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철도사①…미국-일본 밀고 당긴 경인선
한반도 철도사①…미국-일본 밀고 당긴 경인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2.2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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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후 경인선 첫 건설…미국인 모스가 착공해 일본에 넘어가

 

우리 역사에 철도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조일수호조약이 체결된 18764, 일본을 방문한 수신사 김기수(金綺秀)였다. 그는 요코하마(橫濱)에서 신바시(新橋)까지 처음으로 기차를 타면서 화륜거(火輪車)라고 불렀다. 그는 저서 일동기유’(日東記游)에 기차를 처음 본 소감을 이렇게 기록했다.

차마다 모두 바퀴가 있어 앞차에 화륜이 한번 구르면 여러 차의 바퀴가 따라서 모두 구르게 되니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처럼 날뛰었다.”

김기수는 화륜거를 쇠당나귀라고 표현했다.

이어 1889년 미국주재 조선대리공사 이하영(李夏榮)이 귀국하면서 기관차와 객차, 화차등 철도모형을 가져와 철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철도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청나라의 권고로 조선의 외교고문으로 온 독일인 뮐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f)가 철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신문물에 대한 이해가 늦었고, 재정이 취약해 자체적으로 철도를 부설할 능력이 되지 못했다.

 

경인선 개통식 /위키백과
경인선 개통식 /위키백과

 

조선에 철도 건설이 본격화된 것은 청일전쟁(1894~1895) 전후다.

청일전쟁에 앞서 일본은 조선에 철도 부설권을 요구했다.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18946월 서울과 주요항구를 연결하는 철도부설권을 허용해줄 것을 요구했다. 다음달 일본 외생 무츠 무네미츠(陸奥宗光)는 다케우치 츠나(竹內綱)를 조선에 파견해 서울~인천, 서울~부산간 철도부설을 요청했다. 조선 정부는 일본의 이러한 요구를 거절했다.

결국 일본은 무력을 행사했다. 청일전쟁 발발직후인 18947월 일본군 2,000여명이 기습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했다. 일본군 총사령관은 일본의 대표적 군사전략가이자 초대총리를 역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였다. 야마가타는 부산에서 경성(서울)을 지나 의주에 이르는 철도건설의 중요성을 천황에 보고하고, 이 철도가 중국과 인도 등 동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대로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한 상태에서 그해 820일 조선 정부를 압박해 조일잠정합동(朝日暫定合同)을 체결하고 경부선과 경인선 철도 부설권을 획득한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동양의 패자 중국을 제압했다. 하지만 곧이어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에 의해 요동반도 영유권을 내주어야 했고, 국내에선 1895년 을미사변과 1896211일 아관파천을 거쳐 친러-친미 연합정권이 들어섰다. 한반도는 바야흐로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경인선 개통당시 객차 /위키백과
경인선 개통당시 객차 /위키백과

 

경인선은 일찍부터 미국이 관심을 가졌다. 제물포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외항이고, 대량수송의 수단이 필요했다. 미국은 188336월 민씨 일파인 민영목(閔泳穆)을 통해 제물포와 한강의 수심 측량을 허가받고, 18872월 뉴욕 조선영사 프레이저(E. Frazar)를 통해 김윤식에게 '전등 및 철도 신설계획의 요청' 공문을 보냈다.

여기에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라는 미국인이 등장한다. 그는 일본 요코하마(橫濱)에 체류하다 1891년 조선에 들어와 통정대부가 되고, 대판조선상무위원(大辦朝鮮常務委員)으로 뉴욕에 특파되었다. 미국에서 당시 주미참찬관(駐美參贊官) 이완용(李完用)을 만나 미국에서 자금을 조달해 한국에 철도를 부설하겠다고 설득시켰고, 귀국한 이완용은 철도 건설의 필요성을 건의해 고종의 허락을 받았다.

18913월 고종은 이완용과 이하영에 명해 모스와 철도건설을 협의케 했고, 모스는 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을 통해 경인선 부설권을 획득하려 했다. 마침내 조선 조정과 모스 사이에 경의선에 관한 철도창조조약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1894년 일본이 강압적으로 조선과 조일잠정합동조약을 체결하자 고종은 모스에게 이전의 계약을 번복했다. 이에 모스는 조선정부에 손해배상으로 은 1만 냥을 청구했다. 조선정부는 보상능력이 없었다.

이어 삼국간섭과 아관파천으로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에 1896329일 조선은 경인선 부설권과 운산(雲山) 금광채굴권을 모스에게 다시 넘겨줬다. 이렇게 해서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철도 특허권이 부여되었다.

 

대한제국기 경인철도 레일 /문화재청
대한제국기 경인철도 레일 /문화재청

 

모스는 1897년에 동료 W.타운센드와 회사를 설립하고 인천 우각리(牛角里)에서 기공식을 싣서 공사를 시작했다.

모스는 일본의 철도체계인 협궤식을 채택하지 않고 미국의 표준궤를 채택했다. 모스의 표준궤 채택은 우리나라 철도 궤간 선택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철도 궤간은 철도의 폭을 가리키는 것으로, 궤간이 결정되면 기관차와 열차, 객차는 여기에 맞는 기종을 운행해야 한다. 철도 부설에서 궤간을 어떻게 결정하는지에 따라 철도 수송능력 뿐 아니라 타국 철도와의 상호 연계성이 결정된다. 따라서 철도궤간은 국제정치적 역학관계를 반영한다. 러시아는 독일군에 점령당할 것에 대비해 광궤를 선택했고, 스페인도 프랑스와 독일과 다른 궤간을 선정했다.

열강들은 자신들의 철도궤간을 조선에 요구했다. 조선 정부는 1896717일에 철도국을 설치하고, 철도규칙을 제정했다. 당시 조선은 표준궤를 원칙으로 했다. 조선 정부는 중국이 표준궤를 채택했기 때문에 한반도 철도를 중국과 연계할 필요성이 있다는 이유로 표준궤를 선택했다.

그러자 러시아가 조선에 광궤를 요구해 조선 조정은 189611월에 철도규칙을 개정해 광궤를 채택했다. 이에 미국과 일본이 강력하게 반발했고, 조선은 다시 표준궤를 선언하게 된다.

이렇게 철도 궤폭을 두고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모스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을 착공하면서 표준궤를 선택했다. 이는 한반도 철도에 표준궤 선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한강철교(1900년 추정)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한강철교(1900년 추정)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모스는 미국으로 건너가 투자자금을 모았다. 일본이 모스의 자금조달을 방해했다. 조선이 정치적으로 혼란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모스는 미국에서 자금조달에 실패했다. 게다가 기술적인 문제도 겹쳤다.

결국 모스는 1898510일 경인선 철도를 1702,000(100만 달러)에 일본에 매각했다.

경인선을 인수한 일본은 1899423일 인천에서 다시 기공식을 했다. 공사는 급속히 진행되어 그 해 전반부에 이미 인천한강 간의 토목공사가 끝났고, 610일부터 궤도를 부설하기 시작해 19일 철도 건설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그해 918일 노량진~인천 간 약 33.8구간에서 임시 영업을 개시함으로써 우리나라 철도의 효시가 되었다.

이어 한강 북안에서 경성역까지 약 3의 공사가 19005월에 착수되어 75일 한강철교의 준공과 함께 완성되었고, 78일 경성역인천역 간의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때 건설된 한강철교는 경인선 공사 중 최대 난공사였는데, 홍수와 혹한으로 몇 차례 공사를 중단하며 270일만에 관공했다. 이렇게 해서 19001112일경성역 인근에서 경인선 전 구간의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올해로 경인선 개통 120주년을 맞는다.

 


<참고자료>

월간문화재사랑, 우리나라 철도 신호체계의 역사를 간직한 대한제국기 철도 통표

위키백과, 경인선

박종철, 한반도 철도부설과 제죽주의의 경쟁과 음모, 2008, 리북

이수석, 일본제국주의 정책과 철도건설의 역사. 2008, 리북

이철우, 일본의 철도부설과 한국민족주의의 저항, 2008, 리북

김지환, 부산에서 만주에 이르는 직행열차, 2014, 학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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