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사③…왕비의 책략에 흔들린 왕위계승
포르투갈사③…왕비의 책략에 흔들린 왕위계승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1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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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회의에서 국왕 선출…주앙 1세, 아비스 왕조를 열다

 

포르투갈 왕국을 연 아퐁소 왕조는 부르고뉴(부르군트) 왕조라고도 한다. 초대 아퐁소 1세의 아버지 엔리케(Henrique)가 프랑스 부르고뉴 공작가의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아퐁소 왕조는 9대왕 페르난도가 1383년에 사망하면서 244년만에 끝난다. 이후 2년간 왕이 없는 공위(空位, Interregnum) 기간을 거친후 1385년에 아비스 왕조(Aviz dynasty)가 새로 출범한다.

1383~1385년의 공위기를 거치면서 포르투갈은 새롭게 탄생한다. 공위기는 전쟁을 유발했지만, 또한 포르투갈이 스페인과 다른 나라라는 독립의식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비스 왕조를 연 주앙 1(João I)는 부르죠아와 귀족들의 추대에 의해 국왕에 올랐기 때문에 일종의 혁명이었다.

 

페르난도(재위, 1367~1383)에겐 아들이 없고, 왕비 레오노르 텔레스(Leonor Teles) 사이에 베아트리스(Beatriz)라는 공주를 두었다.

페르난도는 1377년에 일찌감치 4살에 불과한 어린 공주에게 왕위계승권을 선포했다. 여기에 왕비 레오노르의 음모가 개입되었다. 페르디난도에겐 부왕 페드루가 사후에 정실왕비로 인정한 이녜스(Inês de Castro)에게서 낳은 배다른 동생 주앙(João)과 디니스(Diniz)가 버젓이 버티고 있었다. 또 부왕 페드루가 혼외자로 낳은 또다른 주앙도 있었다.

레오노르는 남편 페르난도를 설득해 일단 베아트리스 이외에는 계승권을 박탈하도록 했다. 하지만 남편이 일찍 죽으면 삼촌들이 어린 딸을 누르고 왕위를 차지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왕비의 독기는 주앙에 꽃혔다. 주앙은 왕비가 데려온 여동생 마리아(María Teles)와 눈이 맞아 연애를 하고 있었다. 레오노르는 시동생이 왕이 되고 여동생이 왕비가 되는 것을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레오노르는 주앙에게 베아트리스와 결혼시켜 주겠다고 꾀고, 마리아가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귀가 얇은 후앙은 애인 마리아를 죽여버리고 도망쳤다. 후앙은 나중에 정보를 종합해 보니, 자신이 왕비의 계략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앙은 형 페르난도에게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페르난도는 동생의 죄를 사면해주고 조용히 살라고 했다. 하지만 언제 왕비의 또다른 음모가 닥쳐올지 몰라, 후앙은 카스티야로 도망쳐 버렸다. 1), 2)

 

1383년초에 페르난도 왕은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공주 베아트리스는 고작 10살에 불과했다. 페르난도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에 공주를 시집보내기로 작정하고 사위감을 물색했다. 어린 공주가 누구에게 시집가느냐가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영국, 프랑스의 왕자들이 베아트리스의 남편으로 거론되었지만, 최종 낙점은 카스티야의 국왕 후앙 1(Juan I)로 낙착되었다. 카스티야의 후앙 1세는 한해 전에 아라곤의 공주 출신의 왕비 엘레노르(Eleanor)와 사별했고, 그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다.

페르디난도는 재위 시절에 카스티야와 세 번이나 전쟁을 치렀지만, 혼사를 통해 양국간 전쟁을 종식시키고 싶어 했다. 카스티야로서도 베아트리스를 왕비로 맞아 포르투갈을 합병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해 5월 베아트리스와 후앙 1세의 결혼이 서둘러 진행되었다. 이어 10월에 페르난도는 38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베아트리스와 후앙 1세의 결혼 계약에는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면 포르투갈의 왕위를 계승하며, 그 아이가 14살 될 때까지 왕비 엘레노르가 섭정을 한다고 되어 있었다. 10살짜리 공주가 아기를 가지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그 아이가 14살 될 때까지 엘레노르가 포르투갈을 지배할수 있었다. 후앙 1세에게는 전왕비에게서 얻은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베아트리스가 낳은 아이가 포르투갈로 돌아올 것이란 계산도 있었다. 간악한 레오나르는 사위가 카스티유를 통치하고, 자신이 딸과 사위를 대신해 포르투갈를 섭정통치한다는 계획을 밀고 나갔다.

 

포르투갈 귀족들이 레오노르 왕비의 정부 안데이루를 살해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포르투갈 귀족들이 레오노르 왕비의 정부 안데이루를 살해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귀족과 상인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포르투갈은 레콩키스타를 끝내고 100년 이상 오랜 안정기를 보내면서 주요 항구에 상인을 중심으로 부르쥬아 계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내륙국인 카스티야의 지배를 받기 싫어했다.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해 얻어진 이익을 카스티야에게 세금으로 바치길 꺼려했다. 상인들의 지지를 업은 귀족들은 왕가에 남성 승계자들이 있는데 공주를 시집보내 카스티야의 통치를 받는 것에 분통을 터트렸다.

주앙 1세 /위키피디아
주앙 1세 /위키피디아

 

그런 가운데 왕비 레오노르는 남편이 죽자 곧바로 갈레고의 안데이루(Andeiro) 백작과 사랑놀음에 빠져 있었다. 귀족은 물론 리스본 시민들의 가슴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귀족과 상인들은 엘레노르에게서 권력을 빼앗아야 한다고 작정하고, 주앙에 주목했다. 주앙은 페드루 왕이 귀족의 딸인 테레사 로렌수(Teresa Lourenço)에게서 낳은 혼외 아들이었다. 그는 아비스 기사단의 수장(Master)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얻고 있었다. 이녜스(Inês de Castro)의 아들인 또다른 주앙은 이미 카스티야로 망명했고, 국내에 실질적으로 왕통을 이을 남성계보는 아비스의 후앙이었다.

귀족들과 후앙은 일단 레오노르의 정부 안데이루 백작을 살해했다. 곧이어 귀족들은 후앙을 포르투갈의 섭정과 수호자로 옹립하고, 레오노르의 권력을 박탈했다. 주앙은 국왕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섭정과 영토의 수호자’(rector and defender of the realm)란 꼬리표를 달았지만, 사실상 선출된 통치자였다.

카스티야에서 보기엔 이는 반역이었다. 전왕 페르난도에 의해 합법적으로 왕권을 계승한 베아트리스와 후앙 1(카스티야)가 있는데, 계승권이 박탈된 자가 나타나 통치자라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은 전쟁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3844, 카스티야가 포르투갈을 침공했다. 포르투갈의 주앙과 카스티야의 후앙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주앙(João)과 후앙(Juan)은 영어 John와 동일한 이름인데, 나라마다 달리 표기하고 있다.]

포르투갈에서는 누노 알바레스 페레이라(Nuno Álvares Pereira)가 군권을 지휘했다. 카스티야는 함대로 타호 강의 관문을 봉쇄하고, 5월에 리스본을 공격했다. 리스본은 포위되어 식량이 떨어져 갔다. 포르투갈은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리스본 시민들은 굶주림의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때 신은 포르투갈의 편이었다.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돌면서 카스티야군이 쓰러져 갔다. 카스티야의 왕은 138493일 포위망을 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3)

 

1385년 알주바로타 전투 /위키피디아
1385년 알주바로타 전투 /위키피디아

 

138546일 포르투갈 귀족회의(Cortes)는 주앙을 정식으로 국왕에 옹립했다. 섭정이란 꼬리를 뗀 것이다. 이로써 아비스 왕가(Aviz dynasty)가 시작된다. 아비스 왕가의 원조 주앙은 이전의 아퐁소 왕가의 핏줄을 이어받았지만, 귀족과 상인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왕조로 본다.

주앙이 스스로 국왕이라고 선포하자, 카스티야가 다시 쳐들어왔다. 이번에는 포르투갈군이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6월에 후앙 1세는 포르투갈을 끝장낼 요량으로 다시 병력 32,000명을 이끌고 침공해 왔다. 포르투갈군은 6,500명에 불과했다.

814, 알주바로타 평원에서 양측 군대가 대치했다. 카스티야측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원병이 참여했고, 포르투갈측엔 영국 장궁부대 200명이 참여했다. 51의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군은 뜨거운 애국심으로 적군을 방어했다. 소수였지만 영국 장궁수들은 앞서 백년전쟁의 크레시 전투(1346)와 푸아티에 전투(1356)에서 프랑스군을 공포에 물아 넣었던 부대였다. 알주바로타 전투(Battle of Aljubarrota)의 승리는 포르투갈과 영국 연합군에게 돌아갔다. 이 전투는 포르투갈의 군사력이 카스티야가 넘볼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입증했다. 4)

 

포르투갈 주앙 1세와 영국 랭카스터의 귀족 필리파의 결혼 /위키피디아
포르투갈 주앙 1세와 영국 랭카스터의 귀족 필리파의 결혼 /위키피디아

 

알주바로타 전투를 계기로 주앙은 포르투갈 국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카스티유는 뒤늦게 1411년에 주앙을 승인했다.

주앙은 영국의 지원에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영국 랭카스터 공작의 딸 필리파(Philippa)를 왕비로 맞았다. 이어 13835월에 포르투갈과 영국은 윈저궁에서 상호동맹 조약을 체결한다.

이 윈저 조약(Treaty of Windsor)6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포르투갈이 164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독립할 때 영국군이 지원했고, 18071814년 나폴레옹 전쟁, 2차 세계대전에서도 영국군은 포르투갈을 지원했다.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 때에 포르투갈군은 영국군을 지원했다. 5)

포르투갈 국민들의 독립정신이 스페인의 오랜 영토야욕을 저지했다면, 영국과의 동맹이 포르투갈의 대외정책을 오랫동안 지탱해 주었다.

 


1) Wikipedia, Beatrice of Portugal

2) Wikipedia, John, Duke of Valencia de Campos

3) Wikipedia, 13831385 Portuguese interregnum

4) Wikipedia, Battle of Aljubarrota

5) Wikipedia, Treaty of Windsor (1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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