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고대왕국 맥국②…거칠부에 의해 신라에 병합
사라진 고대왕국 맥국②…거칠부에 의해 신라에 병합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03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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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벡제와 공조로 고구려와 전쟁…삼한 통일 후에 삭주 설치

 

맥국(貊國)의 영역은 통상 강원도 영서지방으로 보면 무방할 것 같다. 그러면 이 맥국의 영토가 언제 신라의 땅이 되었을까.

삼국사기 진흥왕조에 기사를 들여다 보자. 진흥왕 12(서기 551) 때의 일이다.

임금이 거칠부 등에게 명해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는데, 승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 (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조엔 추가적인 내용이 나온다.

진흥왕 12(서기 551)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을 시켜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고현(高峴)은 지금 북한 땅으로, 함경남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이루는 철령(鐵嶺)이다. 죽령에서 고현까지는 6백리에 달한다.

551, 진흥왕 재위 12.

거칠부가 이끄는 신라군은 소백산맥의 죽령에서 북상해 철령(鐵嶺)까지 진군했다.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진흥왕의 북진(北進) 명령을 받은 장군은 여덟명. 거칠부를 대장군으로 하고,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거칠부를 포함해 여덟 신라장군은 남한강에서 출발해 북한강을 넘어 북으로, 북으로 공격해갔다. 그들은 소백산맥 죽령에서 지금은 북한 땅인 철령(高峴)까지 10개 군은 빼앗았다.

이 해 신라와 고구려의 전투는 신라의 정복 전쟁 사상 단일 전투로는 최대의 영토를 차지한 싸움이었다. 이때 신라가 확보한 새 영토의 면적은 진흥왕이 즉위할 당시의 영토에 버금간다. 이 영토는 통일신라 시대 삭주, 고려시대 삭방도로 알려진 강원도 영서지방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이 엄청난 사건을 한 줄로 표현했다.

 

이 전투는 백제와 공조로 이뤄졌다. 삼국사기 거칠부조에 백제가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가 승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표현이 있다. 같은해 기록인 일본서기 흠명(欽明) 12년에 백제 성명왕(성왕)이 친히 자국과 2(신라와 가야)의 병을 거느리고 한성(漢城)을 되찾았다. 또 진군해 평양을 쳐 모두 6개 군()의 땅을 회복했다고 했다.

이때 고구려는 양면 협공을 당했다. 고구려 양원왕 7년이었다. 돌궐(突厥)이 요동의 거점인 신성을 포위, 공격하자, 고구려는 반격을 가했다. 돌궐이 고구려의 저항으로 실패하자, 다시 백암성을 공격했다. 고구려 고흘(高紇) 장군이 병사 1만으로 돌궐과 치열한 싸움을 펼치는 사이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일본서기엔 가야도 참여했다고 함)이 남쪽에서 침공한 것이다.

고구려는 북쪽에서 침략해온 돌궐군과 싸워 1천명의 머리를 베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남쪽 경계를 비우는 사이에 백제에게 6개군, 신라에게 10개군을 빼앗겼다. 고구려는 당시엔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수행할 역량이 없었던 것 같다. 돌궐이 대규모 공세를 펼치자 전력을 북쪽에 쏟아부었고, 남쪽에 공백이 생긴 틈을 타서 백제와 신라가 공격한 것이다.

 

이때 거칠부가 뺏은 땅이 고대사에 맥국(貊國)으로 알려진 곳이다. 신라는 후에 이 땅에 삭주(朔州)를 설치한다. 삭주는 12개 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경북 영주에 있던 급산군과 나령군을 제외한 10개군이 이때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

 

삭주의 위치 /그래픽=김현민
삭주의 위치 /그래픽=김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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