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사⑧…추락하는 제국
포르투갈사⑧…추락하는 제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16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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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독립에 타격, 아프리카에도 퇴각…1910년 혁명으로 왕정 종식

 

164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를 내쫓고 제4의 브라간자 왕조가 들어섰을 때, 포르투갈 본토의 인구는 150만명이었다. 스페인과 합병되었던 60년 동안에 암본(인도네시아)과 말라카(말레이시아)를 네덜란드에 빼앗겨 향료무역의 독점권을 잃었고, 인도의 거점들도 상당수 잃은 상태였다. 대서양의 노예무역도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잠식당했다.

 

그런데 브라질 식민지에서 대박이 터졌다. 1693년 아마존 밀림지대에서 인간 사냥에 나섰던 반데이란테스(Bandeirantes)라 불리던 폭력 무리들이 미나스 제라이스(Minas Gerais)에서 대형 금맥을 터트렸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기 150년전에 브라질에서 골드러시가 일어났다. 포르투갈인들은 너도나도 짐을 싸들고 식민지로 달려갔다. 1721년에는 마토 그로소, 1726년에 고이아스에서 풍부한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18세기 중반에 브라질은 세계 금 생산량의 85%를 차지했다.

금이 발견되면서 40만명의 포르투갈인들이 몰려 갔고, 50만명 정도의 흑인 노예들이 수입되었다. 네덜란드와 사탕수수 경쟁을 버리던 농장주들은 농장을 버리고 금광으로 이동했다. 금광으로 유명한 오로 프레투(Ouro Preto)는 인구 10만명의 대도시가 되어 당시 뉴욕의 인구의 2배 이상이 밀집하게 되었다. 국왕 주앙 6세는 본국 인구가 급감함에 따라 브라질 이민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릴 정도였다.

이제부터 브라질의 중심은 사탕수수가 주생산물이었던 북동부에서 광물을 수출하는 리우데 자네이루로 옮겨갔다. 리우데 자네이루는 브라질 식민지의 수도 산 살바도르(São Salvador)보다 더 큰 도시가 되었고, 18세기 중엽에는 브라질의 수도가 되었다.

포르투갈 왕국은 브라질 금으로 그동안의 적자를 메우고 유럽의 부국이 되었다. 본국은 브라질의 제련 금의 20%를 세금으로 떼었다. 게다가 브라질 대농장에서 생산되는 설탕이 저가로 유럽에 유입되었다. 당시 브라질 수출의 50%가 설탕, 46%가 금이 차지했다. 1)

 

1755년 리스본 대지진과 쓰나미(그림) /위키피디아
1755년 리스본 대지진과 쓰나미(그림) /위키피디아

 

황금이 철철 흘러넘치던 포르투갈은 1755년에 대재앙을 맞았다.

그해 111일은 모든 성인들을 기리는 만성절(萬聖節, Feast of All Saints)이었다. 리스본의 성당은 신도들로 가득 찼다. 오전 940분 첫 지진파 닥쳐왔고, 이어 3분 동안 두 차례 지진이 찾아왔다. 940분 큰 지진이 밀려왔고, 리스본 도심에 너비 5m의 균열이 생겼다.

무너지는 건물을 피해 도망치던 사람들은 부둣가로 몰려갔다. 그러나 지진이 덮친후 약 40분 뒤, 해일이 항구와 도심지로 쇄도했고, 강을 따라 역류했다. 말을 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 박차를 가했다. 해일이 두 번 더 왔다. 지진으로 교회 촛불이 넘어지면서 화재가 났다. 화재는 리스본 시가지를 5일 밤낮으로 불태웠다.

당시 지진강도는 진도 8.5~9.0으로 추정되었고, 진앙지는 상비센트 곶 서남쪽으로 약 200 킬로미터 지점 대서양 해역으로 비정되었다. 지진과 쓰나미, 화재로 리스본에서 최대 3~5만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포르투갈의 인구가 30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인구의 1~2% 정도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2)

 

포르투갈 경제는 점점 식민지 브라질에 의존하게 되었다. 리스본에 처음으로 금이 도착한 것은 1699년이었다. 첫해 들어온 양은 500에 불과했지만, 1720년에는 25,000에 달했다. 1730년부터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광이 발견되고, 18세기 말까지는 200만 캐럿 이상이 생산되었다.

광산은 주로 민간업자들이 개발했지만, 생산량의 20%를 포르투갈 왕실이 의무적으로 세금을 떼어갔기 때문에 광산업자들의 불만이 높아갔다. 그들은 본국 정부의 감시를 피해 생산량을 줄여 보고하거나 밀무역을 했다. 포르투갈은 세입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추정 생산량에 세금을 매기는 바람에 생산자들의 불만을 싹트게 했다. 그들은 브라질의 독립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807년 포르투갈은 프랑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을 거부하고 영국과 교역을 지속했다. 포르투갈은 영국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에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침공하자 국왕 주앙 6(João VI)는 왕비 카를로타 조아키나(Carlota Joaquina), 왕세자 페드루(Pedro)와 함께 영국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리우데 자네이루로 피신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 패하고, 포르투갈은 국토를 회복했지만 주앙 6세는 리스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유주의자들이 설치는 포르투갈보다 왕당파들로 둘러싸인 브라질이 좋았던 것이다. 그는 차제에 식민지라는 개념을 없애 버렸다. 주앙 6세는 본국과 브라질, 앙골라 등 전 식민지를 하나로 묶어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베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Portugal, Brazil and the Algarves)을 선언하고, 브라질을 식민지에서 본국과 동등한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1820년 포르투갈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 의회가 만들어지고 헌법이 제정되어 입헌군주국을 선포했다. 포르투갈 의회(Cortes)는 브라질에 있는 주앙 6세의 귀국을 종용했다. 주앙 6세는 마지 못해 귀국했다. 국왕은 왕세자 페드루에게 함께 돌아가자고 했으나 페드루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국왕은 하는수 없이 페드루를 브라질 섭정으로 세우고 1821426일 본국으로 귀국했다.

 

브라질 독립운동 그림 /위키피디아
브라질 독립운동 그림 /위키피디아

 

1821930일 포르투갈 의회는 브라질이 본국의 속령이고, 페드루를 리우데자네이루 지방관으로 격하하는 내용의 법령을 제정했다. 주앙 6세가 포고한 연합왕국의 취지를 무효화한 것이다. 곧이어 본국 의회는 브라질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의회 대표단은 왕세자에게 경의도 표시하지 않았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줬다. 이때부터 페두르 왕자는 마음을 바꾸기 시작한다. 왕세자비도 브라질의 편에 서라고 부추겼고, 자유주의자와 독립파들도 지원을 약속했다.

본국 의회는 페드루 왕자에게 귀국을 중용했다. 그와 반대로 브라질내 자유주의자들과 독립파들은 그의 잔류를 요구했다. 192219일 그는 브라질에 남겠다고 국민들에게 선언했다.

포르투갈의 명령을 받는 브라질 군부는 페드루의 선언을 의회주의의 거부로 받아들였다. 브라질군 총사령관 호르헤 아빌레스(Jorge de Avilez)는 즉각 2,000명의 군대를 동원해 리우데자네이루에 진입했다. 군대 주변에는 리우데자네이루 시민과 경찰 1만명이 에워싸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했다. 군중들은 페드루를 지지했다. 페드루는 아빌레스에게 군대 해산과 본국 귀국을 명령했다. 페두르의 명령과 군중들의 위협에 포르투갈군은 해산하고 아빌레스는 귀국했다.

1822922, 페드루 왕자는 아버지 주앙 6세에게 브라질의 독립을 알리는 편지를 보낸데 이어 1012일 브라질 입헌군주국의 페드루 1세임을 천명한다. 이로써 왕가의 분열을 통해 브라질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3)

 

20세기초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핑크맵 /위키피디아
20세기초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핑크맵 /위키피디아

 

브라질이 떨어져 나가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식민지로 서부 앙골라와 동부 모잠비크만 남게 된다. 19세기에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경쟁을 벌일 때 포르투갈도 아프리카 대륙 개척에 나섰다.

포르투갈 탐험대는 1869년에 모잠비크에서 잠베지 강을 거쳐 앙골라로 가는 대륙횡단에 성공했다. 포르투갈은 탐험대의 결과를 토대로 모잠비크에서 앙골라를 동서로 잇는 횡단로를 핑크맵(Pink Map)으로 그리고, 그 땅을 자국령이라고 주장했다. 핑크맵에는 오늘날의 앙골라, 잠비아, 짐바브웨, 말라위, 모잠비크가 포함되었다.

하지만 영국은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서 이집트까지 남북으로 잇는 종단정책을 추진했다. 오랜 우방이었던 포르투갈과 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렸다. 영국이 종단정책을 밀고 나가려면 포르투갈이 동서로 그은 선을 뚫고 나가야 했다.

1890111일 영국은 포르투갈에 최후통첩(Ultimatum)을 보내고 짐바브웨에 주둔한 포르투갈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그날 오후까지 회답하라고 강요했다. 영국과 전쟁을 원치 않았던 카를루스 1(Carlos I)는 영국에 백기투항했다. 이 사건은 1898년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맞붙은 파쇼다 사건(Fashoda Incident)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이다.

국왕의 무기력함에 국민들은 분노했다. 공화주의자들은 왕을 배신자로 간주하고 절대 군주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1891131일 공화파가 무장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된다.

190821, 카를루스 1세 국왕과 루이스 필리프 왕세자가 리스본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인해 주앙 프랑쿠 총리가 사임하고, 군주파와 공화파 사이에 극심한 권력 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암살사건에서 살아남은 왕자 마누엘(Manoel)18세의 나이에 마누엘 2세로 등극했다. 그러나 마누엘 2세는 포르투갈 사회의 병폐들을 치유하지 못했다. 그가 지배했던 2년 동안 6차례나 내각이 바꾸었지만 정치는 안정되지 못했다.

 

1910년 포르투갈 공화파 혁명을 상징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1910년 포르투갈 공화파 혁명을 상징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1910101일 포르투갈의 주요 도시에서는 공화주의 세력이 공화제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103, 육군 부대가 테주 강 하구에 정박하던 군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입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리스본 주변을 점거했다. 104, 군함 2척이 리스본 왕궁을 향해 포격을 가하게 된다.

1910105, 리스본에는 공화파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군중들이 리스본 시내로 몰려나와 쿠데타군을 지지했다. 공화파들은 왕정을 종식하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포르투갈의 마지막 왕 마누엘 2세는 이날 몰래 배를 타고 리스본을 빠져 나갔다. 4)

이로써 1139년 시작되어 4개 왕조가 교체하며 770년간 이어지던 포르투갈의 왕정이 종식된다.

 


1) Wikipedia, History of Portugal (16401777)

2) Wikipedia, 1755 Lisbon earthquake

3) Wikipedia, Independence of Brazil

4) Wikipedia, 5 October 1910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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