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동종을 쇠로 만들었다면…용융점 500도의 차이
낙산사 동종을 쇠로 만들었다면…용융점 500도의 차이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03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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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용융기술이 인류의 역사…1708년 영국서 코크스로 철 용해 기술 개발

 

올해 45일 강원도 속초·양양 지역에 대형 산불이 났듯이 14년전인 200545일에도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가 화마에 휩쓸려 전소되었다.

그 이듬해 필자는 낙산사의 불탄 자리를 찾은 적이 있다. 동해안 산자락을 휩쓸고 지나간 산불로 인해 수백년 동안 자란 소나무는 시커멓게 탄 채 나뒹굴고 있었고, 대웅전은 잔해만 남아 스님 한분이 수없이 절을 올리며 속죄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671년 의상(義湘) 대사가 창건한 낙산사는 13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로, 고려 초부터 6,25에 이르기까지 산불과 외적 침략에 의한 소실로 수차례 복구를 반복해 왔다. 2005년 화재 때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동종(銅鐘)이 형체도 없이 녹아 내렸다는 사실이다.

보물 제479호로 지정된 낙산사 동종이 산불에 의해 단숨에 녹아내린 것은 구리가 얼마나 불에 취약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화재로 소실된 낙산사 동종. 보물 479호였지만, 소실후 2005년 7월 보물 지정이 해제되었다. /문화재청
화재로 소실된 낙산사 동종. 보물 479호였지만, 소실후 2005년 7월 보물 지정이 해제되었다. /문화재청

 

동종의 원재료인 구리는 강도가 대단히 약해 그것만으로 종을 만들 수 없다. 따라서 구리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구리와 주석, 아연의 비율을 대략 721로 섞어 구리의 용융점인 1,083도의 온도로 가열해 합금으로 만든다. 그 합금의 용융점은 구리보다 높지만, 양양, 고성을 휩쓴 화마에는 견디지 못했다.

동종을 녹인 땔감은 종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목조건물, 즉 종각(鐘閣)이었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든 청동종은 결국 목재의 화력에 의해 녹아내린 것이다. 구리의 용융점이 목재가 탈때의 온도보다 낮다는 얘기다. 철로 종을 만들었으면, 녹지 않았을 것이다. 목재가 탈때의 온도로 철을 녹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의 용융점은 1,539도로 구리의 용융점보다 500도쯤 높다. 500도의 차이를 극복한 것이 근대문명의 시발점이 되었고, 현대문명의 초석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인류가 처음 구리를 발견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기와 도구에 구리가 사용되면서 인류문화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킨 청동기시대는 5,000년 전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구리는 처음에는 금처럼 하천의 바닥에서 원석 형태로 주워 사용했다. 그 구리는 너무 약해 장신구로 사용하는데 그쳤다. 그러다가 고대인들은 오랜 시행착오 끝에 강바닥에서 주은 검은 모래를 18의 비율로 구리에 섞으면, 날카로운 각을 세울수 있는 강한 금속으로 변형시킬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검은 모래가 주석이고, 그렇게 해서 인류가 개발한 합금이 청동이다.

청동의 발견은 인류를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이행하게 했고, 바야흐로 문명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인류가 철기에 앞서 청동기 시대를 연 것은 바로 용융점 500도의 차이 때문이었다. 바짝 마른 목재를 태우며 부채질을 하면 구리가 녹는 온도(용융점) 이상의 열을 얻을수 있다.

철은 청동보다 강하며 자연 상태에서 철광석이 동광석보다 많이 존재한다. 인류가 철을 발견한 것은 운석에서 나온 운철(隕鐵)이었다는 게 고고학자들의 분석이다. 철과 니켈이 주성분인 자연상태의 철인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철을 녹이는데, 천년 이상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목재의 화력으로 용융점 500도의 차이를 극복하는데 긴 세월이 걸린 것이다.

철기를 최초로 사용한 민족은 지금부터 4,000년 전 터키 고원에서 출현한 히타이트로, 이 민족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바빌론을 정복하고 이집트를 굴복시키는 등 고대 중동에서 최대의 제국을 형성했다. 동양에서는 주나라가 철제무기로 은나라를 멸망시켰고, 뒤어어 한나라가 철기 문화를 꽃피워 대제국을 건설했다.

고대의 철기 문화는 어디까지나 쇠를 무기와 간단한 도구를 만드는데 그쳤다. 인류는 쇠가 녹는 점까지의 화력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이 유용한 철을 얻는 방법은 순도가 높은 철광석을 가능한 높은 온도까지 가열해서 용융점에서 흘러 내리는 철(선철)이 아니라, 그 이하의 온도에서 반죽처럼 물렁물렁해지는 금속 혼합물이었다.

당시 철을 가열하는 원료는 목재였고, 도구로는 바람을 강하게 불어 넣는 풀무(풍구)가 고작이었다. 제철기술은 로마보다 중국에서 더 발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나라에서 용융점까지 온도를 올리면 철도 구리와 금처럼 녹는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그 기술의 일부가 개발됐다고 한다. 하지만 인류는 철광석을 대량으로 녹여 선철(무쇠)을 주형에 부어 기계와 도구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 상용화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 방법이 영국의 콜브룩데일(Coalbrookdale)에서 개발됐다. 1708년 그곳에서 제철 사업을 하던 에이브러햄 다비(Abraham Darby)는 친구의 맥주 공장에서 석탄의 불순물을 모두 녹여낸 점결탄(coking coal)을 가공해 코크스를 만들었고, 이를 원료로 철을 녹이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코크스 제철법이 철을 대량으로 생산할수 있게 함으로써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인류가 용융점 500도의 차이를 극복하는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에이브러햄 다비가 만든 최초의 코크스 용광로. 영국 콜브룩 철강막물관에 보전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에이브러햄 다비가 만든 최초의 코크스 용광로. 영국 콜브룩 철강막물관에 보전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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