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의 역사①…자본주의 최초 ‘튤립 파동’
투기의 역사①…자본주의 최초 ‘튤립 파동’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19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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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집과 땅을 팔아 튤립 뿌리를 샀다, 결과는 폭락이었다”

 

투기는 인류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인간의 심정이 반영되어 있는 게 투기다. 근대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최초의 투기로 1630년대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튤립 파동(Tulip mania)이 거론되고 있다.

 

17세기초 오스만 투르크가 아시아 대륙에서 자생하는 튤립을 유럽에 소개하자, 네덜란드인들은 도도한 자태에 아름다움을 갖춘 튤립의 매력에 푹 빠졌다. 돈 많은 식물 애호가들은 비싼 가격으로 튤립을 사들였다. 튤립은 재배에는 한계가 있었다. 씨앗으로 재배하는 방법은 꽃을 피우는데 3~7년의 시간이 소요되지만 뿌리로 이식시키면 그해에 꽃을 피울수 있다. 따라서 뿌리(구근)이 비싼 가격으로 팔렸다.

투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634년쯤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튤립 뿌리 거래에 참여했다. 튤립 뿌리는 양산하기 어렵기 때문에 개수가 한정되었고, 수요가 몰리자 가격이 급등했다. 튤립 뿌리를 사면 떼돈을 번다는 소문이 돌면서 영주는 물론 장인, 농민들도 투기에 참여했다. 가장 인기가 높았던 품종은 보라색과 흰색 줄무늬를 가진 센페이 아우구스투스’( Semper Augustus)였다. ‘영원한 황제라는 뜻이다. 황제 튤립은 입한채 값고 맞먹었다.

거래는 정식 증권거래소에서 이뤄지지 않고 술집에서 이뤄졌다. 구근이 모자라자 선물거래라는 당시로는 신개념의 금융거래가 도입되었다. 거래 용지 한 장이면 즉석에서 거래되었다.

그러다가 163723일 갑작스럽게 튤립 거래가 폭락했다. 어음은 부도나고 3,000여명의 채무자들이 지급불능 상태가 되었다. 거품이 꺼진 것이다.

 

Semper Augustus /위키피디아
Semper Augustus /위키피디아

 

네덜란드의 튤립 파동의 배경을 알아보자.

당시 네덜란드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금융의 발전은 눈부셨다.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난 네덜란드는 1609년에 암스테르담 은행을 세우고, 1610년에 증권거래소를 설립했다. 그후 증권거래소는 주요도시마다 설립되어 상품과 주식, 외환, 해상보험까지 거래했다.

네덜란드에 튤립이 전해진 것은 1554년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오기에르 부스베크(Ogier de Busbecq)라는 사람이 오스만투르크에 대사로 파견되었다가 튤립 뿌리를 빈에 가져왔는데, 그 뿌리를 네덜란드 식물학자에게 선물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튤립은 초기엔 부호나 꽃 애호가들 사이에 퍼져나가다가 한 식물학자가 변종을 만들어 모양과 색깔이 다양해지면서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튤립의 변종은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었다. 바이러스에 의해 변종된 꽃의 인자는 뿌리에 숨겨져 있었고, 따라서 뿌리가 중요시되었다.

돈이 있는 자들은 앞을 다투어 희귀종 튤립의 뿌리를 찾았다. 희귀종을 잘 키우면 돈이 되고 아름다운 변종을 만들어 낼수 있어 더 큰 돈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네덜란드 전역에서 튤립 구근 확보 경쟁에 나섰다. 국토가 좁은 나라였기 때문에 좁은 집 텃밭에서도 꽃을 재배할수 있는 장점이 었었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고가주였기 때문에 서민들은 그 회사 주식을 살수 없었고, 대신에 튤립 뿌리에 덤벼들었다.

튤립은 바이러스로 인해 변종이 발생하기 때문에 400여종의 품종이 개발되고 튤립마다 계급이 매겨졌다. 황제(Augustus), 총독(Viceroy), 제독((Admiral), 장군(Generalissimo)이라는 등급에 따라 가격의 차이가 생겼다.

1620년대에 튤립 재배자들은 모두 돈을 벌었다. 튤립 불패의 신화가 만들어졌다. 비싸고 희귀한 구근은 20분의1 그램 단위로 거래되었고, 보통 구근은 두렁 단위로 거래되었다. 개별적으로 거래하거나, 경매에 부쳐지기도 했다.

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입도선매 형식의 선물시장도 생겨났다. 한겨울에도 여름에 나올 구근에 대한 거래가 이뤄지면서 시장은 연중 열리게 되었다. 1636년엔 튤립 구근 가격이 한번도 꺽이지 않고 오름세를 지속했다.

 

네덜란드 튤립 파동을 풍자한 그림, 꽃의 신 플로라가 환전상, 술꾼과 함께 차를 타고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 뒤를 일확천금을 노리는 직조공들이 따르고 있다. /위키피디아
네덜란드 튤립 파동을 풍자한 그림, 꽃의 신 플로라가 환전상, 술꾼과 함께 차를 타고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 뒤를 일확천금을 노리는 직조공들이 따르고 있다. /위키피디아

 

해가 바뀌어 16371월 튤립 구근 가격은 절정에 도달했다. 하루에 가격이 두세배 오르기도 했다. 한달 동안에 하늘 높은줄 모르게 가격이 치솟자 사람들이 집과 땅을 팔아 튤립 뿌리를 샀다. 한겨울에 그들이 거래한 것은 봄에 꽃을 피울, 땅 속에 있는 뿌리였다. 대부분 어음 결제로 이뤄졌다. 실제 돈과 뿌리가 거래되지 않은 바람 거래’(windhandel)였다.

4잎 가우더 튤립은 한 뿌리가 20길더에서 225길더로 10배 이상 올랐다. 10잎 짜리 장군 튤립은 95길더에서 900 길더로 치솟았다. 노란색 평범한 튤립 뿌리는 일주일 사이에 1파운드당 20길더에서 1,200길더로 올랐다. 당시 네덜란드 가정의 생활비가 연간 300길더였으니, 튤립 뿌리 가격이 얼마나 올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튤립 한뿌리가 일반인 가정에서 몇 년간 쓸수 있는 가격에 거래된 것이다.

그러던 가격이 23일 붕괴했다. 꽃이 피는 계절이 다가오고, 현물이 건네지기도 전이었다. 튤립 시장에서 더 이상 사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공황심리가 팽배했다. 이틑날부터 튤립 구근 가격은 폭락세를 연출했다. 불과 4개월 사이에 가격이 95~99% 빠졌다. 상투에서 산 사람은 1~5%만 가져갔다는 얘기다.

어음이 휴지조각이 되었고, 선물계약을 맺은 사람들은 도망을 쳤다. 튤립가격 하락은 이듬해인 1638년에도 이어졌다.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채무이행을 요구하며 소송을 걸었지만, 채무자에겐 이행 능력이 없었다. 채권자들은 정부에 지원을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재편성한 튤립 지수 /위키피디아
재편성한 튤립 지수 /위키피디아

 

마침내 네덜란드 정부가 나섰다. 정부는 이전의 계약은 모두 무효로 하고, 모든 선물거래액의 3.5%만 지급하는 조건으로 채권채무를 정리하라는 내용의 극단적인 조치를 내렸다. 1,000길더를 받기로 하고 튤립을 팔았던 사람은 35길더만 받게 되었다. 이 조치로 꽁꽁 얼어붙었던 튤립시장은 다시 살아났다. 튤립 가격은 거품 발생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지만, 투기 시절의 상태로는 올라가지 못했다.

튤립 버블과 붕괴는 네덜란드 거시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어음과 선물거래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문화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네덜란드에는 당시 신교 칼빈주의가 펴졌는데, 튤립파동 대 사람들은 금욕적인 태도를 잃어버렸다. 거품이 꺼진 후에 그들은 다시 독실한 칼빈주의로 회귀했다.

 

튤립 버블은 이후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검은 튤립의 소재가 되었다. 20세기 들어 거품경제가 빈발하면서 튤립버블은 경제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연구자들의 분석하는 튤립파동의 원인은 크게 두가지다. 첫째, 튤립 구근의 양이 제한되어 있다. 물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수요가 몰리면 급등했다가 붕괴했다. 둘째, 맹신이다. 튤립이 갖는 재화적 가치보다는 뿌리를 사면 돈이 된다는 맹목성이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튤립파동은 다음세기에 일어나는 영국의 남해 거품 사건과 프랑스의 미시시피 계획 거품과 함께 근대 유럽의 3대 버블로 꼽힌다. 이후 튤립 파동이란 용어는 거대한 자산 가격이 내재적 가치를 크게 벗어나 거품을 형성하는 것을 은유하는데 자주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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