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의 역사②…영국 남해회사 거품 붕괴
투기의 역사②…영국 남해회사 거품 붕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20 15: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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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의 주식 전환 조건으로 공모…버블 개념 생긴 계기

 

1720, 영국의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의 주가는 1월에 주당 100 파운드에서 5월에 700 파운드로 뛰어 올랐고, 624일에 1,050 파운드로 치솟았다. 하지만 주가의 고공행진은 오래가지 않았다. 주가를 끌어올린 재료들이 루머로 판명되면서 9월에 주가는 150파운드로 주저 앉았다.

영국 의회는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에 나서 버블법(Bubble Act)을 만들었다. 경제학에서 버블(거품)이란 용어가 이때부터 생기게 된다.

 

남해회사는 1711년에 영국 국왕의 면허(royal charter)를 얻어 설립된 무역회사로, 남아메리카와 카리브 해역에 노예무역을 독점하고 영국 정부의 국채를 매입하는 회사로 출발했다.

영업권 지역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스페인이 적성국인 영국 회사에 영업을 허락할리 없었다. 이익금의 25%를 스페인에 귀속시킨다는 조건으로 1년에 한번 남해회사의 무역선이 페루와 칠레, 멕시코를 오가며 교역을 할수 있다는 계약이 맺어졌다. 1714년에 2,680명의 노예를 거래했고, 1716~1717년 사이에 13,000명의 노예를 거래했지만 이익이 남지 못했다. 그나마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 영국이 참전하면서 사업은 곤두박질쳤다.

 

남해회사 거품 사건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남해회사 거품 사건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궁지에 몰린 남해회사는 1719년에 엄청난 음모를 꾸미게 된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과 북방전쟁의 2개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전쟁적자를 겪고 있었다. 당시 영국 정부의 재정적자는 5,000만 파운드였다.

남해회사는 국채 3,000만 파운드를 매입하겠다고 정부에 제의했다. 영국 정부는 쾌재를 부르며 남해회사의 제의를 받아 들이게 되었다. 남해회사는 국채를 주식으로 전환해 3,150만 파운드의 유상증자를 통해 일반에 매각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1720121일 남해회사는 이사회에 이 안건을 통과시키고, 다음날 의회에 이 방안을 제출했다.

남해회사는 투자자들에게 국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미끼를 던졌다. 그 미끼는 주가 상승이다. 여기에 작전이 개입되었다. 100파운드 국채를 등가의 주식으로 전환할 경우 남해회사의 이익은 5%(150만 파운드)에 불과했다. 그런데 주가가 200 파운드일 때 채권을 전환하면 남해회사는 두배 이상의 이익을 남기게 된다.

이 방안이 실현되려면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남해회사 경영진은 의원을 대상으로 로비를 했다. 물론 뇌물도 건네졌다. 그 뇌물은 주식이었다. 조달된 자본금으로 750만 파운드를 정부에 지급했다.

존 에이슬레이비(John Aislabie) 재무장관이 남해회사의 계획을 의회에 보고하자 주가가 상승했다. 128 파운드였던 주가는 2월 중순에 187 파운드로 올랐다. 한달 뒤 남해회사의 주가는 300 파운드를 넘어섰고, 하원에서는 남해회사의 주식전환 방안이 논의되었다.

아키볼드 허치슨과 같은 의원은 국채와 주식전환비율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에이슬레이비 재무장관은 주식의 객관적 가치를 정할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재무장관을 비롯해 상당수 고위관료들이 남해회사의 주식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주식에 눈이 먼 그들은 의회에 법안통과를 종용했고, 법안은 47일 의회를 통과했다.

 

414일 첫 번째 청약에서 남해회사의 주식은 주당 300 파운드에 200만주가 팔려나갔다. 공모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청약은 한 시간만에 마감되었다.

음모가들은 본격적인 작전을 감행했다. 그들은 프랑스의 미시시피 거품사건을 모방했다.

남해회사 주가 /위키피디아
남해회사 주가 /위키피디아

 

우선 청약시 증거금 비율을 20%로 낮췄다. 투자자가 매입대금의 20%만 내면 주식을 받을수 있고, 나머지 80%16개월에 걸쳐 나눠 내도록 했다.

또 남해회사가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담보로 돈을 대출해줬다. 투자자들은 주식을 담보로 더 많은 주식을 사게 되었다.

게다가 채권 보유자에게 주식 전환을 차일피일 미루어 주식시장의 수급 불균형을 유도했다. 거래물량을 줄여 주가를 올리는 방식이다. 청약 때마다 채권보유자들이 청약을 하기 위해 구름같이 몰려 왔다. 6월초 주가는 890 파운드로 뛰었다. 상투권을 의식해 매물이 나오면 회사측이 몰래 주식을 사들여 주가를 지탱했다.

작전세력들은 루머도 퍼트렸다. 회사가 남아메리카 주요 항구에 대한 통상권을 획득했다느니, 남미 최대은광인 포토시 광산의 운영권을 따냈다느니 하는 소문이 난무했다. 그해 6월말에 주가는 드디어 1,000 파운드를 넘어섰다.

 

누군가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말했다. “창세기 이후 인류 역사에 이처럼 다수가 집단 환상에 빠진 경우가 또 있었던가.”

허친슨 의원은 이 투자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든 모험이었다. 주가가 비쌀 때 산 무지한 투자자들은 희생자가 되었다.

 

남해회사 거품 사건을 다룬 카드 /위키피디아
남해회사 거품 사건을 다룬 카드 /위키피디아

 

주가 급등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루머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고, 프랑스에서 벌어진 미시시피 회사 거품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투자자들이 제정신을 차리게 된 것이다. 주가폭락 속도는 상승속도에 비례했다. 9월에 주가는 연초 주가인 150 파운드 대로 떨어졌다.

남해회사 주식에 투자한 사람들은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주식담보대출을 내줬던 은행, 금가공업자들이 파산 위기에 몰렸고, 많은 귀족들도 손해를 보았다. 특히 뇌물을 먹은 관료들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재무장관 에이슬레이비를 비롯해 고위관료들은 탄핵을 받았고, 어떤 고위층은 실망해 숨지기도 했다.

사태 수습은 재정 전문가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이 맡았다. 그는 1721년까지 남해 사건 처리의 방침을 확정했고, 경제가 회복 궤도에 올랐다.

 

이 사건으로 재산을 날린 사람 가운데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대니얼 디포(Daniel Defoe)도 끼어 있었다. 디포는 격일간지를 창간해 무역과 상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주식시장에 관한 기사와 사설을 실었는데, 본인의 투자에서 실패해 얼마 되지 않은 재산을 모두 잃고 10년 뒤 가난과 무관심 속에 죽었다.

과학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도 남해회사에 투자해 한때 7,000 파운드의 평가이익을 남기기도 했지만 끝내 2만 파운드를 날렸다. 요즘 돈으로 20억원에 해당한다. 뉴턴은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알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익을 낸 사람도 있다.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e Frideric Handel)은 남해 주식 매매로 얻은 이익으로 왕립 음악아카데미를 설립해 자신의 음악 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윈스턴 처칠의 9대조 할머니 사라 처칠은 남해회사 버블에서 무려 10만 파운드를 벌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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