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한양도성 순성놀이, 신앙으로 여겨
조선시대에 한양도성 순성놀이, 신앙으로 여겨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0.11.2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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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돌아야 효험…과거보러 온 수험생도 한바퀴 돌며 합격 기원

 

조선시대에 순성(巡城)놀이라는 게 있었다. 서울도성을 한바퀴 빙 돌아 걷는 놀이다.

실학자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柳本藝)는 순성놀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도성은 둘레가 대략 40리에 이르며, 봄과 여름철에는 성안 사람들이 짝을 지어 성 둘레를 따라 한 바퀴 돌면서 성 안팎 경치를 구경한다. 한 바퀴를 돌자면 하루해가 걸린다. 이런 것을 순성놀이라고 한다.”

도성을 한 바퀴 돌면서 화류(花柳)를 구경하는 놀이인데, 새벽에 출발하면 저녁 종이 칠 때에 마친다고 한다. 산길이 험해서 지쳐서 돌아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유본예는 전했다.

일제강점기인 1916, 매일신보가 순성장거(巡城壯擧)라는 이름으로 순성놀이 행사를 주최했다. 당시 매일신보는 순성놀이를 이렇게 전했다.

이번의 순성은 옛날에도 풍성히 행해졌던 바이다. 더구나 옛날 과거를 행했던 때에는 고등문관 후보자가 순성을 했다. 순로는 서대문이나 동대문으로 시초로 삼아 성벽을 한번 돌았다. …… 순성은 비가 오든지 바람이 불든지 꼭 하루만에 마치지 아니하면 효험이 없는 것인즉, 그것이 재미있는 규정이라고 생각된다. 그중에는 종로의 상인들도 자기 상점의 운수를 축수하노라고 남몰래 가만히 성벽을 한번 도는 등 옛날에는 선성을 일종의 신앙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유득공(柳得恭)이 전하는 바, 한양도성길엔 필운대의 살구꽃, 성북동의 복사꽃, 오간수문의 버들이 유명했다고 한다.

 

서울시도 옛사람들의 한양도성 순성놀이를 계승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서울시 한양도성 홈페이지에 따르면, 한양도성 순성길을 따라 하루에 돌아볼 수 있지만, 내사산을 중심으로 한 백악·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 구간과 도성이 멸실된 흥인지문·숭례문 구간 등 6구간으로 나누어 걷기를 추천하고 있다.

 

남대문 /박차영
남대문 /박차영

 

우리는 시간이 나는대로 구간을 나눠 서울도성을 순방하기로 했다. 일단 남대문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남대문의 본 이름은 숭례문이다. 숭례문은 총길이 18.6km로 둘러 쌓인 한양도성 중 가장 남쪽에 설치된 문이며,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이듬해인 1393년부터 지어졌다는 한양도성의 제1관문이다.

한양도성은 백악, 인왕, 낙산, 목멱산의 내사산(內四山)을 둘러서 쌓은 성곽이다. 그 내사산의 남쪽 문이 숭례문이다.

4대문은 유교의 5가지 덕목인 , , , , 에 따라 한 글자씩 따서 이름을 지었다. 崇禮門(), 興仁之門(), 敦義門(), 肅靖門(). 하나 남는 글자 은 한양도성의 중심지로 여겨지는 보신각(普信閣)에 썼다.

숭례문은 2008년 화마로 불타버렸다. 그후에 다시 복원되었는데도 아직 국보 1호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복원물에 국보 1호자리를 주는 것은 반칙이다. 복원한 문화재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할수 없다는 게 문화재 관련법의 규정이다. 우리의 상징성을 지우기 힘들었던 게다.

 

남대문초등학교 표지판 /박차영
남대문초등학교 표지판 /박차영

 

남대문에서 서울도성은 끊어져 있다. 서쪽 건너편이 대한상공회의소다. 그리로 가려면 한참 돌아서 가야 한다. 서울은 걷는 사람에겐 참으로 불편한 도시다.

상공회의소 앞에 성곽 복원의 시작점이 나타난다. 유리로 둘러싸 현대적 감각을 씌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누가 저것이 성곽의 흔적이라고 생각할까.

상공회의소 자리에 남대문초등학교터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남대문소학교 자리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남대문 주변에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그들이 세운 학교다. 1915년에 설립되어 해방후인 1946년에 남대문국민학교로 개교하고, 1979년에 재개발계획과 함께 페교되었다.

 

대한상공회의서 옆길의 성곽복원 흔적 /박차영
대한상공회의서 옆길의 성곽복원 흔적 /박차영

 

상공회의소 담을 따라 서소문쪽으로 가면 대형빌딩 외벽처럼 성곽의 흔적을 복원해 놓았다. 원래 돌도 있는 것 같고, 새로 깎은 돌도 얹은 것 같다. 이렇게 복원한 성곽도 잠시, 곧 끊어진다.

복원된 성곽길 끄트머리 중앙일보 근처에 이충순 자결터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구한국군 시위대 참위 이충순(李忠純, 1877~1907)이 군대강제해산에 저항해 서소문에서 대일(對日) 시가전을 전개하다 장렬히 자결 순국한 곳이라고 한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충순 자결터 /박차영
이충순 자결터 /박차영

 

그 다음이 서소문이다. 조선시대에 한양도성의 관문은 4대문(숭례, 흥인, 돈의, 숙정)4소문(혜화, 광희, 창의, 서소문)으로 구성되었는데, 아직 복원되지 않은 2개의 문이 서대문과 서소문이다.

서소문은 지명으로만 남아 있다. 서소문의 위치는 남대문과 서대문의 사이인 남서쪽에 있다. 서소문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는 성곽이 훼파되면서 성문도 없어졌다.

서소문의 원래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이다. 그런데 예종의 왕비이자 한명회의 셋째 딸인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가 인성대군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요절했다. 장순왕후는 휘인소덕(徽仁昭德)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어 소덕문이라는 문 이름을 쓸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소의문으로 개칭하여 불리게 되었다. 또 세인들은 서쪽의 작은 문이라 해서 서소문으로 불렀다.

숭례문, 서소문, 서대문(돈의문)은 지역적으로도 다른 문에 비해 평지에 있고 삼남지방을 비롯해서 의주 등 국토의 모든 길의 관문으로 여겨져 한양을 대표하는 3문이라 했다.

4소문 가운데 상여가 나갈 수 있는 문은 서소문과 광희문이었다. 광희문은 4소문중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에 위치했는데 성곽으로 둘러싸여 비가 오면 물이 문으로 흐른다하여 수구문(水口門) 또는 죽은 시체가 지나는 문이라 하여 주검을 뜻하는 시()자를 써서 시구문이라고 했다.

서소문은 상여가 나가는 문의 역할을 했지만, 그중에서도 어린아이의 시체가 주로 나가는 문이었다. 서소문밖의 아현고개 너머에 아이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아현(兒峴)이라는 의미도 아이()들의 시체를 묻는 고개라는 의미와 마포로 가는 주 도로인 만리재길에 비해 조금 낮은 고개, 버금(亞峴)가는 고개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그러면 없어진 서소문의 위치는 어디일까? 현재 서소문 고가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보면 아래쪽길이 상대적으로 경사진 것을 볼 수 있다. 성밖에서 보면 성안과 밖은 당연히 높이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 위치는 현재 서소문 고가도로가 시작되는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양도성길 전체구간 /한양도성 홈페이지
한양도성길 전체구간 /한양도성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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