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의 역사③…프랑스 미시시피 거품
투기의 역사③…프랑스 미시시피 거품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21 14: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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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로 귀결된 존 로의 경제실험, 거품 붕괴로 사라진 프랑스의 꿈

 

프랑스의 미시시피 거품 사건은 영국의 남해회사 사건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다. 프랑스의 거품 붕괴는 영국보다 간발의 차이로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남해회사 음모가들이 미시시피의 수법을 모방하게 되었다. 두 사건의 투기수법은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국가가 개입되었고, 신대륙의 이권을 투기로 활용했다. 몰락 시기도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미시시피 사건에 국가에 의한 통화남발이 유발되어 그 피해가 전국민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이다.

 

72년간 절대군조로 군림한 루이 14세가 죽고, 증손자 루이 15세가 1715년에 즉위했을 때 프랑스는 빚더미에 올라 있었다. 국가채무는 30억 리브르로, 연간 재정능력 14,500만 리브르에 비해 20배에 이르렀다. 지출을 아무리 줄여도 국가채무를 줄일 방법이 없었다.

루이 15세는 13세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가 섭정을 맡았다. 필리프에게 가장 큰 숙제는 국가부채를 해소하는 일이었다. 이때 그에게 스코틀랜드 경제학자 존 로(John Law)가 나타났다.

존 로는 금과 은을 통화로 사용하지 않고, 지폐를 발행하면 국가부채를 해소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지폐는 금으로 교환하지 않는 불태환(不兌換)의 조건이었다. 국가부채를 털어내 준다는 말에 필리프는 귀가 번쩍 뜨였다. 필리프 공작은 로가 하자는대로 했다.

 

1712년 북미대륙의 프랑스령 /위키피디아
1712년 북미대륙의 프랑스령 /위키피디아

 

1716년 프랑스는 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방크 제네랄 프리베(Banque Générale Privée)를 설립하고, 이 은행이 발행한 지폐로 세금을 내도록 했다. 프랑스 최초로 설립된 이 은행은 사설은행이었지만, 자본금의 4분의3이 국채로 구성되었다. 은행이 지폐를 발행하고, 그 지폐를 통용시켜 국가부채를 소화하는 방식이었다. 지폐는 초기에 대성공을 거두었고, 경제가 놀라울 정도로 잘 돌아갔다.

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미국 중부의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경영하는 회사를 차려 주식공모자금으로 국채를 소화하고 식민지를 개발해 이익을 낸다는 계획이었다. 미국 본토의 3분의1을 차지하는 루이지애나는 당시 프랑스령이었다. 이 계획도 필리프의 마음을 움직였다. 식민지도 개발하고 국가채무도 해소하는 일석이조의 계획은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회사가 미시시피 회사(Mississippi Company)였다.

미시시피 회사는 루이지애나에 대한 독점 개발권과 교역권을 가졌다. 로는 미시시피 회사의 경영권을 쥐고, 중국 회사(Compagnie de Chine), 화폐 주조업, 조세징수대리업까지 설립해 미시시피 회사의 지배 아래에 두었다.

그의 실험은 계속되었다. 당시 루이지애나에는 유럽인이 800명에 불과했다. 그는 죄수도 풀고 독일계 이민자들을 풀어 인구를 두배로 늘렸다. 여성 이민자도 데려가 가족을 이루게 했다. 하지만 수익은 그다지 많이 나지 않았다.

로는 프랑스의 채무 전부를 미시시피가 인수하도록 하고, 대대적은 주식 공모에 나섰다. 로는 돈은 내재적 개치보다 교환수단으로 인식했다. 그의 혁명적 실험은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공모에서 구체화되었다.

 

존 로 /위키피디아
존 로 /위키피디아

 

1719년 미시시피 회사는 주식을 공모했다. 존 로는 은행권을 대량을 발행해 미시시피 주식을 사려는 사람들에게 대출을 해 주었다. 투자자들은 주식을 담보로 제공하고 지폐로 대출을 받아 또다른 주식을 샀다. 주식가격은 치솟았고, 더 많은 지폐가 발행되었다. 500 리브르였던 미시시피 주가는 1719년에 2만 리브르로 치솟았다.

존 로의 사업은 프랑스 역사상 초유의 투기 바람을 일으켰다. 졸부들이 탄생했고, 백만 리브르의 주식을 가진 사람을 일컬어 백만장자(millionaire)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3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미시시피에 투자하기 위해 파리로 몰려왔다. 영국의 하원의원, 기업인, 귀족들도 프랑스에서 대박을 얻기 위해 청약자 명단에 이름을 넣었다. 파리의 카페와 레스토랑에선 주식거래의 판이 만들어졌다. 브로커들 앞에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하룻밤에 거부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굴뚝 청소부에서 웨이터에 이르기까지 수천만 리브르를 벌었다. 어느 종은 주인의 심부름으로 8,000리브르의 주식을 샀는데, 돌아오는 길에 1만 리브르를 주겠다는 사람에게 팔아 그 차액으로 주식 매매에 나서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얘기도 돌았다.

하지만 미시시피 주식의 거품은 또다른 불행을 낳았다. 존 로의 은행이 지폐를 찍어내며 주식 거래의 대출을 해주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불환지폐는 금으로 교환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량으로 남발되는 지폐의 가치는 절하되었다. 빵과 우유 등 식량가격은 6, 의류는 3배나 올랐다.

 

미시시피 회사 주가 추이 /theBubbleBubble.com
미시시피 회사 주가 추이 /theBubbleBubble.com

 

존 로는 섭정 필리프의 신임을 받아 마지막에 재무장관에 임명되고, 공작의 지위도 얻었다. 그의 거대한 경제실험은 국가채무 해소와 미시시피 주식공모에는 성공했지만 물가 앙등이라는 새로운 적을 맞게 되었다.

파국은 거품의 정점 시기에 어느 우연한 일로 시작되었다. 17201월 콩티 왕자가 미시시피 주식을 팔고 금과 은으로 바꿨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이 돌자 파라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식을 금으로 전환하려는 역풍이 불었고, 은행의 금고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17205월 존 로는 지폐의 가치를 50% 평가절하했고, 그것으로 모자라 일주일 후에 방크 제너랄의 예금지급을 거절했다. 곧이어 존 로는 해임되고 그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해 6월 프랑스 정부는 미시시피 회사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그 책임을 존 로에게 전가했다. 그는 외국인데다 아무도 방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존 로의 경제실험은 실패했지만, 그의 화폐이론은 오늘날에 적용되고 있다.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그에 대해 역사상 최고의 화폐전문가라고 평가했고, 칼 마르크스는 예언자이자 사기꾼의 기질이 절반씩 혼합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존 로는 스코틀랜드에서 금 세공업과 금융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금융을 공부했고, 젊은 시절에 한 여인을 놓고 결투를 벌이다 살인죄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감옥을 탈출해 암스테르담에서 금융을 공부했고, 토지은행을 설립해 토지를 담보로 지폐를 발행하면 상업과 무역을 활성화시킬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아무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프랑스에서 필리프 2세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존 로의 실험은 실패했다. 그후 그는 벨기에로 건너갔으나 프랑스의 재산이 몰수되는 바람에 가난하게 살았다. 그후 로마, 코펜하겐, 베네치아 등을 전전하다가 영국 정부의 귀국 허가에 런던에 잠시 살다가 베네치아에서 숨을 거뒀다.

존 로의 문제점은 통화발행이 컨트롤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지폐 발행에 국가의 적절한 통제가 요구되었다.

불환지폐는 유럽 국가들이 전쟁후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위해 수시로 활용되었고, 1971년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금본위제도가 폐지된 이후, 세계는 본격적으로 불환지폐의 시대에 살고 있다.

존 로의 실패는 프랑스로 하여금 루이지애나가 쓸모 없는 땅으로 인식하게 했고, 결국 그 땅을 미국에 넘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프랑스는 미시시피 투기 이후 재정적자가 악화되었고, 그 해결책으로 실시한 과도한 세금 부과는 대혁명을 초래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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