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버블붕괴②…오만이 빚어낸 신기루
일본 버블붕괴②…오만이 빚어낸 신기루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26 1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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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행 금리인상시기 놓치고, 대장성 기업들의 투금계정 허용

 

미국이 플라자 합의를 주도해 일본 경제를 무너뜨렸다는 주장이 있다. 미국의 엔고(円高) 강요가 일본의 자산 거품을 조장했고, 그 거품이 터지면서 일본 경제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일견 일리가 있는 견해다. 하지만 내막을 뜯어보면 일본 당국이 엔고 불황을 대처하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금리인하를 단행해 자산거품을 키웠다. 적어도 엔고가 시작된지 2~3년후인 1987~88년 경에 금리를 올렸어야 했다.

자산버블이 생길 때는 적절한 시기에 바람을 빼주어야 한다. 일본 금융당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이 뒤늦게 손을 댔을 때에는 거품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관료들의 오만 때문이었다. “일본 경제는 영원할 것이다, 전쟁에선 졌지만 경제에선 미국을 이기고 있다는 그 과도한 자신감이 버블을 키웠다. 1985년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미국에 의해 통화절상을 강요받은 나라 가운데 독일, 영국, 프랑스 경제는 멀쩡했는데 유독 일본경제만 무너졌다. 정부와 기업, 금융기관, 일본인들이 한통속이 되어 밀어붙인 자신감은 거품 붕괴로 귀결되었다.

 

일본은 플라자 합의에 따라 외환시장에 개입해 달러화를 떨어뜨렸다. 1달러당 250엔 하던 환율이 1986년 중반엔 150엔대로 떨어졌다.

일본은행은 1986년에 재할인율을 네 번 인하해 5%에서 3%로 떨어 뜨렸다. 미국과의 약속에 따라 달러 값을 하락하기 위한 필요조치이기도 했고, 엔화 상승에 따른 일본 기업들을 부양하는 당연한 조치로 받아 들여졌다. 수출이 악화되어 내수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엔다카(엔고)는 일본 경제를 침체에 빠뜨렸다. GDP 성장률이 19856.3%에서 1986년에 2.8%로 하락했다. 일본에선 이를 엔고불황이라 불렀다.

1987222일 파리 루브르에서 G7 재무장관들이 만나 달러가치가 충분히 떨어졌으니 더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협조하기로 합의했다. 플라자 합의는 2년만에 루브르 합의(Louvre Accord)로 종결되었다.

 

일본 엔화 추이 /위키피디아
일본 엔화 추이 /위키피디아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은 루브르합의 시점에서 자산거품을 처리했어야 했다. 플라자 합의에 따른 금리인하는 유동성을 부풀려 그 돈이 주택으로 흘러갔다. 부동산은 일본에서 가장 신뢰받는 자산이었다. 1956~1986년 사이에 일본 땅값은 50배 이상 치솟았다. 이 시기에 소비자물가는 두배 올랐을 뿐이다. 일본인들은 땅값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풀려난 돈은 도쿄 중심가 지가를 띄워 올렸다. 도쿄 상업지구의 1당 가격이 1984133만 엔에서 이듬해 189만 엔으로 42% 올랐고, 1986년에 421만엔으로 두배 이상 올랐다. 도쿄 주거지역 땅도 1198530만엔에서 1986년에 43만엔으로 45% 상승했다. 오사카도 상업지구와 주거지구의 땅값이 30% 이상 폭등했다.

도쿄 땅값이 너무 올라 더 이상 사지 못하게 되자 도쿄 남쪽 지역으로 투기바람이 이동했다. 요코하마, 사이타마, 치바현의 땅값이 들썩거렸다. 1987년에 이미 일본 부동산 시장은 버블을 형성했고, 이듬해엔 도교 부동산 시장에 거품붕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동산이 뛰자 다음으로 뛴 곳이 주식시장이다. 도쿄 증시의 기본지수인 니케이225 지수는 1984년에 9,900~11,600 사이의 박스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플라자 합의 직후인 198512월에 13,000 포인트를 넘어섰고, 19868월엔 26,000 포인트를 터치했다.

 

경제학자 대부분은 1987년에 일본 중앙은행이 버블을 차단해야 했다고 주장한다.

루브르 합의로 일본은 더 이상 엔고 의무를 지지 않았다. 그런데 루브르 회의 다음날인 1987223일 일본은행은 재힐안율을 3%에서 2.5%로 인하했다. 중앙은행이 거품을 더 조장시킨 것이다.

일본은행의 이때 재할인율 인하조치가 시장에 잘못된 사인을 주었다. 이후 주택과 부동산 시장이 계속 오르자 일본은행은 1987년 하반기에 금리인상을 논의했지만, 때마침 뉴욕증시에서 블랙먼데이 주가폭락(1987. 10. 19.)이 터지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거품 팽창을 2년 더 방치했다.

블랙먼데이 때, 대장성은 노무라, 다이와, 야마이치, 니코 등 빅4 증권사 대표를 불러 주가를 부양하라고 명령했다. 일본 대장성의 노골적인 증시부양인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거래량의 절반을 좌우하던 메이저 증권사들은 큰 손들에게 손실보장을 해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식매수에 나섰다. 도쿄 증시는 2~3개월만에 원래의 수준을 회복했다.

 

최고급 맨션의 대명사였던 도쿄 도심의 히루가든힐스 /위키피디아
최고급 맨션의 대명사였던 도쿄 도심의 히루가든힐스 /위키피디아

 

1987~1990년 사이 일본의 부동산과 주식시장은 광란의 시기였다. 중소기업들은 은행 대출을 받아 부동산 사기에 혈안이었고, 당국의 규제가 느슨한 비은행 금융회사들의 부동산 담보대출은 198522조엔에서 1989년말 89조엔으로 4배 가까이 늘었다. 도쿄 집값이 너무 올라 은행들은 월급쟁이들엑 작은 평수도 100년이상 분할상환하는 조건의 대출상품을 팔았다.

이 와중에 일본 정부는 우체국 예금대한 면세조치를 완화했다. 그러자 300조엔에 달하는 자금이 우체국에서 빠져나와 증시로 몰려들었다.

1990년 일본 부동산 전체 가치는 2,000조엔을 넘는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 금액은 미국 땅 값의 4배에 해당하는 것이다. 도쿄 황궁 땅값이 캘리포니아 전체 땅값보다 비싸다는 계산되 이 무렵 나왔다. 도쿄 중심부의 NTT(일본전신전화공사) 신축건물의 1가격이 3,000 달러를 호가해 버블 타워라는 영광을 얻었다.

 

버블시기 일본의 부동산 가격 추이 /Policy Responses to the Post-Bubble Adjustments in Japan: A Tentative Review
버블시기 일본의 부동산 가격 추이 /Policy Responses to the Post-Bubble Adjustments in Japan: A Tentative Review

 

일본 기업들은 1980년대부터 자이테크(테크)로 수익을 벌어들였다. 대장성은 1984년에 기업의 토오킨 계정(투금계정)을 허용했다. 기업들은 이 계정으로 자본이득세를 부담하지 않고 주식과 채권투자를 했다. 증권사들은 기업의 토오킨 계정을 유치해 운영해 주는 계좌를 만들었다. 토오킨 펀드의 규모는 19859조 엔에서 198940조 엔으로 불어 났다.

기업들은 자본자유화 조치에 힘입어 1981년부터 역외시장에서 신주인수권부 채권(BW)를 발행할수 있었다. 일본 기업들은 낮은 이자율로 BW를 발행해 엔고로 인한 환차익을 얻고 그 돈으로 투금계정에 부었다.

기업들은 제조업을 해서 번 돈보다 재테크를 해서 번 돈이 더 많았다. 상장기업 대부분이 재테크를 했다. 엔고로 적자를 본 기업도 재테크로 이익을 냈다. 철강회사 한와는 재테크로 번 돈이 4조 엔으로, 본업에서 번 이익금의 20배를 넘었다.

기업들은 쉽게 조달한 돈으로 설비투자에도 썼다. 1980년대 후반에 일본 재계는 사상 최대의 설비투자 붐을 일으켰다. 덕분에 일본의 GDP 성장률은 올라갔다.

 

도쿄 증시는 기업 수익보다 더 빠르게 상승했다. 섬유회사의 주가수익비율(PER)108, 서비스주는 112, 해상운송주는 176, 어업관련주는 319배로 뛰었다. 일본 최대항공사 JAL은 민영화하면서 PER 400배에서 주식이 거래되었다.

서양의 증권사들은 1980년대 후분부에 도쿄 증시가 과열되었다고 판단해 서서히 손을 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일본 증권사들은 궤변을 늘어 놓으며 기업과 개인투자자들을 끌어모았다. 최대증권사 노무라는 한번도 매도의견을 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노무라는 일본인들의 집단성을 활용해 자금을 유치해 증권시장에 밀어 넣었다.

니케이지수는 1989122938,957.44 포인트까지 올라 4만 포인트를 목전에 두었다. 19851월 이후 5년 사이에 무려 3.2배 올랐다. 그들은 이 주가가 계속 갈줄 알았다.

 


<참고자료>

Wikipedia, Louvre Accord

Wikipedia, Japanese asset price bubble

금융투기의 역사, 에드워드 챈슬러, 국일증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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