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의 역사⑥…19C 미국 도둑귀족들의 행각
투기의 역사⑥…19C 미국 도둑귀족들의 행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24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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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더빌트, 드루, 굴드, 피스크, 쿡 등…불법과 폭력으로 투기조장

 

미국이란 나라는 태생적으로 투기의 나라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신대륙 개척이라는 모험사업에 도전했고, 월터 랠리(Walter Raleigh) 경은 20% 이상의 수익성을 보장하며 버지니아회사(Virginia Company)의 투기자금을 끌어들여 미국 동부에 식민지를 개척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유럽의 신분주의를 탈피해 출신 여하를 막론하고 돈만 있으면 신분상승이 보장되는 곳이었다. 미합중국 건국자들 가운데 투기자들도 상당수 포함되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일리노이에서 6,300 에어커의 땅을 투기했고, 패트릭 헨리도 조지아주의 땅투기회사 야주(Yazoo)사의 투자자였다. 토머스 제퍼슨, 알렉산더 해밀튼도 한때 땅장사를 했다.

1700년 미국에 증권거래소가 설립되면서 투기의 열풍은 채권과 주식으로 옮겨갔다. 가난한 사람도 주식시장에서 떼돈을 벌어 떵떵거리며 살아갔고, 금융규제와 법질서가 안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증권시장은 불법과 작전이 판을 쳤다.

19세기 중반 미국엔 주식시장에서 음모와 작전을 통해 거대한 부를 일군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들을 로버배런(robber baron)이라 불렀다. 직역하면 강도백작이란 뜻이다. “개 같이 벌어 정승처럼 산다는 우리 속담과도 다르다. 불법과 폭력을 행사해서 돈을 벌어 남을 짓누르며 살았던 족속들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코널리어스 밴더빌트, 대니얼 드루, 제이 굴드, 제임스 피스크, 제이 쿡 등이다.

 

왼쪽에서부터 코널리어스 밴더빌트, 대니얼 드루, 제이 굴드, 제임스 피스크 /위키피디아
왼쪽에서부터 코널리어스 밴더빌트, 대니얼 드루, 제이 굴드, 제임스 피스크 /위키피디아

 

코널리어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 1794~1877)는 뉴욕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11세때부터 하루 25센트를 받으며 아버지가 운영하는 연락선에서 일을 시작했다. 16세에 저축한 돈과 부모에게 빌린 돈으로 100 달러를 씨자금으로 해서 자기 배를 사서 운영했다. 23살의 나이에 남의 밑에 들어가 뉴욕~뉴저지를 운항하는 증기선 회사를 경영했다. 그는 저가 운임으로, 로버트 풀턴이 운영하는 경쟁사를 제압하고 시장을 독점했다. 미국에서 최초의 증기선을 운항한 풀턴도 그의 공격성에 사업을 망쳐버렸다.

밴더빌트는 독립해 증기선 회사를 차려 뉴욕 일대의 여객선 회사들을 잡아먹고 자신이 고용되어 있던 회사마저 인수해버렸다. 이때 그는 대니얼 드루를 만나게 된다. 40대 중반에 그는 가장 많은 직원을 고용한 기업가로 부상했고, 68살 되던 해에 배를 모두 처분하고 철도 주식을 사들였다.

그는 철도에 손을 댄지 10년만에 뉴욕 일대 철도를 장악했다. 그는 주가를 조작하고 공무원을 매수해 경쟁회사를 쓰러뜨렸다. 188882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그의 유산은 1억 달러에 달했다. 그는 생전에 한푼도 자선사업에 기부한 적이 없는데, 그의 유족들이 100만 달러를 기부한 학교가 지금의 밴더빌트 대학이다.

 

이리 철도 분쟁을 그린 삽화 /위키피디아
이리 철도 분쟁을 그린 삽화 /위키피디아

 

대니얼 드루(Daniel Drew, 1797~1879)는 밴더빌트와 마찬가지로 뉴욕에서 가난하게 태어났다. 1812년 영국과 전쟁이 터졌을 때 친영파 민병대에 입대해 입대 장려금 100달러만 받고 탈영했다. 그는 그 돈으로 가축사업을 벌였다.

드루는 미국 서부에서 소를 사들여 동부까지 몰고가 도축해 팔았는데, 그때 써먹은 방식이 물타기(watering)이었다. 소를 끌고 가며 물을 주지 않고 소금을 잔뜩 먹였다. 도착지 근처 강에 소를 풀어 놓으면 소가 물을 잔뜩 먹어 체중이 늘어난다. 그런 사기방식으로 그는 다른 카우보이보다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30대 후반에 뉴욕주 허드슨강에서 여객선 사업을 하면서 밴더빌트를 알게 되어 친구처럼 지냈다. 그는 주식투자가 더 많은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곧이어 주식투기에 뛰어들었다.

사업 세계에서 친구는 없다. 1866년부터 3년간 당시 황금노선이었던 이리 철도를 놓고 밴더빌트와 드루가 전쟁을 벌였다. 드루는 이 전쟁에 제이 굴드와 제임스 피스크를 끌어들였다. 그들의 전쟁은 각목부대를 동원하고 판사를 매수하고 시의원을 동원했다. 한쪽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얻으면 다른 쪽에서 시의원을 이용해 판결을 뒤엎었다. 양자는 최종적으로 타협을 했지만 후세의 사람들은 이 싸움을 이리 전쟁(Erie War)이라 불렀다.

 

로버배런들이 쌓아 올린 성을 노동자들이 떠받치고 있는 그림 /위키피디아
로버배런들이 쌓아 올린 성을 노동자들이 떠받치고 있는 그림 /위키피디아

 

제이 굴드(Jay Gould, 1836~1892)는 뉴욕 월스트리트 역사에 가장 악덕자본가로 꼽힌다. 누군가는 그를 예수가 태어난 이후 최악의 인간이라고 평했을 장도로 잔혹한 인물이었다.

제임스 피스크(James Fisk, 1835~1872)는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하고 무례한 인간이었다. 그는 적에겐 냉혹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겐 온정적이었다.

드루의 부하였던 굴드와 피스크는 이번엔 드루를 축출하는데 손을 잡는다. 두 배신자는 뉴욕 증시에 이리철도 주식을 집중매도했다. 주가가 급락했다. 드루는 부하들의 작전을 깨닫지 못하고 공매도(short sale)를 하기 위해 주식매입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굴드 일당이 선수를 쳐서 매수세로 돌아섰다. 드루는 허를 찔리고 막대한 손실을 잃은채 이리 철도에서 떠나야 했다.

 

드루를 내몰고 굴드와 피스크는 스타로 부상했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쳤다. 굴드와 피스크는 1869년 올버니-서스퀴해너 철도를 뺏기 위해 철도사업주 조지프 램지(Joseph H. Ramsey)에 폭력을 행사했다. 램지도 폭력배를 동원했다. 양측은 수백명의 각목부대를 태우고 적진을 향했고, 마주 달리는 열차는 충돌했다. 양측 폭력배들은 열차에서 내려 무기를 휘두르며 혈투를 벌였다. 마침내 뉴욕 주지사가 민병대를 소집해 두 진영의 육박전을 간신히 뜯어 말렸다. 영화와 같은 유명한 스토리다.

이 분쟁에서 당대의 금융거물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가 개입했다. 모건은 램지에게 손을 들어줘 굴드와 피스크 일당이 패배하게 된다. 이 사건 이후 J.P. 모건이 철도를 장악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1869년 검은 금요일 때 뉴욕 금거래소의 칠판 /위키피디아
1869년 검은 금요일 때 뉴욕 금거래소의 칠판 /위키피디아

 

굴드와 피스크는 이번에 금 매집에 나섰다. 당시 금시장에서 가장 큰 손은 정부였다. 굴드는 대통령 율리시스 그란트(Ulysses S. Grant)에게 접근했다. 그란트는 남북전쟁에서 북군의 장군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공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정치인이었다. 굴드는 그란트의 여동생과 결혼한 아벨 코빈(Abel Corbin) 장군을 앞세워 그란트와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18696월 굴드는 대통령을 자신의 보트에 초청했고, 피스크는 광대 차림을 하고 기쁨조 역할을 했다. 굴드는 선거를 앞두고 농민들을 위해 통화팽창 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재무부 차관에게 통화팽창을 설득했다. 물론 사례는 치렀다.

그란트는 이들의 말을 듣고 금을 풀었다. 금 가격이 하락하자 굴드 일당은 금을 매집했다. 금 값이 적절히 떨어졌다고 생각할 시점에 일당은 코빈을 시켜 대통령에게 금 매각을 중지해달라는 편지를 쓰게 했다. 편지를 받은 그란트 대통령은 자신이 매제와 투기조직에 속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대통령의 뜻을 전달받은 재무장관 조지 보트웰(George S. Boutwell)은 금 매도를 지시했다.

1869924,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미국 재무부의 금 매도로 금값이 온스당 135 달러로 떨어지는데도 굴드 일당은 160 달러에 매수 주문을 냈다.

정부와 굴드 일당의 금 투기 전쟁으로 뉴욕 금 거래소(New York Gold Exchange)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브로커들은 미쳐 날 뛰었다. 갈피를 잡지 못한 소액투자자들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군중들은 폭도로 돌변해 군대가 출동했고, 굴드와 피스크는 거래소 옆문을 통해 도망쳤다. 월스트리트 역사에서 이를 검은 금요일(Black Friday, 1869)로 기록된다.

굴드와 피스크의 지시를 따랐던 브로커들은 빚더미에 올랐고, 정신병자가 된 사람, 권총으로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이 대혼란으로 그란트 대통령은 신망을 잃었고, 대신에 남북전쟁으로 유예한 금본위제도를 조기에 실시하는 계기로 삼았다.

 

1874년 실업자들의 시위를 폭력으로 제압하는 미국 경찰 /위키피디아
1874년 실업자들의 시위를 폭력으로 제압하는 미국 경찰 /위키피디아

 

제이 쿡(Jay Cooke, 1821~1905)은 남북전쟁 때 연방정부의 국채를 잘게 쪼개 매각에 성공한 후 미국 채권시장을 활성화시킨 인물이다. 그는 국채발행을 대행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그 돈으로 대륙횡단철도인 노던 퍼시픽 철도(Northern Pacific Railway)를 인수해 경영했으나, 결국 철도의 과잉 경쟁에 휘말려 1873년에 파산하고 말았다.

미국의 과잉 철도투자는 1873년 금융공황의 원인이 되었다. 이 공황은 1929년 대공황에 버금갔으며, 이때 5,000개의 회사와 57개의 증권사들이 문을 닫았다. 도둑과 같은 귀족들의 투기 행각이 초래한 경기불황이었다. 이 공황으로 수많은 실업자가 길거리를 뛰쳐 나왔고 경찰은 폭력적으로 대응했다. 투기자들의 탐욕에 피해를 본 최종의 사람들은 가난한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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