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순교자들 영혼 떠도는 서소문역사공원
천주교 순교자들 영혼 떠도는 서소문역사공원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0.11.15 15: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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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참수장이 있던 곳…정약종 등 순교자 기리는 현양탑 세워

 

서울역에서 염천교 사거리를 지나 서소문역사공원을 방문했다.

지금은 말끔하게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150년전으로 돌아가면 이곳은 처형지였다.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신유박해(1801)에서 병인박해(1866)까지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이곳엔 냇물이 흐른다. 지금은 복개되었지만, 도로 밑은 개천이다. 인왕산 서쪽에서 발원한 만초천(蔓草川)이 이 곳을 지나 삼각지 근처에서 남산서쪽에서 발원한 냇물과 합쳐져 한강과 만난다. 청계천이 도성을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면, 만초천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물길이다.

처형장에서 사라진 백성들의 피가 만초천을 따라 한강으로 흘렀을 것이다.

 

서소문공원은 조선 제일의 참수장이었다. 만초라는 넝쿨식물이 냇가를 따라 많이 자랐다. 이곳에서 태어난 우리나라 첫 영세자 이승훈이 고향 냇가의 이름을 따서 호를 지었으니 만천(蔓川)이었다.

왜 이곳에 참수장이 생겼을까? 정약용은 이곳을 곡물이 넘쳐나서 산같이 쌓이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 어깨가 부딪히는 곳이다라고 했다. 서소문을 나와 의주로 가는 길이었으며 삼남지방(전라, 충청, 경상도)으로 가기 위해 마포, 양화로 나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칠패시장이 있어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사형장을 두어 뭇 사람들의 경계로 삼은 것이다. 큰 모래사장은 죄인을 죽이고 그 피와 시체를 처리하기에 용이했던 것이다.

이 곳에 형장이 세워진 것은 조선초기 태종 16(1416)이었다. 형장의 정확한 위치는 서소문 밖의 비탈진 언덕길 아래, 즉 현재의 서소문역사공원 옆에 있던 이교(圯橋) 남쪽 백사장이었다. 이교는 나무 다리 위에 흙으로 덮어 흙다리였다.

 

서소문역사공원 현양탑 /박차영
서소문역사공원 현양탑 /박차영

 

공원에는 순교자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1999515일 건립했으며, 높이 15m의 주탑과 13m의 좌우 대칭탑 등 3개의 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 기단 위는 유리로 막아 물이 흐르도록 했는데, 이것은 박해와 죽음의 상징인 칼과 생명의 상징인 물을 대비시킨 것이다. 주탑 앞부분에는 순교의 참상을 형상화한 청동조각을 붙였다.

 

이곳에서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천주교신자들이었다. 우리나라 천주교 103인의 성인 가운데 이곳에서 참수된 사람 44명이 포함된다.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이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처형되었고, 정약종의 둘째아들이며 최초의 신학생이었던 정하성이 아버지 죽임을 당한 뒤 38년후 기해박해(1839) 때에 이곳에서 죽었다. 정약용의 매형인 이승훈도 이곳에서 모진 고문으로 세 번씩이나 배교를 거듭한후 순교했다. 정약종은 내리치는 칼날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죽었는데 첫 번째 베임으로 목이 떨어지지 않자 다시 일어나 하늘을 우러러 성호를 그은후 두 번째 맞은 칼에 목이 떨어져나갔다.

당시에 천주교 신자는 체포와 동시에 바로 참수하지 않았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형조, 종각 건너편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자리에 있던 의금부, 동아일보 앞의 감옥인 전옥서와 우포도청 등지에서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래도 배교를 하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이곳에 끌려왔다.

수레에 십자모양의 틀을 만들어 머리를 달아매고 양팔을 나무에 묶은 다음 발 아래에는 발판을 놓았다고 한다. 서소문을 통과할 때 쯤이면 발판을 치워 머리가 대롱대롱 매달리게 한다. 울퉁불퉁한 길을 전 속력으로 달리면 고통과 두려움이 극대화된다. 이곳에 이르러서는 사람을 죽이는 희광이들이 얼굴에 회를 칠하고 양귀를 쇠화살로 뚫어 잡아당겨 목을 평평하게 한 다음 참수형에 처했다고 한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지상부 /박물관 사이트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지상부 /박물관 사이트

 

공원 지하에는 지하4~지상1층의 전시기념관과 추모공간이 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으로 붙여진 이 공간에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를 읽을수 있다.

이 잔혹했던 현장에도 가을 빛은 내리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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