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의 역사⑤…신기술에 광기, 영국 철도광풍
투기의 역사⑤…신기술에 광기, 영국 철도광풍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23 13: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철도 등장 직후 1840년대 투기바람…거품 꺼진후 신규철도는 남아

 

영국에서 처음으로 개통된 철도는 1825927, 스톡턴-달링턴 구간의 철도(Stockton and Darlington Railway)였다. 세계 최초의 기관차에 의한 영업 철도이기도 했다.

이어 4년후인 1829년 리버풀-맨체스터 구간이 열렸다. 이로써 영국은 산업혁명의 발원지답게 가장 먼저 철도 시대로 들어섰다. 세계 제패의 야망에 들떠 있던 영국인들은 승객 및 화물수송력이 뛰어난 철도에 열광했다.

철도는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베세머공법에 의해 강철 제조되었기 때문에 탄생한 첨단기술이었다. 철도는 인류 역사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철도로 인해 무거운 화물을 값싸게 먼 곳까지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먼 곳에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가까워졌다. 철도 노선 상에 사는 사람들은 물리적 거리가 멀더라도 이웃이 됐다. 교통 병목이 없어지자 시간은 곧 돈이 됐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이윤이 더 많아졌다. 산업 생산량이 급증하고, 판매자와 구매자를 가로막던 거리의 장애물이 사라졌다.

 

영국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 철도의 쳐녀 운행 /위키피디아
영국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 철도의 쳐녀 운행 /위키피디아

 

영국에 철도가 등장한지 20년 되는 1840년대에 철도 투기바람이 일어났다. 당시 영국의 철도 투기는 1990년대 미국의 닷컴 버블에 비견되는 기술주 투기였다. 150년 세월의 거리를 두고 발생한 두 투기의 공통점은 실제 효용성보다 과도한 투자가 이뤄졌고, 거품은 순식간에 꺼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투자된 돈은 영국의 철도산업을 키웠고, 미국에 구글(Google)이라는 거대기업을 형성했다.

1845년 영국 철도 투기는 전형적인 거품경기를 반영했다. 경기 호황으로 저금리 기조가 유지되었고, 시중의 유동성은 넘쳐났다. 이때 신기술이 개발되어 시험단계를 거쳐 본격적으로 상업화되었다.

영국인들도 초기엔 철도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운하와 역마차 업자들은 철도건설을 반대했고, 지방 귀족들은 영지의 고요함을 깬다고 거부했다. 옥스퍼드대학과 이튼칼리지 등 명문학교도 철도를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막상 철도가 개설되고 사람과 화물을 수송하면서 철도는 산업을 발달시키고 사람의 거리를 좁히고 지역 격차를 해소했다.

호텔, 사무실, 하숙집, 거리, 건물의 이름에 철도라는 단어가 붙었고, 철도지도, 기차여행용 도시락이 만들어졌다. 철도만 다루는 신문이 영국 전역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철도정보에 대한 수요가 커진데다 철도회사의 광고를 얻을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 허드슨 /위키피디아
조지 허드슨 /위키피디아

 

당시 철도투자의 대부는 조지 허드슨(George Hudson)이란 사람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부유한 친척이 물려준 재산을 활용해 요크시 시장이 되었다. 그는 1834년 증기기관차를 발견한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을 우연히 만나 철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1842년 요크-노스미들랜드 철도회사(York and North Midland Railway)를 설립하고 다른 철도회사를 인수해 버밍엄과 브리스톨까지 노선을 확장하고 런던을 연결했다. 2년뒤인 1844년에 그가 소유한 철도노선은 1,000km, 당시 영국 철도의 3분의1을 넘어섰다. 그는 철도왕(Railway King)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철도회사는 수익을 냈다. 1844년 철도회사는 평균 10%의 배당을 실시했는데, 이는 당시 이자율의 3배였다. 철도 투자가 돈이 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자유방임 경제를 운용했다. 철도건설은 사업자의 자유였고, 다만 노선이 지나가는 곳에 토지를 매입해야 하기 때문에 의회의 승인을 필요로 했다. 18451월에 16개 노선이 사업신청을 했고, 4월에는 무려 50개의 회사가 등록했다. 철도회사들은 사업설명서와 주식공모 광고로 신문을 도배했다. 배당수익률 10%는 반드시 들어가는 문구였다.

철도회사 발기인들은 자기들의 몫은 챙겨놓고 나머지만 시장에 내놓았다. 유통물량을 줄여 주가 상승을 유도하는 목적이었다. 철도신문들은 광고주의 요구에 따라 과장된 기사를 내보내 투자자들을 유혹했다.

영국 전역이 철도 투기에 미쳐버렸다. 은행들은 철도회사에 주식담보 대출을 내주었다. 철도회사 주식을 매매하는 거래소가 전국에 설립되고, 어떤 도시에서는 3개나 들어섰다. 브로커만 3,000명이나 되었다. 투자자들은 한 주라도 더 얻기 위해 브로커 주변에 몰려 들었다.

영국 의회가 1845년에 2,000 파운드 이상 철도주식을 청약한 사람 2만명을 공개했는데, 그중 의회의원이 157, 성직자도 257명이 포함되었다. 의원들은 인가권을 휘두르며 주식을 얻었고, 성직자는 교인들의 모금함을 철도투자에 부은 것이다. 영국인이면 누구나 철도에 뛰어들었다.

1845613km의 철도가 심사를 받았는데, 이는 기존 철도의 4배에 해당했고, 영국 국토 남북길이의 20배나 되었다.

10월말에는 철도 1,200개가 계획중이었는데, 건설에 드는 비용은 56,000만 파운드에 이르렀다. 철도회사의 부채는 6억 파운드에 달했다. 당시 영국 GDP55,000만 파운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국 경제가 다른 곳에 투자하지 않고 철도만 투자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철도투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조지 허드슨은 영웅이었다. 그는 가난뱅이에서 일약 대부호가 되어 있었다. 그는 돈의 명성으로 하원의원에 선출되었다.

 

영국 철도거품 당시 철도주가 추이 /theBubbleBubble
영국 철도거품 당시 철도주가 추이 /theBubbleBubble

 

1845년 가을, 철도주식의 거품은 부풀대로 부풀어 올랐다. 주가수익비율(PER)5배로 치솟았고, 철도 주식담보대출 이자율은 연 80%까지 치솟았다. 어느 철도신문에는 광고와 사업설명서가 8개면을 차지했다.

하지만 막상 철도 건설이 시작되면서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청약자들은 대금의 10%만 내고, 나머지는 분할납부하는 조건이었다. 그해 10월초 청약자들은 대금을 납부하기 위해 주식을 내다팔기 시작했다.

이때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이자율을 올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과열을 우려한 일부 투자자들이 금으로 교환하기 시작했고, 영란은행의 금보유량이 줄어들었다. 영란은행은 금리를 0.5%P 소폭 올렸다. 투자자들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철도주식 거래량은 급감했고, 장밋빛 환상은 불안과 의심의 눈초리로 변했다. 10월말,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의 주가는 최고점에 비해 40% 폭락했다.

주가가 떨어지면서 청약자들은 주식을 포기했다. 하지만 철도회사측은 청약대금의 나머지를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발기인들도 적자분을 메워야 하는 의무를 졌다. 이름만 내주고 떼돈을 벌려고 했던 발기인들이 파산직전에 몰렸다. 거품이 꺼진후 철도회사들은 소송과 분쟁에 휘말렸다.

투기붐은 1846년에도 이어졌다. 한쪽에선 투자열기에 휩싸이고 다른 한쪽에선 파산했다. 18467월에 8개 회사가 청산을 위한 주총을 소집했고, 100여건의 M&A가 단행되었다. 18471월에 영란은행이 금리를 다시 올렸고, 사람들은 안전한 금을 사들이는데 주력하게 되었다. 금 유출이 진행되면서 은행들이 파산하고 다시 금리를 인상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자율은 19452.5%에서 1847년에 10%까지 치솟았다. 철도에 과도한 자금이 몰린 것이 경기사이클을 아래로 끌어 내린 것이다.

철도왕 허드슨은 사기와 횡령 혐의를 받았다. 그는 회사돈과 개인돈을 구별하지 않았다. 허드슨의 회사 주가는 발행가를 밑돌았고, 배당금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는 온갖 사기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는 돈을 돌려달라는 채권자들의 소송으로 감옥과 해외탈출을 거듭하다가 187171세의 나이로 숨졌다.

 

1840년대 영국의 철도 거품은 실물자산에 대한 투기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증시거품과 다른 측면이 있다. 당시 계획되었던 철도의 3분의1이 무산되었다. 그렇지만 1km의 철도가 1844~1846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현재 영국 철도길이는 18,000km인데 절반 이상이 이때 건설된 것이다. 역설적으로 영국 정부는 세금을 한푼도 들이지 않고 투기자본을 활용해 국가의 주요기반시설을 조성한 것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Railway Mania

Wikipedia, George Hudson

금융투기의 역사’, 에드워드 챈슬러, 국일증권, 2001, P189~232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