투갈 왕국 초대국왕 아퐁소 1세 /위키피디아

 

테레사의 아들이자 포르투갈 백작인 아퐁소 엔리케스(Afonso Henriques)1125년에 14살이 되자, 귀족들은 아들이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들도 어머니에게 반기를 들었다.

1128년에 상마메드에서 아들파와 어머니파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상마메드 전투(Battle of São Mamede)에서 아퐁소 엔리케스는 승리하고 정식으로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다. 그가 포르투갈 왕국의 초대 국왕 아퐁소 1(Afonso I).

어머니 테레사와 정부 페레스는 포르투갈 북부 갈라시아로 도망가 버렸다. 아퐁소 1세는 갈라시아를 영토화하지 못한채 포르투갈만으로 자립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갈라시아주가 포르투갈 땅이 되지 못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아퐁소 1세는 왕이라 칭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백작일 뿐이었다. 교회와 주변 왕국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러려면 레온-카스티야의 속국 지위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가 포르투갈의 권력을 장악했을 때 카스티야에는 우라카가 죽고 우라카와 전남편 레이몽과 사이에 낳은 아퐁소 7세가 왕위에 올라 있었다. 포르투갈의 아퐁소 1세와 카스티야의 아퐁소 7세는 이종사촌이 된다.

 

1210년의 이베리아 반도 영토 /위키피디아
1210년의 이베리아 반도 영토 /위키피디아

 

레온-카스티야 연합왕국은 포르투갈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아퐁소 7세는 포르투갈 백작령이 속주임을 공식화했다. 1129년 포르투갈의 아퐁소 1세는 아퐁소 7세에게 선전 포고를 하고, 포르투갈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군사적 대치만으로 독립국의 국왕이 될수 없었다. 당시는 카톨릭의 세상이었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아퐁소는 많은 수도원을 건립했다. 지금까지 위용을 자랑하는 코임브라의 산타 크루스 수도원(Mosteiro de Santa Cruz)1131년에 건립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교황청은 브라가의 부주교를 주교로 승격시켰다.

남쪽의 이슬람 무어인들이 레온 왕국을 공격했을 때 아폰소 1세는 사촌 아퐁소 7세와 휴전협정을 맺고 레온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1139년 아폰소 1세는 오리케 벌판에서 무어 인들과 마주쳤다. 중과부적의 조건에서 포르투갈 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오리케 전투(Battle of Ourique)는 포르투갈 독립의 상징이다. 오늘날에도 포르투갈 국기에 푸른 색의 다섯 방패가 그려져 있는 것은 무어인들의 다섯왕을 패퇴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3)

 

포르투갈 국기. 가운데 다섯 개 방패가 있다. /위키피디아
포르투갈 국기. 가운데 다섯 개 방패가 있다. /위키피디아

 

오리케 전투 승리 이후 아퐁소는 레온-카스티야의 영토를 계속 침공해 1140~1141년 발데베즈 전투(Battle of Valdevez)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아퐁소 7세가 평화 협상을 요구했고, 1143년에 로마 교황의 특사가 참석한 가운데 자모라 회의(Treaty of Zamora)에서는 아퐁소에게 군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기로 합의하게 되었다.

1147년에 아퐁소 1세는 리스본을 공격해 점령하고, 무어인들은 남쪽으로 내몰았다.

 

리스본을 점령한 아퐁소 1세 /위키피디아
리스본을 점령한 아퐁소 1세 /위키피디아

 

아퐁소는 교황청에 새로운 왕국을 인정받기 위해 교황 이노센시오 2세에게 요청하면서 금 4온스의 조공을 매년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교황 루시오 2세는 1144년이 되어서야 이 서약을 수락하고 포르투갈을 공작으로 대우하되, 브라가의 대주교를 카스티야의 톨레도(Toledo) 대사교에게 예속되도록 했다.

완전독립을 원하던 아퐁소에겐 실망스런 조건이었다. 하지만 아퐁소는 그후에도 카톨릭을 위해 수많은 봉헌을 했고, 1179413일에 교황 알렉산더 3(Pope Alexander III)는 아퐁소 1세를 독립 왕국의 왕으로 선언하게 되었다. 아퐁소의 꿈은 40년만에 성취되었다.

 

 


1) Wikipedia, Urraca of León

2) Wikipedia, Theresa, Countess of Portugal

3) Wikipedia, Afonso I of Portugal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