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고대왕국…신라와 전쟁한 포상팔국
사라진 고대왕국…신라와 전쟁한 포상팔국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06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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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연맹 소속 남해안 8개 소국, 해상권 확보와 식량 해결 위해 싸우다 항복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서기 3세기 초반에 남해안에 포상팔국(浦上八國)이 등장한다. 이름 그대로 해안 포구에 위치한 8개의 나라들이다. 대체로 가야연맹의 소국들로 파악된다.

포상팔국이란 존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조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등장하는 물계자전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내해이사금 14(서기 209) 가을 7,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모의하여 가라(加羅)를 침범하자, 가라의 왕자가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임금은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에게 명하여 6부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함께 모의하여 아라국(阿羅國)을 치니, 아라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 내음을 시켜 인근의 군 및 6부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여 마침내 여덟 나라의 병사를 물리쳤다. ……

그 뒤 3년이 지나 골포(骨浦), 칠포(柒浦), 고사포(古史浦) 등 세 나라 사람들이 갈화성(竭火城)을 공격하자, 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 구원하여 세 나라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

10대 내해왕(奈解王)이 즉위한 지 17년인 임진년(서기 212)에 보라국(保羅國)과 고자국(古自國)[지금의 고성(固城)이다.]과 사물국(史勿國)[지금의 사주(泗州).] 등 여덟 나라가 합세하여 신라의 변경을 침략해 왔다. 왕은 태자 내음(捺音)과 장군 일벌(一伐)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 막게 하니 여덟 나라가 모두 항복하였다. ……

내해왕 20년 을미(서기 215)에 골포국(骨浦國)[지금의 합포(合浦).] 등 세 나라 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갈화(竭火)[굴불(屈弗)인 듯한데, 지금의 울주(蔚州).]를 쳤다. 그러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하였다. (삼국유사 물계자전)

 

경남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 성산산성 성벽 모습. 가야시대 성터로 알려져 있다. /문화재청
경남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 성산산성 성벽 모습. 가야시대 성터로 알려져 있다. /문화재청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공통된 내용을 뽑아 전투를 요약하면 이렇다.

 

1차 공격은 경상남도 해안에 할거하던 8개의 나라가 참가했다. 이들 8국의 타깃은 경남 함안의 아라가야였다. 신라의 국경이 위협을 받았다. 신라는 8년전인 201년에 아라가야와 화친을 맺은데다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므로 신라가 병력을 보냈다. 중앙군(6)와 지방군(인근의 정복지)을 모두 모아 총력전을 폈다. 태자와 왕자를 군사령관으로 삼아 방어했다. 8국이 모두 항복했다. 포로로 잡은 6천명을 돌려 주었다.

2차 공격은 3개국이 참여했다. 5개국은 이미 신라에 복속했거나 참여하지 않았다. 이번 공격 대상은 경주 코밑에 있는 울산(갈화)이었다. 임금이 직접 참전해 3개국을 토벌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다소 시기에 혼선은 있지만, 3세기초인 것은 분명하다. 이 시기에 신라는 강원도 삼척(실직국)에서 부산 동래(거칠산국)까지는 정벌했지만, 경상북도 내륙 깊숙이까지는 진출하지 못한 시기였다.

따라서 현재 지명이 파악된 경남 고성, 사천, 창원 등지의 해상 소국들의 연합군의 위력은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전투에서 신라는 완전히 제압을 하지 못했고, 3~4년후 두 번째 전투에서야 완전히 제압하게 된다.

하지만 두차례의 전투로 포상팔국을 신라의 영토로 만들지는 못했다. 신라와 포상팔국 사이에 있는 김해가야(금관가야)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금관가야는 신라와 포상팔국간 전쟁이 벌어진지 320년 후인 법흥왕 19(532)에 신라에 나라를 들어바친다. 적어도 212년에서 532년 사이에 포상팔국은 신라의 영향권보다는 가야 연맹체의 이합집산에 노출되어 있었지 않았을까 한다. 4세기 이후 창원의 골포국은 탁순국, 고사포국은 고차국(古嵯國)으로 변화되었고, 칠포국은 인근의 아라가야에 복속되었을 것이란 추정도 있다.

 

포상팔국은 삼한 시기에 변한지역에 위치해 있었으며 바닷가와 접해 있었던 여덟 개 나라였다. 심국사기와 심국유사에는 디섯 니라만 획인되고 있다. 그나마 위치를 확정할수 있는 나라는 창원의 골포국, 사천의 사물국, 고성의 고사포국, 칠원의 칠포국이다. 보라국은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전라남도 나주라고 했다. 하지만 국사학자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질 않느냐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어쨌든 경상남도 중심으로 남해안 바닷가의 포구에서 해상활동을 하던 나라였을 것이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그러면 포상팔국과 신라는 왜 전쟁을 벌였을까.

대다수 학자들은 해상교역권 장악을 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포상팔국이 해안에 존재했고, 신라도 바닷가를 통해 남해안으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차 전투에서 8국은 왜 내륙의 소국인 함안의 아라가야를 공격했을까. 창원대 남재우 교수는 바닷가에는 농경지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농산물을 얻기 위해 아라가야를 공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성, 창원, 칠원 등이 함안을 에워 싸고 있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먹을 것을 찾아 공격한 것이라는 견해다.

고대의 전쟁은 영토를 확보하거나 약탈을 하거나, 모두 남의 재산을 빠앗기 위한 무력 행동이었다. 울산도 내륙으로 진출하는 길목이다.

포상팔국이 위치한 웅천만, 진해만, 진동만은 약간의 분지를 끼고 있지만 부족민들을 먹일 춘분한 식량을 생산할 농토를 확보하기 어려운 지형구조라고 한다. 결국은 넓은 분지를 형성하고 있는 함안이나 울산의 토지를 빼앗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포상팔국의 난은 식량을 찾아 나선 전쟁이라는 게 남재우 교수의 주장이다.

해상권 확보, 식량난 해소 두가지 모두가 이유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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