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버블붕괴①…비극의 서막, 플라자 합의
일본 버블붕괴①…비극의 서막, 플라자 합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25 15: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엔화강세, 이자율 하락으로 주식, 부동산, 해외투자에 거품 형성

 

1980년대말,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도쿄 황궁의 땅값이 미국 캘리포니아 전체 땅값보다 비싸다는 평가가 나왔다. 캘리포니아의 면적은 황궁에 비해 수십억배 넓은데, 그 땅을 다 팔아도 황궁 땅을 살수 없다는 얘기였다. 도쿄 중심가 긴자(銀座) 거리의 땅 값이 끊임없이 올라 13,000만엔에 거래되었다.

일본 GDP는 미국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지만,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은 미국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두배에 달했다. 미쓰이부동산은 31,000만 달러였던 뉴욕 맨해튼 6번가의 엑손빌딩을 62,500만 달러에 샀다. 미쓰비시부동산은 뉴욕의 명물 록펠러센터의 50%를 매입했고, 스미토모계열의 한 회사는 캘리포니아 페블비치 골프장을 매입했다. 소니는 콜럼비아 영화사를 인수했고, 마쓰시타는 MGM유니버설을 샀다. 미국 언론들은 일본이 미국을 통째로 사들이고 있다고 불만스런 헤드라인을 깔았다.

하지만 그 거품은 오래가지 않았다. 새해를 목전에 둔 19891229일 니케이225 지수는 39,957.44까지 치솟아 4만 포인트를 목전에 두었다. 모든 애널리스트들은 1990년에도 니케이는 상승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다. 주가는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대장성이 나서 증권사들의 팔을 비틀어 부양책을 썼지만 니케이지수는 곤두박질 쳤다. 땅값도 하락했다. 거시경제도 휘청거렸고, 금융부실이 나타났다. 이렇게 해서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10”(われた十年)을 맞게 된다.

 

도쿄의 일본 황궁과 세이몬(正門)석교 /위키피디아
도쿄의 일본 황궁과 세이몬(正門)석교 /위키피디아

 

1980년대 일본의 거품과 1990년대 거품붕괴에 따른 장기불황은 1929년 미국 대공황 이후 최대의 공황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일본의 거품 붕괴는 독특한 자본주의 시스템, 즉 정부가 기업과 은행을 통제하는 관료형 경제가 무너졌다는 점에서 미국의 대공황과의 비교에서 다른 측면을 갖는다. 또한 미국의 대공황은 전세계적으로 파장을 미쳤지만, 일본 바부르(バブル, bubble) 붕괴는 열도 내에 한정되었다는 것도 큰 차이점이다. 오히려 이 시기에 한국은 3저 호황을 맞았다.

 

일본은 1945년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폭탄을 맞으며 패전했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 전체의 부() 가운데 4분의1이 파괴되었다는 통계도 있다. 개더거 미군에 점령되어 군사통치를 받았다. 피폐한 경제 속에 일본인들은 좌절했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여성들은 미군에게 몸을 팔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잿더미 속에서 불사조처럼 살아났다. 인류 역사에서 패권을 잃은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재기에 성공한 케이스가 일본과 독일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국전쟁 때 군수물자를 공급한 게 바닥을 탈출하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쨌든 그들은 일어났다. 1950~60년대에 일본은 연간 10%의 성장률을 달성하며 전승국들을 따라붙기 시작했다. 1980년대엔 토요타, 닛산, 혼다는 미국 자동차 빅3를 위협했고, 소니, 마쓰시타, 샤프는 세계 전자산업을 주도했다.

그 중심에 일본 관료들이 있었다. 주식회사 일본(,Japan Inc.)라는 명성 답게 일본 대장성과 통산성 관료들이 산업계획을 수립해 지침을 내리면 기업과 은행들이 따랐다. 금융기관은 기업에 저금리의 대출을 해주었고, 정부는 보호관세와 조달로 기업을 육성했다.

 

이에 비해 전승국 미국은 휘청거렸다. 베트남전에서 허우적거렸고, 미국 상품의 경쟁력은 저하되었다. 재정과 무역의 쌍둥이 적자를 해소시킬 방법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무역적자가 많은 나라의 통화가치가 내려가고, 무역흑자국의 통화가치는 상승해야 한다. 하지만 1980~1985년 사이에 무역적자국인 미국의 달러화는 흑자국 통화인 일본 엔, 독일 마르크, 프랑스 프랑, 영국 파운드에 비해 50% 절상되었다. 미국은 무역상대국이 통화를 인위적으로 조작했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 대장성이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엔화를 저평가시켰다고 보았다.

 

1985년 플라자 합의에 참여한 5개국 재무장관들 /위키피디아
1985년 플라자 합의에 참여한 5개국 재무장관들 /위키피디아

 

1985922, 뉴욕 센트럴파크 남단 5번가에 위치한 플라자호텔.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James Baker) 재무장관은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의 재무장관을 불렀다. 5개국 장관들은 달러 절하에 동의했다.

미국은 경제가 추락하고 있었지만 군사적으로는 세계 패권국가였다. 미국은 2차 대전에서 일본과 독일에겐 전승국이었고, 영국과 프랑스에겐 결정적 지원국이었다. 미국은 일본과 유럽에 미군을 주둔시켰고, 이들 국가는 미군을 방패막으로 국방비를 줄이고 그 돈으로 경제발전에 보탰다. 이 모순된 논리를 해결하자는 것은 비단 작금의 도널드 트럼프 뿐 아니라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도 있었다. 트럼프는 미군 주둔비를 수혜국이 내라고 요구했지만 레이건은 환율 조정으로 해결하자고 압박한 것이다. 당시 플라자 합의(Plaza Accord)의 내막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일본과 독일, 영국, 프랑스는 패권국의 힘의 논리를 받아들여야 했다.

 

플라자 합의가 일본 거품 붕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엔 이견이 없다. 다만 일본 당국은 이 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정책을 선택했다. 엔화 강세의 부작용으로 아우성치는 기업들을 지원하기 위해 금리를 낮췄고, 금리인하로 발생한 풍부한 유동성은 주식과 부동산으로 몰려갔다. 또 강한 엔화는 해외 부동산과 기업인수에 동원되었고, 명화와 골프회원권 매집에 쏠렸다. 대장성과 일본은행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준다는 신화와 믿음이 오히려 버블을 확대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니케이지수 추이 /위키피디아
니케이지수 추이 /위키피디아

 

플라자 합의 이후 각국은 외환시장 개입에 나섰다. 다섯달 뒤인 19861, 엔화환율은 1달러당 259엔에서 150엔으로 떨어졌다. 엔화가치가 40% 이상 상승한 것이다. 엔화 값 상승은 일본 수출품 가격을 상승시키고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렸다. 갑자기 40% 오른 가격에 기업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일본 성장률은 1996년 마이너스 0.5%를 기록하고 기업들이 해외로 나가는 바람에 산업공동화현상이 벌어졌다.

기업들은 정부와 중앙은행에 대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일본은행은 그해 재할인율을 네차례에 걸쳐 3%로 떨어뜨렸다. 성장률은 떨어졌는데 유동성이 넘쳤다. 그 돈은 곧바로 주식시장과 부동산으로 들어갔다. 니케이 지수는 19868월에 40% 상승해 18,000 포인트에 이르렀다.

주가가 상승하자 일본정부는 일본전신전화공사(NTT, Nippon Telegraph & Telephone Co.)를 민영화하기로 했다. 198610월에 1차 주식매각을 실시했는데, 두달동안 1,000만명이 청약에 응했다. 청약자들은 공모가가 얼마인지 따지지 않았다. 정부가 운영하는 회사이므로 망할리 없고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외국인의 참여는 허용되지 않았다. 청약자가 너무 많아 추첨을 통해 결정했다. 19872NTT는 상장되었는데, 주당 120만엔에 첫거래된 주가는 상장 이틀만에 25% 상승했다. 일본은행은 곧이어 재할인율을 2.5%로 더 낮추었는데 NTT의 주가를 부추겼다. NTT 주가는 5월에 320만엔으로 치솟았다.

NTT 주가는 일본 버블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당시 NTT 시가총액은 50조엔으로 독일과 홍콩 상장기업의 전체 시가총액을 넘어섰다. 일본인들은 NTT의 정부주식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 자체를 산다고 생각했고, 정부가 강력하게 주가를 지탱해줄 것이라 믿었다.

 

일본인들은 엔화의 무게가 무거워지면서 하와이로 달려갔다. 그들은 194112월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데 대한 복수를 감행했다. 하와이의 호텔이며 콘도, 레스토랑은 일본인들 소유로 넘어갔고, 와이키키 해변은 일본인들로 넘쳐났다. 엔화가 하와이에서 현지통화로 거래되었다. 미국인들 사이에선 일본인들의 하와이 매입이 제2차 진주만 공습이라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참고자료>

Wikipedia, Plaza Accord

Wikipedia, Japanese asset price bubble

금융투기의 역사, 에드워드 챈슬러, 국일증권, 2001

광기, 패닉, 붕괴-금융위기의 역사, 찰스 P. 킨들벅더등. 굿모닝북스, 2006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