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의 역사④…희대의 포야이스 국채 사기사건
투기의 역사④…희대의 포야이스 국채 사기사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2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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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국가로 채권발행에 성공…과잉 통화공급에 1825 최초의 붐-버스트

 

투기과열로 인해 최초의 경제불황이 발생한 때는 1825년이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지 10년째 되던 해, 영국에선 산업혁명이 본격화하고 남미 투자, 벤쳐 붐이 일어났다. 투자는 과열되었고, 돈이 흘러넘쳤다. 과도한 유동성은 경기불황으로 이어졌다. 앞서 네덜란드의 튤립 파동(1637), 프랑스의 미시시피 거품(1719), 영국의 남해회사 사건(1720)은 투기자들의 파멸을 초래했을지언정, 거시경제 위축으로까지 가지는 않았다. 거품의 범위가 국지적이었고, 자본주의 발달 정도가 광범위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은 급속하게 산업화가 진행되었고, 금융부문에서도 복잡한 기술로 인한 레버리지가 일어났다. 중앙은행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던 시절, 과도한 탐욕은 불황을 초래했다. 이후 자본주의 세계는 주기적 공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레거 맥그레거 /위키피디아
그레거 맥그레거 /위키피디아

 

시작은 장밋빛 전망이 초래한 탐욕이었다. 환상은 만들어지고, 그걸 만드는 사기꾼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그레거 맥그레거(Gregor MacGregor)라는 스코틀랜드인이었다.

1821년말 그레거는 자신이 니카라과-온두라스 일대에 있는 포야이스(Poyais)라는 나라의 왕(Cazique)이라며 포야이스의 국채를 매각했다. 포야이스란 나라는 없었다. 다만 그가 그 일대의 추장에게서 웨일스만한 땅을 불하받았던 것이다. 그는 왕도 아니었다. 그는 상상의 나라를 만들어 자칭 왕이라 칭하고 국채 매각에 나선 영국판 봉이 김선달이었다.

그레거의 사기는 통했다. 포야이스의 국채가 순식간에 팔려 나갔다. 그는 수익률 6%의 조건에 60만 파운드를 조달하는데 성공했다.

그레거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포야이스에 이민자를 보냈다. 중세시대의 귀족과 같이 부자가 될수 있게 한다는 거짓말에 속아 200명의 영국인들이 가상의 나라로 이민을 갔다. 그러나 그곳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되지 못했다. 초가집에 원주민의 약탈이 극에 달했다. 이민자들은 그곳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근처 영국 식민지인 벨리즈(Belize)로 탈출했다. 탈출 과정에 무더위와 굶주림, 열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자살하고 50명만 살아 남았다. 이 사실이 영국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그레거는 영국을 떠나 줄행랑을 친 뒤였다.

 

포야이스의 위치 /위키피디아
포야이스의 위치 /위키피디아

 

나폴레옹 전쟁 직후 영국은 어느 나라도 넘볼수 없는 최강의 나라로 부상했다. 프랑스는 패전했고, 스페인의 중남미 식민지는 1810~1820년대에 줄줄이 독립했다. 독일은 아직 분열상태였고, 러시아는 후진국이었다.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포야이스 사기사건은 남해회사 사건 이후 100년만에 다시 벌어진 투자사기였다. 그만큼 영국에선 돈이 넘쳤고, 리스크가 높은 투자에 관심이 높았다. 전쟁이 끝난후 영국 국채물량이 줄어들자 투자자들은 해외투자로 눈을 돌렸다. 그 대상이 라틴아메리카였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이제 스페인에서 독립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했다.

18223월 남미 혁명의 지도자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가 파견한 투자유치단은 런던 은행들의 도움으로 200만 파운드의 볼리비아 국채 발행에 성공했다. 현지의 풍부한 광산자원이 투자의 매력 포인트였다. 금리는 영국 국채수익률의 2배인 7%였다.

볼리비아의 성공에 힘입어 그해 5월에 칠레 정부가 100만 파운드의 국채를 10만 파운드에 사는 조건으로 채권을 발행했다. 만기가 도래하면 10배의 이익을 돌려주는 이 조건에 엄청난 청약자들이 몰려 청약 개시와 동시에 물량이 소진되었다. 칠레 국채 가격은 10월에 25 파운드로 치솟아 투자자들은 5개월만에 150%의 수익을 냈다. 남미 국채가 돈이 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투자자들이 벌떼처럼 몰렸다. 페루 정부의 국채 매각 시에는 런던증권거래소 앞에 대혼잡이 빚어졌다.

독립전쟁을 벌이던 그리스 채권도 인기였다. 18242월 그리스 국채 발행은 청약과 동시에 마감했다. 금리 조건은 6%였다.

 

영국은 5% 이상 수익률을 주는 채권 발행을 금지했는데, 발행자들은 프랑스에서 채권을 발행해 영국에서 파는 수법을 썼다. 요즘의 역외편드와 같은 방식이었다.

채권발행을 대행하는 영국 은행들은 폰지 파이낸싱 수법을 사용했다. 채권 발행국에겐 원금을 주지 않고 이자만 주었고, 나중에 발행한 채권으로 조달한 자금으로 먼저 발행한 채권의 상환금으로 썼다. 정작 채권을 발행한 남미 국가들은 이자만 받았다. 로스차일드와 베어링스브러더스와 같은 거대은행들은 채권발행을 대행하며 돈잔치를 벌였다.

남미가 스페인에서 떨어져 나가자 영국인들은 그곳을 자기네 것이 된양 눈독을 들였다. 1824년에는 남미 금광개발에 붐이 불었다. 남미의 금이 전세계 금의 수요를 채우고도 남는다느니, 어떤 금광에는 금을 밟지 않고 지나가지 못한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면서 금광개발회사 상장주식에 돈이 몰렸다. 앵글로-멕시칸의 주식은 액면가의 10% 가격에 일반공모되었는데, 곧바로 액면가의 33%, 얼마 안가 150%로 치솟았다. 레알 델몽트의 주가도 550 파운드에서 1,350 파운드로 뛰었다. 레알델몬트의 주식은 70 파운드에 공모되었는데, 그때 산 사람은 20배나 불린 셈이다. 요즘으로 치면 신흥시장(emerging market) 투자붐이 이때 일어난 것이다.

 

포야이스에 대한 설명 그림 /위키피디아
포야이스에 대한 설명 그림 /위키피디아

 

산업혁명과 함께 벤처투기도 일어났다. 로스차일드가 화재보험회사를 설립해 주식을 공모했는데 성공했다. 어떤 회사는 런던까지 바닷물을 공급해 피서를 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해수욕을 시키겠다고 주식 공모에 나섰다. 또 다른 회사는 싼 값에 런던신사들에게 우산을 빌려줘 번거롭게 우산을 가져다니지 않게 하는 사업 아이디어도 내놓았다. 이집트인이 버린 금과 보석을 인양하기 위해 홍해의 물을 퍼내겠다는 구상, 트라팔가 해전의 영국 해군 포탄을 건져 고철로 사용하겠다는 사업 아이디어가 나와 투자자들을 찾았다.

이런 엉뚱한 사업 공모에는 브로커와 기자들이 개입되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기자들은 사업체에서 몇푼되지 않은 돈을 받거나 신주를 받는 조건으로 신생회사를 화려하게 포장하는 기사를 썼다. 이런 일로 언론사 기자가 고발되는 일이 있었으나, 사법부는 언론의 자유를 이유로 유야무야시켰다.

 

하지만 언제나 투기에는 꼭지가 있다. 거품은 꺼지기 마련이다. 18251월이 되자 신흥시장과 벤처 투자에 대한 인기가 시들해 졌다. 장밋빛 환상이 깨진 게 이유였다. 남미의 선적장에는 영국산 제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소비되지 않았다.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던 벤처 사업은 현실에서 포말처럼 사라졌다. 남미 금광에 대한 환상도 깨져 레알 델몬트의 주가는 1,550 파운드에서 200 파운드로 급락했다.

거품 붕괴는 영란은행이 가속화시켰다. 나폴레옹 전쟁의 전쟁채권을 발행하면서 금본위제에서 이탈했던 영란은행은 은행권을 과도하게 남발했다. 17258월 영란은행의 금보유량이 400만 파운드인데 비해 은행권 발행규모는 1,500만 파운드였다.

영란은행은 은행권 발행을 줄이기 위해 재할인율을 올렸다. 지폐를 줄여 통화량을 줄이는 조치였다. 시중에 돈이 말라가면서 패닉이 나타났다. 그해 12, 런던 은행가는 공포에 휩싸였다. 중소은행이 예금지급 불능사태에 빠졌고, 줄줄이 은행파산이 이어졌다. 당시 70개의 은행이 파산했다. 주식시장도 곤두박질쳐 평균 80% 이상 폭락했다. 영란은행 앞에는 은행권을 금으로 바꾸려는 군중들이 몰렸다. 그들은 폭도로 변했고, 경찰이 출동해야 했다. 남미에서 온다던 금은 오지 않고, 오히려 런던 은행에 금 가뭄이 생겨난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당시 영란은행이 잘못 판단했다고 지적했다. 영란은행은 중앙은행으로서의 역할을 했지만, 투자자와 영국정부, 주주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이익단체에 불과했다. 경제위기가 닥치면 중앙은행이 통화완화정책을 써야 하는데, 영란은행은 투자자들의 이익을 위해 긴축정책을 채택한 것이다.

당황한 영국 정부는 각의를 열어 재할인을 내리고, 프랑스 중앙은행(Banque de France)에서 긴급히 금을 빌려와 간신히 수습했다.

 

1825년 경기불황은 자본주의 경제에 호황과 불황의 사이클이 시작된 첫 케이스로 지목되고 있다. 이후 영국 경제는 10년마다 호황과 불행이 발행했는데, 경제학자들은 이를 주글러 순환(Juglar cycle)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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