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사⑦…스페인에 빼앗긴 왕실, 쇠퇴기
포르투갈사⑦…스페인에 빼앗긴 왕실, 쇠퇴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1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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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합스부르크왕가, 60년간 통치…네덜란드-영국에 식민지 잠식

 

포르투갈은 인도, 동남아, 아프리카 동서해안, 브라질에 식민지를 건설했지만, 16세기 후반들어 100만 남짓한 인구로 방대한 해외영토를 버텨 내는 게 버거웠다. 중앙정부가 탐욕스러운 해외 총독들을 관리하는데 한계를 드러냈고, 부가 넘치면서 사람들은 환락과 퇴폐 풍조에 빠졌다. 해외요새에 주둔한 군대는 원주민의 공격에 수시로 죽어나갔고, 젊은이들이 해외 근무를 기피하고 상무(尙武)정신이 시들어갔다. 항해중인 상선은 자주 난파되고 영국과 네덜란드의 해적들의 공격을 받았다. 수에즈 통로를 활용한 해상루트가 개척되면서 희망봉을 돌아 개척한 항로의 경쟁력이 떨어지게 되었다.

 

포르투갈 전성기의 해외식민지 /위키피디아
포르투갈 전성기의 해외식민지 /위키피디아

 

이런 위기에 더해 왕조의 대가 끊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아비스 왕조의 7대 국왕 세바스티앙(Sebastião)157817,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모로코 정벌에 나섰다. 84일 알카세르키비르(Alcácer Quibir)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왕은 군대를 진두지휘하며 공격에 나섰지만 참패했다.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24살이었던 세바스티앙은 결혼도 하지 않아 자식이 없었다.

세바스티앙의 큰아버지인 추기경 엔리케(Henrique)66세의 나이로 국왕에 올랐으나, 2년만에 사망했다.

왕위계승의 위기가 찾아왔다. 왕가에 남자가 있었는데, 5대 국왕 마누엘 1(Manuel I)의 손자 안토니오(António)였다. 안토니오는 혼외자였기 때문에 정통성이 떨어지고 귀족들은 그의 계승을 반기지 않았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Felipe II)는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그는 어머니 아사벨라(Isabella)가 마누엘 1세의 딸이란 명분으로, 자신이 포르투갈 왕의 계승권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포르투갈 귀족들을 구워삶아 자신의 파벌을 만들어 놓고 계승권을 밀어붙였다.

안토니오가 소수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포르투갈 국왕을 계승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스페인 펠레페 2세는 페르난도 알베레스에게 2만의 군대를 주어 포르투갈을 침공했다. 알바레스는 순식간에 리스본을 점령했다. 1581년 펠리페 2세는 펠리페 1세의 이름으로 포르투갈 국왕에 오르고, 알바레스를 포르투갈 총독으로 삼았다. 이로써 포르투갈의 제2왕조인 아비스 왕조는 8195년으로 막을 내리고 제3왕조 합스부르크 왕조(dynaty of Habsburg)가 시작되었다. 1)

 

포르투갈의 합스부르크 왕조(1581~1640)3대에 걸쳐 60년간 이어졌다. 스페인은 이 기간에 연합왕국을 꾸렸다. 형식적으로 포르투갈은 독립국이었다. 스페인 국왕은 포르투갈 왕을 겸임하며, 총독을 파견했다. 총독은 국왕의 대리인으로 사실상 포르투갈을 통치했다. 포르투갈의 귀족회의는 유지되었고, 해외영토도 보존되었다.

문제는 외교권을 상실한 것이다. 포르투갈은 스레인의 대외정책을 따라가야 했다. 스페인의 해외통치기구인 인도 위원회(Council of the Indies)에 포르투갈인이 스페인인과 동수로 참여했지만 주도권은 스페인 사람들이 쥐었다. 스페인의 적은 포르투글의 적이 되었다. 오랜 우방이었던 영국이 포르투갈에 등을 돌렸고, 독립전쟁 과정에 스페인과 싸우고 있던 네덜란드는 포르투갈 식민지를 공격했다.

이미 기울어가고 있던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은 스페인과 단일 국가를 형성한 이후 급격히 무너져 갔다. 이베리아 연합왕국(Iberian Union)에서 스페인은 자국 식민지 방어에 주력했고, 그 사이에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포르투갈 식민지를 잠식해 들어갔다. 2)

 

1638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고아(인도) 전투 /위키피디아
1638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고아(인도) 전투 /위키피디아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과의 전투에서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편에서 싸워야 했다. 영국이 스페인 해군을 제압한 이후 포르투갈 영토를 넘보았다. 페르시아만의 포르투갈 식민지 호르무즈(오만)가 현지 왕국의 공격을 받을 때 영국 해군은 이슬람 공격자를 도왔다. 영국은 또 대서양 상에 있는 포르투갈령 아조레스 군도도 점령했다.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만들어 브라질과 인도, 동아시아, 앙골라 등 포르투갈 식민지 전지역을 상대로 공격을 감행했다. 서인도회사는 브라질 북동부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다. 네덜란드령 브라질은 1630년에서 1654년까지 24년간 지속되었다.

아시아에서 네덜란드는 실론(스리랑카)에 기지를 세우고 인도 해안에 있는 고아 등 포르투갈 요새를 공격했다. 향료 무역의 거점인 인도네시아 암본은 포르투갈이 영향력을 상실한 사이에 네덜란드의 차지가 되었다. 서아프리카 앙골라에서도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의 루안다를 점령했다. 일본의 교역창구인 데지마(出島)도 네덜란드에게 넘어갔다. 3)

 

네덜란드령 브라질(1630~1654) /위키피디아
네덜란드령 브라질(1630~1654) /위키피디아

 

포르투갈의 향료 무역은 네덜란드에, 노예무역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무너졌다. 포르투갈 귀족과 부르죠아들 사이에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갔다.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전쟁을 지원하는데,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전쟁을 도와주지 않았다. 해외 요새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상업은 위축되어 갔다. 포르투갈이 스페인의 적과 싸울 이유가 없었다.

1621년 펠리페 2세가 죽고 펠리페 3세가 연합왕국의 국왕이 되자, 포르투갈의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펠리페 3세는 포르투갈에 전왕과 다른 정책을 폈다. 그는 그나마 남아 있던 자치권을 빼앗았다.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세금을 중과하고 스페인 의회(코르테스)에서 포르투갈 귀족들의 지위를 발탁했다. 포르투갈 정부의 요직은 스페인 귀족들이 차지했다. 필리페 3세는 포르투갈을 스페인 왕국의 한 지방주로 격하시키려고 책동했다.

 

1665년 동아시아에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요새 /위키피디아
1665년 동아시아에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요새 /위키피디아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내쫓고 포르투갈 독자적인 왕을 세우자는 음모가 1640년에 있었다. 음모자들은 40명을 규합하고 매국노로 찍은 국무장관 미겔 데 바스콘셀로스(Miguel de Vasconcelos)를 살해하고 포르투갈을 통치하던 스페인 왕가를 내쫓기로 했다.

그들은 때를 기다렸다.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펠리페의 군대가 30년 전쟁에 참여해 파병하는 힘의 공백기가 찾아왔다.

1640121일 오전 9, 40명의 가담자들은 포르투갈 궁전으로 몰려가 바스콘셀로스를 죽이고 포르투갈 총독을 맡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만투아 공작녀 마르가레트(Margaret)에게 리스본에 주둔한 스페인군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작전은 계획대로 성공했다.

그들은 궁궐 베란다에 나와 리스본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리스본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귀족들도 혁명에 동조했고, 젊은이들은 스페인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자원입대했다. 주동자들은 브라간사 공작(Duke of Braganza) 주앙을 새 국왕으로 추대했다.

주앙 공작은 주앙 4(João IV), 4왕조 브라간사 왕조(dynasty of Braganza)를 열게 된다. 이 왕조는 1910년 포르투갈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270년간 16대를 이어간다. 4)

 

주앙 4세가 포르투갈 국왕 즉위를 선포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주앙 4세가 포르투갈 국왕 즉위를 선포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포르투갈이 독립왕조를 개설하면서 떨어져 나가자,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왕위를 주장하며 수시로 침공했다. 새 왕조는 스페인의 적인 프랑스와 우호적 외교관계를 맺고, 영국과 오랜 동맹을 복원했다. 영국은 스페인의 공격에 항상 포르투갈의 편을 들었다. 신 왕조는 네덜란드와도 관계를 회복했다. 1661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공화국은 1661년 헤이그 조약(Treaty of The Hague)을 체결해 60여년에 걸친 전쟁관계를 종식시켰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그후 1668년까지 28년간 전쟁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기간의 전투에서 포르투갈은 스페인군에 승리했다. 포르투갈은 1668년 스페인은과 리스본조약(Treaty of Lisbon)을 체결해 독립왕국의 존재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포르투갈이 다시 독립했을 때, 전성기는 이미 지나 있었다. 네덜란드가 해상력을 강화했고, 영국도 그 뒤를 따랐다. 브라질에서 네덜란드는 물러났지만 인도네시아, 인도, 중동의 포르투갈의 거점은 상실되었다.

 


1) Wikipedia, Portuguese succession crisis of 1580

2) Wikipedia, Portuguese Empire

3) Wikipedia, Iberian Union

4) Wikipedia, Portuguese Restoratio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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