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고대왕국 맥국④…곳곳에 전설로 남아
사라진 고대왕국 맥국④…곳곳에 전설로 남아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05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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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시 신북읍 발산리를 왕궁터로 파악…태기왕 전설도

 

사서에는 맥국에 대한 기록이 드물지만, 춘천을 중심으로 강원도 영서지방에는 지명과 전설로 맥국의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

18세기 이후 제작된 춘천 고지도엔 맥국허(貊國墟)’, ‘고맥도(古貊都)’, ‘고맥성(古貊城)’, ‘맥국고성(貊國古城)’이라는 표기가 등장한다. 일부 지도엔 지금의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 산기슭에 동그라미를 그려넣고 맥국고도라고 표시하기도 했다.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와 우두동을 에 맥국의 전설이 집중되는 점으로 보아 춘천이 맥국의 중심지이고, 발산리가 맥국의 왕궁터로 파악된다.

신북읍 발산리는 좌측의 북한강 줄기와 우측의 소양강 줄기 사이에 위치한다. 두 물이 만나는 두물머리이고, 우두동은 두 강이 만나 형성된 퇴적층이 우두벌을 조성해 맥국의 치소(治所)로서 지리적 조건을 만들고 있다. 발산리에는 맥국터, 맥둑, 궐터, 왕대산(王臺山), 바리미(발산), 매봉(맥봉), 삼한골 등 맥국과 연관한 지명들이 남아있다.

우두(牛頭) 또는 우수(牛首)소머리를 뜻하며, 북한강 본류와 소양강이 합쳐지는 모습이 소머리 같다고 해서 지어진 명칭이며, 소양강의 명칭도 여기서 비롯됐다고 한다.

 

춘천 일대에 대한 유적지 조사가 본격화되면서 맥국에 대한 실체도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맥국 옛터로 알려진 소양강 유역 신북읍 일대와 우두동 일대의 충적지대엔 대규모 마을 유적이 발견됐으며, 화천·양구 일대에서도 청동기 또는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들이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맥국은 성읍국가 형태의 연맹체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우두산에 있는 토성은 청동기 말기 또는 초기 철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은 맥인들이 조성한 산성으로 추정된다.

 

태기산성의 흔적( /문화재청 발간 강원권 문화유산
태기산성의 흔적( /문화재청 발간 강원권 문화유산

 

맥국에 대한 전설은 춘천을 중심으로 횡성, 평창등 영서지방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우두산 맥국 전설:

조선 숙종때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쓴 단군신화 역사책인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쇠머리고장 우수주에 단군의 신하 팽오(彭吳)가 발산리 맥국에 길을 열었다고 적고 있다.

“4300년전 큰 홍수가 나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논반이 물에 잠기고 가축들도 잃게 됐다. 물이 골짜기와 들판에 가득찼는데, 산이 막아서서 물이 빠지지 않았다. 백성들이 산에 올라가 구원을 청했다.

이때 팽오가 단군왕검의 명을 받고 나가서 신통력과 용기로 물길을 뚫었다. 피난갔던 백승들이 돌아와 농토를 재건하고 정착해 안정을 되찾게 됐다. 맥국 사람들은 팽오를 기려 우두주에 통도비를 세웠다.“ (통도비가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없다. 전설일 뿐이다.)

유포리 아침못 전설

백두산의 천지가 춘천에 옮겨져 아침못(朝天池)와 바리산(鉢山)이 됐다. 발산은 작은 백두산이고, 아침못은 작은 천지이며, 버들개(柳浦里)는 궁전의 장소다.

) 용화산성 전설

맥국의 성지인 용화산(龍華山)의 산성은 맥국 백성과 군사들이 화천군 하남면 남천강의 강돌을 날라 쌓은 산성이다. 지금도 용화산 동북편 능선에 돌로 쌓은 성이 남아있다.

맥뚝 전설

외적이 마적산을 넘어왔지만, 맥뚝에서 지키다가 망했고, 지금은 논두렁이 됐다. 맥뚝은 신북읍 산천리에서 사북면 고탄리까지 이어졌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자취가 거의 허물어졌다.

삼악산 맥국 패퇴전설

맥국 군사들이 적의 침입을 받아 패퇴해 도읍(발산리)을 버리고, 남쪽의 삼악산성(三岳山城)으로 옮겼다. 적군은 삼악산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했다. 산세가 험준하고 산성이 견고했다. 맥의 군사들은 아래를 내려보면서 적에게 활을 쏘고 돌을 굴러 내렸다.

적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함락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꾀를 부렸다. 적은 말 안장을 뗀 빈말을 뛰어놀게 하고 늙고 쇠약한 군사들로 하여금 칼싸움 연습을 하는 것을 보여주어 힘없는 군사임을 믿어 방심하도록 했다.

적은 삼악산 맞은 편에 군사들이 바위위에 빨래를 널어놓고 서쪽에 군대를 매복해 놓았다. 맥군은 안심했고, 적은 그 틈을 타서 군사들을 이동시켜 북쪽 성벽에 사다리를 놓아 성으로 올라갔다. 서문 쪽에서는 방물장수 할머니를 보내 왕비가 좋아하는 패물을 구해왔다고 해서 성문을 열게 하고, 그틈을 타서 매복군을 투입시켰다.

적은 북쪽과 서쪽에서 쳐들어가 삼악산성을 완전히 점령했다. 맥국군사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채 패하고 말았다.

적의 군사들이 빨래를 널었던 곳이 지금 의암(衣岩)이며, 의암호의 지명이 이래서 생겼다.

 

태기산성 지형도 /문화재청 발간 강원권 문화유산
태기산성 지형도 /문화재청 발간 강원권 문화유산

 

태기산 전설

맥국의 마지막임금인 태기왕(泰岐王)이 춘천에서 적에게 쫓겨 태기산에 이르러 산성을 쌓고 병마를 양성했다. 태기왕은 삼형제(森炯濟) 장군에게 군사 3백명을 주고 삼형제봉에 진을 치게 하고, 호령(號令)장군에게 군사 5백명으로 호령봉에 진을 치게 해서 대관령을 넘어오는 예국의 침입에 대비했다.

드디어 동북쪽 진부면 도주골(지금 도사리)에서 예군이 쳐들어와 호령장군의 군대를 전멸시키고 태기산으로 진격해왔다. 이 소식을 들은 삼형제장군이 급히 군사를 이끌고 태기산성으로 달려갔지만, 산성은 함락됐다. 태기왕은 간신히 탈출해 피난했다. 태기왕은 피난도중 옥산대(玉散臺: 지금 안흥동)에서 옥새를 잃어버린채 옥류(玉留)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후 멸인(滅人: 지금의 면온)에서 사태를 관망했다. 그러나 이곳에 들이닥친 예군이 군사들을 모두 전멸시키고 왕만 홀로 탈출했다. 삼형제장군은 단신으로 왕을 모시고 백옥포(白玉浦)에서 투신해 최후를 마쳤다.

태기왕을 공격한 군대가 예국군대라는 설 이외에도 신라의 박혁거세의 군대라는 설도 있다.

태기왕 전설은 구체적인 인명과 지명이 나타나는게 특색이다. 이 전설은 태기산, 호령봉, 삼형제봉, 갑옷을 씻었다는 갑천(甲川), 옥새를 잃어버린 옥산대, 병사들이 전멸했다는 멸인(멸온), 왕이 죽었다는 백옥포, 왕이 도망치다 해가 저물었다는 무일리(무이리) 등의 지명으로 살아남아 있다. 춘천, 횡성, 평창등에서 전해지는 태기왕 전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전설로 치부하기 어렵고, 무엇인지 맥국과 관련한 큰 사건이 발생했음을 추정하게 된다.

가리왕산 전설:

평창군과 정선군 경계에 있는 가라왕산은 옛날 맥국 갈왕(葛王)이 피난해 성을 쌓고 머물렀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갈왕을 가리왕(加里王)이라고도 했다. 일제 때 일본을 의미하는 날 일()을 붙여 가리왕산(加里旺山)이라고 개명했는데, 갈왕산이라도 한다.

북쪽 골짜기엔 갈왕이 지었다는 대궐터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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