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로 인도 지배하고, 철도로 패망한 영국
철도로 인도 지배하고, 철도로 패망한 영국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06 14: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값싼 영국산 면직물, 철도로 대량 공급되며 인도 면직업 붕괴…사회적 계급차별도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1498년 인도에 도착한 이래, 근대 유럽 열강에겐 인도가 황금의 땅이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이 인도 소유권을 놓고 싸운 것은 그 땅이 그만큼 값진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인도에는 아프리카에서처럼 말라리아나 풍토병도 없었다. 하지만 초기 식민자들이 내륙으로 이동하는데 엄청난 장애에 부딪쳤다. 걸어서, 또는 말이나 동물을 이용해서 이동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물건을 대량으로 운송하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건기에는 마차로 짐을 싣고 갈수 있었지만, 우기에는 도로 통행이 불가능했다. 강들이 많았지만 갠지스강을 제외하곤 건기에 수량이 부족해 증기선을 움직이지 못했다. 힌두교에선 소를 신성시하기 때문에 운송 수단으로 이용하지 못했다. 마차를 이용해야 했는데, 50마일 이상 운송하지 못했다. 그 이상 운송하면 사료의 양이 운반할 짐보다 많이 실어야 했다. 봄베이로 면화를 실어나르면, 먼지가 묻어 더러워지거나 비에 젖어 거의 쓸모가 없었다. 고작해야 향료나 아편과 같은 가볍고 값 비싼 물건만 이동시켰다.

게다가 인도의 마을은 자급자족의 경제를 영위했고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거래에 필요한 물자 이동이 크게 필요치 않았다.

내륙으로의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에 19세기 중반까지 3세기 동안에 영국의 지배력이 미친 곳은 해안지역에 불과했다. 봄베이(현재의 뭄바이), 캘커타, 마드리스 등 항구를 중심으로 영토확장 전쟁을 벌였고, 내륙으로의 접근은 지리적 특성과 운송수단의 미미로 크게 제약을 받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해 준 것이 철도였다. 1840년대 영국에서 철도 건설 붐이 일었다. 영국인들은 인도에도 철도를 놓을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상주의자, 제국주의자, 자본가, 기업인, 언론인들이 인도에 철도를 놓자고 주장했다. 군사적인 목적도 있었고, 산업혁명으로 활력을 얻은 영국의 제조업을 육성시키기 위해서도 식민지 인도에 철도 건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열성적으로 인도 철도 프로젝트를 지지하고 후원한 세력이 영국 랭카셔에서 면직업을 하는 대기업 집단이었다. 그들은 인도의 대중에게 자신들이 만든 면직물을 팔고, 원료인 사오겠다는 목적을 노골화했다.

그동안 영국의 면화 주공급원은 미국이었다. 1846년 미국 면화산업은 대흉작이었다. 원료가 부족해지자 인도 면화 생산지에서 봄베이까지 철도를 놓자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1848년 랭카셔의 상인들은 봄베이에서 면화생산지까지의 철도를 놓는 것이 영국내 맨체스터와 리버풀까지의 철도를 연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09년 인도의 철도현황 /위키피디아
1909년 인도의 철도현황 /위키피디아

 

영국 자본이 투자된 두 개의 철도회사가 인도에 철도 건설에 착수했다. 1853~54년 봄베이와 캘커타 주위에 철도가 건설됐다. 이후 엄청난 영국 자본이 인도 철도건설에 투자됐다. 난공사는 영국 건설업과 철도산업이 해결했다. 식민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로, 철도회사들은 볍률 비용을 들이지 않았다. 땅도 무료였다. 값싼 노동력도 맘껏 이용할수 있었다. 한때 특정구간에 42,000명의 인도인이 공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1868년까지 건설된 인도 철도의 비용은 마일당 18.000 파운드였는데, 같은 기간에 영국의 철도비용은 마일당 62,000 파운드였다.

1870년 봄베이에서 캘커타를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됐다. 1873년에 출간한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봄베이 캘커타 구간을 횡단하는 내용이 나온다.

 

1872년에[ 이르면 인도는 총 5,000마일의 철도를 보유하게 됐고, 1922년이 되면 영국령 인도(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버마 포함)25,938마일의 철도가 깔렸다. 이는 인도 이외의 아시아 지역 철도보다 길었고, 아프리카의 네배, 일본과 비교해도 1인당 길이에서 더 길었다. 1947년 독립할 때, 인도는 미국, 캐나다, 러시아에 이어 세계서 네 번째로 긴 철도망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인도의 동쪽(캘커타)와 서쪽(뭄바이)가 철도로 연결됐고, 내륙의 농업지역도 그믈망처럼 철도로 연결됐다.

 

철도는 엄청난 운숭력을 과시했다. 당시 철도전문가의 분석에 따르면 짐꾼들이 하루에 25~30km 이동하면서 25~30kg의 짐을 날랐다. 이에 비해 철도는 한시간에 평균 20km를 가면서 50톤의 화물을 실었다. 기차가 짐꾼 13,300명이 나를 화물을 한번에 해치울수 있었다. 비가 와도 운행에 문제가 되지 않았고, 땅에서 나는 먼지도 묻지 않았다.

철도의 운송비용도 급격히 떨어졌다. 1830년대 초기 철도로 1톤을 1마일 실어나르는데 12센트의 비용이 들었지만, 1860년대엔 8센트, 1874년엔 2센트, 1990년엔 0.5센트로 급격히 하락했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하지만 철도는 인도인들에게 불행을 가져왔다.

철도 건설과 이에 따른 운송비 하락은 인도 산업화에 기여한 것이 아니라, 인도산업을 영국에 종속되도록 만들었다. 물레를 돌려 직물을 짜던 인도의 수공업 제품은 기계로 대량생산하는 영국산에 밀려 고사했다.

인도는 1차 농산물인 면화와 곡물과 공산품의 원료를 공급하고, 영국 공산품의 소비 시장으로 전락했다. 전통 수공업이 몰락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전통 기능공들이 도시로 밀려들었다. 인도인들은 값싼 임금을 받으며 가혹한 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1853년 칼 마르크스는 영국은 인도에 이중의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하나는 파괴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흥시키는 것이다고 설파했다. 마르크스는 , 오래된 아시아 사회를 지우고, 아시아에 서양 사회의 물질적 기초를 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의 면직업은 18세기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였다. 벵골지역에서 영국 관리를 한 헨리 파툴로(Henry Patullo)1772년 보고서에서 경쟁국에서 동질의 제품을 만들지 않는한, 인도의 면직물 수요는 결코 감소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영국이 인도를 탐했던 이유는 18세기 이전까지 인도의 산업이 다른 어떤 식민지보다 강력했고, 제품의 질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인도엔 면화 생산이 풍부했다. 그에 따른 전통 면직산업은 당시 세계서 최고의 제품을 생산했고, 인도는 최대 면직물 수출국이었다. 영국에선 인도산 수입 면직물이 최고 인기를 끌었다. 게다가 비단, 향료, 쌀도 면직물 다음가는 수출품이었다.

그러던 인도의 면직산업은 18세기말부터 꺾어지기 시작했다. 혹자, 특히 영국의 경쟁국인 네덜란드 출신 윌리엄 볼츠(William Bolts)는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인도 면직업을 죽이기 위해 면직업 종사자의 손가락을 잘랐다고 주장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인도 면직업이 무너진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철도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18세기 후반에 인도에 철도를 건설하면서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되던 값싼 영국산 면직물이 인도 내륙으로 대량 공급되었고, 가격에서 밀린 인도산이 퇴조한 것이다.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가 물레를 돌리는 모습.(1920년) /위키피디아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가 물레를 돌리는 모습.(1920년) /위키피디아

 

드디어 인도인들은 영국이 놓은 철도에 저항했다. 인도 독립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경제운동의 일환으로 영국산 직물 불매운동을 벌이면서 운동의 상징으로 구식 물레를 돌렸다.

철도는 인도의 사회제도도 바꾸어 놓았다. 철도 노동자는 인도인이었지만, 큰 역의 역장, 기관사, 관리직은 영국인이 차지했다. 철도회사는 영국인들만 탄 1등칸에선 적자 영업을 했고, 인도인이 타는 3등칸에서는 수익을 내서 보충했다. 역에는 1등칸에 탈 영국인을 위한 대합실과 별도의 숙녀 전용 대합실을 만들었고, 3등칸의 인도인들은 대합실도 제대로 없이 비바람을 맞아야 했다.

영국의 입장에서 철도는 인도를 지배하는 기념비라 할수 있다. 동시에 철도에서 소외된 인도인들 사이에선 민족주의가 불같이 일어났다. 간디는 베옷을 입고 염소젖을 마시며, 직접 물레를 돌려 실을 잣고 천을 짜면서 민중을 대변했다.

영국이 철도로 인도를 정복했고, 철도로 망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