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버블붕괴④…잃어버린 10년
일본 버블붕괴④…잃어버린 10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1.28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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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행 금리인상으로 붕괴 촉발…금융시장 경색, 장기침체 시작

 

일본 거품 시기에 부동산 가격이 붕괴될 가능성은 1988년에 나타났다. 이 무렵 도쿄의 비우량 주택가격은 더 이상 오르지 않거나 소폭이나마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긴자와 같은 도심지역은 상승세를 이어나갔다.

이듬해 도쿄 상업지구 지가는 정체상태를 보였고, 주거지역은 한해전보다 4.2% 하락했다. 이 시기에도 도쿄 도심과 사이타마, 치바 현의 거래는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윗목이 식어가도 아랫목은 펄펄 끓고 있었다.

일본은행은 19895월에 재할인율을 0.5%P 올렸다. 그 영향은 미미했다. 그해 12월 일본은행 총재가 스미타 사토시(澄田智)에서 미에노 야스시(三重野康)로 교체되었다. 스미타는 대장성의 꼭두각시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는 단기금리를 올리려고 시도했지만 대장성의 요청을 받아들여 통화완화정책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미에노는 달랐다. 그는 주식을 한주도 갖지 않다고 자랑하면서 버블을 진정시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취임 직후 19891225일 전격적으로 재할인율을 인상했다.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도쿄 주식시장은 금리인상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고 니케이지수는 294만 포인트 직전(38,957.44)까지 치솟았다.

증권사들은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노무라 증권은 니케이지수가 1995년에 8만 포인트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가장 보수적인 전망을 내놓은 곳은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였는데, 1990년에 정점을 찍는다는 예상이었다.

 

일본 대장성(현재는 재무성) 본청 /위키피디아
일본 대장성(현재는 재무성) 본청 /위키피디아

 

하지만 1990년 새해가 밝으면서 도쿄 증시는 더 이상 오르지 못했다. 외국인들이 선물시장에서 매도포지션을 취했다.

일본은행의 금융긴축정책이 서서히 효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긴축정책은 시중에 풀려난 유동성을 회수하는 조치다. 미에노 총재는 부동산 가치가 20%까지 하락해야 한다며 강력한 통화환수조치를 밀어붙였다. 그는 19908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재할인율을 6%까지 끌어올렸다. 일본 장기국채 수익률이 7%대로 올라갔다. 주식시장의 투자가들이 돈을 빼 채권시장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은행의 대출증가세가 둔화되자 부동산 투기자들이 현금을 확보하기 어렵게 되었다. 부동산을 사기 위해 빌렸던 채무가 금리 부담에 짖눌리고 대출문턱이 높아지면서 한계사업자들은 부동산을 내놓게 되었다. 대출 규제로 신규수요가 줄어든 상태에서 매물이 나오면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도쿄 증시의 니케이지수는 가라앉았다. 199012월에 1,200 포인트 내려앉았다. 일상적인 조정 정도로 이해되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 후 3만대가 무너졌고, 그해 125일에 21,902 포인트까지 내려갔다. 한해에 무려 43%나 주저앉은 것이다.

대장성은 어떻게는 주가를 부양하려고 노력했다. 대장성은 마진론 대출한도를 담보주식의 30%에서 50%로 확대하고, 노무라, 다이와, 야마이치, 니코 등 4대 증권사에게 유상증자와 신주인수권부 사채를 발행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유도했다. 니케이지수가 2만대로 떨어지자 대장성은 주식을 매수하라고 지시했다. 보험회사의 주식매도를 중지시키고 유상증자 금지 기간도 연장했다. 연금과 우체국 예금도 동원해 주식매수에 나섰다.

하지만 대장성의 주가 부양정책은 실패했다. 주가는 계속 하락해 19928월에 14,338 포인트까지 떨어졌다. 정점에서 60% 하락한 것이다.

1992년까지 도시의 지가 하락폭은 1.7%에 불과했다. 그러나 6대 도시의 평균지가는 정점에서 15.5% 하락했다. 상업용지는 15.2%, 주거용지 17.9%, 산업용지는 13.1% 하락했다.

 

일본 재할인율 및 국채수익률 추이 /위키피디아
일본 재할인율 및 국채수익률 추이 /위키피디아

 

자산시장의 거품 붕괴는 디플레이션을 유발했다. 가격 하락이 예상되는 곳에는 소비와 투자가 위축된다. 모든 곳에서 방향이 바뀌었다. 소비자물가는 마이너스 영역에서 움직였고, 부동산과 주식가치 하락은 기업 경영을 어렵게 했다. 1990년대에 뉴욕 증시가 상승하면서 글로벌 투자자들은 도쿄에서 돈을 빼내 미국에 투자했다. 뉴욕증시와 도쿄증시의 시가총액이 역전했다.

 

기업 파산이 늘어났다. 기업들은 자산계정에서 적자가 나고, 부채가 증가했다. 버블 시절에 사두었던 자산은 적자를 보았다. 코스모월드가 산 캘리포니아의 페블비치 휴양지는 수익을 내지 못했다. 이 회사는 1992년에 3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보고 휴양지를 팔아버렸다. 뉴욕의 록펠러센터를 산 미쓰비시 부동산도 1996년에 골드만삭스를 중심으로 한 컨소시엄에 팔아야 했다. 국제적인 머니게임에서 일본의 큰손들이 양키 자본에게 쓴 맛을 보게 된 것이다.

 

뉴욕의 록펠러 센터 /위키피디아
뉴욕의 록펠러 센터 /위키피디아

 

금융스캔들이 빈발했다. 자산가치가 줄어들면서 기업과 금융회사들은 적자를 감추기 위해 회계부정을 저질렀고, 그런 행동은 사기사건으로 연결되었다.

증권회사들도 사기 혐의로 시달렸다. 1990년 노무라증권의 다부치 요시하라 회장은 기업들의 투금에 수익성을 보장해준다고 불법적으로 약속한 사실이 들어나 사임했다. ‘오사카의 흑녀로 불린 오노우에 누이가 불법 대출 혐의로 체포되고, 그 책임으로 일본산업은행 총재가 사임헀다. 오노우에 이외에도 수많은 투기자들이 파산했다. 프랑스 인상파화가 르누아르의 미술품을 매집하던 스와다 마사히코도 6억 달러 이상의 부채를 갚지 못해 부도를 냈다.

 

1992년말 도쿄의 부동산 가격은 정점에서 60% 이상 하락했다. 부동산에 과도한 대출금을 내줬던 은행들이 부도위기에 처했다. 금융시장은 유동성 함정에 빠졌고, 신용경색이 이어졌다. 19958월 예금인출(bank run) 사태가 일어났다. 600억 엔 규모의 예금이 도쿄신용조합과 코소모 신요은행에서 빠져나갔다. 곧이어 오사카신용조합과 고베의 효고은행에서 현금인출 사태가 일어났다. 정부가 긴급 구제에 나서 예금자의 자신을 대신 지급해 주었다.

금융위기는 1990년대말까지 이어졌다. 199710월 산요증권이 파산하고, 곧이어 호카이도 다쿠쇼쿠 은행이 문을 닫았고, 4대증권사의 하나인 야마이치증권도 파산선고를 했다.

 

일본 GDP 추이 /위키피디아
일본 GDP 추이 /위키피디아

 

일본 경제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 일본은행은 금리를 다시 인하하기 시작했다. 연속적인 인하로 1995년엔 재할인율이 0.5%대로 내려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2000년에는 제로금리로 떨어뜨렸다. 1998년에는 아시아 금융위가가 일본에 덥쳐왔다.

1991년부터 2003년까지 일본의 GDP 성장률은 평균 1.14%에 머물렀다. 2000~2010년 사이에는 1%를 이어나갔다. 일본에서는 버블 붕괴후 10년을 잃어버린 10’(われた十年)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기간은 20년이나 되었다.

 

잃어버린 10년 동안에 일본에 변화한 것의 하나는 오랫동안 일본 금융시장을 주무른 대장성(大蔵省)2001년에 재무성(財務省)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1200년동안 사용되었던 그 명칭을 변경함으로써 일본은 서양식으로 경제시스템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당시 명칭을 변경할 때 일부 오쿠라쇼란 이름에 정이 들었던 사람들이 반발했다고 한다. 하지만 변한 것은 그 뿐이었다. 아직도 일본 재무성은 금융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보이는 손의 힘을 작용하고 있다.

 


Wikipedia, 澄田智

Wikipedia, 三重野康

Wikipedia, Japanese asset price bubble

Wikipedia, Lost Decade (Japan)

금융튜기의 역사, 에드워드 챈슬러, 국일증권, 2001

광기, 패닉, 붕괴-금융위기의 역사, 굿모닝북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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