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사②…250년 앞선 리콩키스타 완성
포르투갈사②…250년 앞선 리콩키스타 완성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0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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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9년 알가르베 함락으로 국내영토 확장 종결…상업과 해운업 육성

 

포르투갈 왕국을 건국한 왕은 아퐁소 1세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 남쪽에 버티고 있는 이슬람 세력을 내모는데 주력했다. 1139년 아폰소는 리스본 남쪽 깊숙이 있는 이슬람 세력의 본거지 오리케(Ourique)로 쳐들어갔다. 이슬람 병력은 포르투갈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투 개시 전날 밤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 신의 가호가 있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다음날인 725, 하늘에서 빛이 비치더니,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났다. 아퐁소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스도는 알모라비드(Almoravid)를 쳐부수라고 말씀하셨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아퐁소는 공격명령을 내렸다. 전투에서 완벽하게 승리했다.

이 전설적 스토리는 포르투갈의 건국신화나 다름 없다. 귀족회의는 오리케 전투 승리를 계기로 아퐁소를 포르투갈 왕으로 추대했고, 카스티야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교황청 눈치를 보던 카톨릭 사제들도 아퐁소를 국왕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1)

아퐁소는 십자군의 도움을 얻었다.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해 떠나는 십자군들은 프랑스, 영국, 플란더스(벨기에), 독일의 영주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일단 포르투갈의 항구에 집결했다. 주교들은 예루살렘의 이교도들을 내쫓는 것과 이베리아의 이교도를 물리치는 것은 같다. 일단 이곳의 이슬람을 물리친 후에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설득했다. 십자군 부대는 약탈물을 얻는 조건으로 리스본 공격에 나섰다. 11471024일 십자군의 도움으로 포르투갈은 리스본을 점령했다.

리스본을 흐르는 타호(Tagus) 강은 서부 유럽에서 가장 긴 강으로,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연결되어 있다. 이 강과 리스본은 포르투갈에겐 보물이나 다름 없었다. 리스본은 강과 바다를 연결해 상업도시로 성장했고, 상인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초대 국왕 아퐁소는 해군을 창설하고 강화했다. 포르투갈은 해군을 통해 바다로 나가는 길을 찾게 된 것이다.

아퐁소는 백작으로 11, 포르투갈 국왕으로 46년을 재위한 후 1185년에 사망했다. 이어 아들 산슈 1(Sancho I)가 등극했다. 이후 샨슈 1, 아퐁소 2, 산슈 2세에 이르기까지 후손들은 집요하게 이베리아 반도 남쪽에 버티고 있는 이슬람 세력을 압박해 나갔다.

 

오리케 전투에 앞서 아퐁소 앞에 나타난 신의 계시 /위키피디아
오리케 전투에 앞서 아퐁소 앞에 나타난 신의 계시 /위키피디아

 

1248년 아퐁소 3세가 형 산슈 2세의 왕위를 찬탈하고 5대 왕이 되었다. 아폰소 3세는 찬탈자라는 불명예를 씻고 취약한 교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포르투갈 남쪽 끝에 진을 치고 있던 이슬람 무어족의 거점 알가르베(Algarve)를 공격했다. 그는 1249년 알가르베를 함락하고 영토를 지중해까지 확장했다. 현재의 포르투갈 국경은 이때 완성되었다.

이로써 포르투갈의 리콩키스타(Reconquista)는 완성되었다. 스페인이 마지막 이슬람을 쫓아낸 1492년보다 243년 앞선 것이다. 포르투갈이 스페인보다 앞서 대서양으로 진출한 것도 리콩키스타를 일찌감치 마무리지었기 때문이라 할수 있다.

 

포르투갈의 알가르베 점령에 카스티야가 반발했다. 미수복지는 먼저 차지한 쪽이 주인인데, 자기네들보다 포르투갈이 먼저 점령한 게 못마땅했다. 아퐁소 3세는 이 문제를 결혼 정책으로 풀었다. 자신이 카스티야 국왕 아퐁소 10세의 혼외 딸 베아트리스(Beatriz)와 결혼하고 알가르베를 왕비의 영지로 만드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문제는 아퐁소 3세에게 본처 마틸다(Matilda)가 버젓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카톨릭에서 이혼은 금지되어 있다. 그럼에도 아퐁소는 카스티야와 전쟁을 피하고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베아트리즈와 결혼했다.

교회는 국왕의 결혼을 반대했고, 마탈다는 교황에게 남편을 제소했다. 교황은 아퐁소 3세를 간통죄로 파문하고 마틸다에게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교황의 파문이 내려지던 1258년에 마틸다는 세상을 떠났고, 파문은 흐지부지되었다. 2)

 

리콩키스타를 끝내고 포르투갈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13~14세기에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고,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며 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국내에 시장이 급속히 증가해 13세기 후반에는 약 30개나 되었다. 아퐁소 3세는 시장 개설을 명령하고 상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했다. 상인층을 중심으로 부르죠아 계층이 새로운 세력을 부상하게 되었다.

선박 건조술이 발달되었다. 13세기 초부터는 속력이 빠르고 많은 짐을 실을수 있는 배들이 건조되었다. 포르투갈의 항구에는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리스본은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255년 왕국은 수도를 코임브라에서 리스본으로 이전했다.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농촌도 주곡생산에서 상품 생산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주요 수출상품은 포도주, 올리브유, 소금이었고, 코르크, 건포도, 과일, 가죽, 밀초 등도 수출되었다. 수입품은 직물, 무기, 금속, 향료, 곡물, 목재, 훈제 어육 등이었다. 3)

 

디니스 왕때 조성된 소나무 숲. /Agroportal(Portugal)
디니스 왕때 조성된 소나무 숲. /Agroportal(Portugal)

 

아퐁소 3세가 죽고 베아트리스 사이에 난 디니스(Denis)1279년에 왕위에 올랐다. 포르투갈은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었기 때문에 디니스 왕은 내치에 주력했다. 농민의 왕, 시인의 왕이라 불리는 디니스는 농업을 장려하고 시장 개설을 통해 상업을 육성했다. 그는 황무지에 소나무를 심게 했는데, 핀할 데 레이리아(Pinhal de Leiria)라 불리는 이 숲은 700년이 지난 지금도 가꿔지며 포르투갈을 푸르게 하고 있다.

그는 특히 해운업에 주력했다. 제노바에서 선박기술자를 초빙해 상선을 건조하고 항해 경험이 풍부한 선원들을 불러모아 항해자들을 양성했다. 이들이 후에 포르투갈이 대양으로 나가게 하는 기반이 된다.

그는 포르투갈 최초의 대학을 만들고, 문예를 육성했다. 그는 46년간 재위하면서 포르투갈을 안정시키고 강국으로 만들었다는 평을 듣는다. 조선조의 세종대왕을 연상시킨다. 4)

 

포르투갈의 안정기는 디니스를 이어 아퐁소 4, 페드루 1, 페르난도 1세까지 160년간을 이어갔다. 이 기간 포르투갈은 카스티야의 이슬람 정복전에 지원군을 보내기도 하고, 때론 카스티야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나라가 비교적 안정되면 궁중암투가 벌어지고, 국왕의 스캔들이 벌어지는 경향이 있다. 포르투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이녜스를 황후로 책봉하는 의식(그림) /위키피디아
죽은 이녜스를 황후로 책봉하는 의식(그림) /위키피디아

 

아퐁소 4세의 장남 페드루는 왕세자 시절에 카스티유 공작의 딸 콘스탄사(Constanza)와 결혼했다. 왕세빈 콘스탄사에게는 이녜스 데 카스트로(Inês de Castro)라는 여시종이 카스티야에서 따라왔다.

왕세자 페드루는 첫눈에 이녜스와 사랑에 빠졌다. 이녜스도 카스티야 귀족의 딸이었다. 페두르는 실부인 콘스탄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콘스탄사는 남편의 외도를 막으려 애썼지만, 1345년에 콘스탄사가 아기를 낳다 죽었다.

페드루는 이녜스와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아버지 아퐁소에게 요청했으나, 부왕은 거절하고 다른 여인과 결혼하라고 재촉했다. 페드루는 콘스탄사와의 사이에 아들 페르난도를 두었는데, 이녜스와의 사이에서도 아들이 있었다. 부왕은 아들이 이녜스와 결혼하면 후계자 분쟁이 생길 것을 걱정했다. 페드루는 끝까지 이녜스와의 결혼을 요청했지만, 아버지는 이녜스를 궁궐에서 내쫓았다. 그리곤 신하들에게 이녜스를 살해하가고 지시했다. 세 명의 귀족이 이녜스를 죽이고 달아났다.

1357년 아버지가 죽고 페드루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녜스를 살해한 사람을 찾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셋 중 두 사람에 치포되었다. 그는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두 죄인의 심장을 도려내며 죽여버렸다.

전설에 따르면, 페드루는 이녜스와 결혼했다고 공포하고 정실왕비로 책봉했다고 한다. 페드루는 이네스의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왕후의 옷을 입히고 왕관을 씌우고, 귀족들에게 그녀의 앞에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 유해의 손에 키스를 하라고 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 스토리가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고 치부한다. 이 스토리는 페드루가 죽은지 200년이 되는 1577년에 처음 희곡으로 등장했으며, 그 이후 다양한 장르의 소재가 되었다. 5)

 

어쨌든 페드루가 1383년에 죽고 그의 아들 페르난도(Fernando)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페드루의 첫 번째 왕비 콘스탄사가 낳은 아들이었다. 페르디난도에겐 아들이 없었다. 그가 죽으면서 포르투갈 왕위를 놓고 전쟁이 벌어진다.

 


1) Wikipedia, Battle of Ourique

2) Wikipedia, Beatrice of Castile (12421303)

3) 스페인 포르투갈사 - 화폐 경제의 진보(進步), 네이버 지식백과

4) Wikipedia, Denis of Portugal

5) Wikipedia, Inês de Cas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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