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에게 나주란?…후백제 견제하는 배후지
왕건에게 나주란?…후백제 견제하는 배후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18 1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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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와 나주 해상세력 결합이 후삼국 통일의 원동력…태조, 나주인 중용

 

고려 태조 왕건은 죽기 전에 내린 훈요십조 8항에서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公州)의 금강(錦江) 바깥쪽에서 양민(良民)이라 하더라도 관직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에겐 마지막까지 저항한 후백제에 대한 원한으로 그런 유언을 남겼을 것이다. 차현은 차령산맥이고, 차령산맥 이남은 호남 땅이다.

하지만 왕건은 삼한 통일 과정에서 나주 지역의 도움을 받았고, 그 지역 사람들이 고려 왕조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후삼국 시기에 송도(松都)의 호족인 왕건과 나주를 연결해준 매개체는 나총례(羅聰禮)라는 인물이었다.

나총례는 나주 사람으로 삼한공신(三韓功臣)인 대광(大匡)에 이른 인물이다. (고려사 권104 羅裕) 삼한공신은 후삼국을 통일해 고려를 건국하는데 기여한 공신을 말하는데, 나총례가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러면 나주는 언제 고려의 땅이 되었을까. 고려사(1 태조총서)“903년에 태조(太祖)가 수군(舟師)을 거느리고 서해(西海)부터 광주(光州) 경계까지 금성군(錦城郡)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10여 군현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이로 인하여 금성을 고쳐서 나주(羅州)라 하고 군사를 나누어서 지키게 한 뒤 돌아왔다.”고 했다.

이때에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서 수군총사령관으로 호남 공격에 나선 것이다. 나주는 신라시대에 금성(錦城)이었는데, 이때 나주로 바뀌었다.

그런데 왕건이 나주를 공격할 때 현지의 도움을 받았다. 고려사(57 지리지 나주목) 신라 말에 견훤이 후백제왕을 칭하며 그 땅을 모두 차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을의 사람들이 후고려왕 궁예(弓裔)에게 귀부(歸附)하였다. 궁예는 태조(太祖)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임명하여 수군을 이끌고 공격하여 차지하도록 한 뒤, 나주(羅州)로 고쳤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나주고을 사람들이 먼저 견훤에게 반발해 궁예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왕건이 수군을 동원해 나주를 차지했음을 알수 있다.

 

왕건은 금성군을 점령하고 나주라고 했을 때 그 지역의 수장 나총례의 성()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그러면 왜 나주 사람들이 견훤에게 등을 돌렸을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901(효공왕 5) 후백제왕 견훤(甄萱)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금성(錦城, 나주) 남쪽으로 군사를 이동하여 인근의 부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주 사람들이 후백제에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이에 견훤이 신라의 대야성(합천)을 공격하다가 돌아가는 길에 금성군을 노략질한 것이다. 금성군의 수장 나총례는 왕건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왕건이 궁예에게 보고한뒤 나주를 공격한 것이다.

 

그러면 왕건과 나총례는 어떻게 아는 사이였을까.

왕건은 송도(개성)를 중심으로 하는 해상세력이었고, 나총례는 호남지방의 해상세력이었다. 서로 무역을 하다가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중간에 왕건의 측근 박술희(朴述熙)와 복지겸(卜智謙)이 있다. 박술희는 태조가 훈요십조를 전달한 측근이었고, 복지겸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한 인물이다. 둘은 모두 당진 출신의 해상 세력이었다. 송도-당진-나주로 이어지는 신라말 해상세력이 강한 결집력을 가지고 분열된 후삼국시대를 통일한 것이다.

왕건이 나주를 확보함으로써 후백제의 등 뒤를 괴롭혔다. 후백제의 입장에서는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워야 하는 형국이었다. 나주가 왕건의 편에 선 것이 고려의 삼한 통일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정도전의 말을 빌어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일할 때 오직 후백제가 그 험하고 멀음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는데 나주 사람들은 순역(順逆)을 밝게 알아 솔선해서 붙어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병합하는데 나주인의 힘이 많았다고 했다.

 

장화왕후를 소재로 한 나주시의 캐릭터 /나주시청
장화왕후를 소재로 한 나주시의 캐릭터 /나주시청

 

태조 왕건은 나주지역의 도움을 받아 통일을 한만큼,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해 특별히 배려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왕건의 두 번째 부인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각 지역 호족의 딸과 혼인하는 정책을 취해 29명의 후비를 갖고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얻었다. 그중 두 번째 부인이 나주 출신 오씨이고, 왕건과 오씨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 무()가 태자가 되었으니, 2대왕 혜종이다.

오씨는 미천한 계층 출신으로 보인다. 고려사(88 후비) 오씨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 사람이다. 조부는 오부돈(吳富伅), 아버지는 오다련군(吳多憐君)으로, 대대로 나주의 목포(木浦)에 살아왔다. 오다련군은 사간(沙干) 연위(連位)의 딸 덕교(德交)에게 장가들어 왕후를 낳았다. 왕후가 일찍이 나루터의 용()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놀라면서 깨어 부모(父母)에게 말하니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오래지 않아 태조(太祖)가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에 출진(出鎭)하여 목포에 정박하였다.

태조가 강가를 바라보았더니 오색(五色)의 구름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 곳에 이르니 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불러 사랑하였다. 왕후의 집안이 측미(側微)하므로 임신시키지 않고자 하여 잠자리에 깐 돗자리에 정액(精液)을 뿌렸으나, 왕후가 바로 이를 넣어 결국 임신하고 아들을 낳으니 이가 바로 혜종(惠宗)이다.“

 

나주시는 장화왕후 오씨를 시의 캐릭터로 삼고 있다. 나주시 흥룡동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왕건이 이곳 마을에 잇는 샘(완사천)에서 장화왕후를 만나 인연을 맺어 혜종을 낳았고, 완사천의 북쪽에 흥룡사를 창건하고 이와 함께 혜종사도 세워졌다고 한다.

 

나주시 완사천에서 고려태조 왕건과 장화왕후가 만나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 /나주시청
나주시 완사천에서 고려태조 왕건과 장화왕후가 만나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 /나주시청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18년만에 후삼국을 통일했다.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문신으로 활약한 사람 가운데 영암 출신 최지몽(崔知夢)이 큰 역할을 했다.

최지몽에 대해 고려사는 열전(92 제신)에 별도로 서술했다.

최지몽은 초명이 총진(聰進)이고, 남해 영암군 사람으로, 원보(元甫) 최상흔(崔相昕)의 아들이다. 성품이 청렴하고 인자하였으며,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대광(大匡) 현일(玄一)에게 배워 경서와 사서를 두루 섭렵하였고, 특히 천문·복서(卜筮)에 정통하였다. 18세 때에 태조가 그의 이름을 듣고 불러서 꿈을 점치게 하였다. 최지몽은 길조임을 알고 말하기를, “반드시 삼한(三韓)을 전부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지금 이름으로 바꿔주었고, 비단옷을 하사하며 공봉(供奉)의 직에 임명하였다. 정벌하러 다닐 때 항상 따라다녔는데 곁을 떠나지 않았고, 삼한을 통합한 후에는 궁 안에서 모시면서 고문(顧問)을 미리 준비하였다.

그는 태조의 꿈을 해몽해준 덕분에 지몽(知夢)이란 이름을 하사받아 왕실고문으로 일했고, 혜종, 광종에 이어 6대 성종에 이르기까지 고려왕실에 충성을 다했다.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송도와 나주의 해상 세력이 결합하면서 고려는 본격적으로 해양국가로 나서게 된다.

 


<참고자료>

왕건과 전남세력의 동향김갑동, 도서문화, 2018

나주시청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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