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부활’에 잠재한 헨리 조지의 토지철학
톨스토이 ‘부활’에 잠재한 헨리 조지의 토지철학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0.12.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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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네흘류도프의 귀족지위와 토지 포기 과정에 조지주의 개념 삽입

 

레프 톨스토이의 마지막 소설 부활은 어떤 관점에서 줄거리를 이해하느냐에 따라 감상이 달라진다.

주인공 네흘류도프 공작이 카츄샤에 대한 연민의 과정으로 흐름의 줄거리를 잡을수 있고, 부정과 부패로 가득찬 러시아 사회의 모순을 헤쳐 나가는 과정으로 접근할수도 있다. 또다른 관점이 있다면 공작이란 높은 지위의 귀족이 신분적 혜택을 거부하는 과정으로 이해할수도 있다.

그는 기독교적 관점의 무정부주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교회와 법률, 정부가 대중을 옭아매고 있고, 그 틀을 해체해야 신의 왕국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를 공격하고 국가와 법률에 의해 보장되는 토지소유권을 부정했다.

토지 사유에 대한 톨스토이의 부정은 네흘류도프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를 포기하는 장면에서 부각된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에게 부여된 권리를 포기하고 사회제도와 싸운다. 죄가 없는 카츄샤를 구속한 법률제도, 귀족제도와 싸운다. 여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개입시켜 장편 소설의 드라마가 엮어진다.

 

톨스토이는 19세기 미국의 경제사상가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에게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소설 부활에서 여러차례 헨리 조지를 직접 거명했다.

막대한 사유 재산을 가진 자신의 지배력을 느끼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으나 대지주가 된 지금 젊은 시절 허버트 스펜서의 열광적인 숭배자로 정의는 개인의 토지 사유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회평형론의 원칙에 감복되었던 자신을 생각하니 불괘했던 것이다. 청년 시절 한때 결백성과 정열이 있었던 그는 토지는 사유 재산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내세웠을 뿐 아니라 대학에서 이에 관해 논문을 발표한 적도 있었고, 사실 실제로 토지 사유에 대한 신념을 직접 실천에 옮기고 싶어 토지의 일부를 농부들에게 나누어준 일도 있었다. …… 그후 오래 뒤에 읽은 헨리 조지의 논문 가운데서도 이 이론을 가장 잘 뒷받침해 주는 토지 사유의 부조리를 지적한 반발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이론에 도저히 반대할 수는 없었다.”  1)

 

레프 톨스토이(왼쪽)과 헨리 조지(오른쪽) /위키피디아
레프 톨스토이(왼쪽)과 헨리 조지(오른쪽) /위키피디아

 

톨스토이가 헨리 조지의 책을 읽은 것은 1885년이었다고 한다. 그는 1889년에 코네프스카야 스토리’(Konevskaya story)라는 제목으로 집필하기 시작했으나, 중단했다. 이 책이 부활의 초본이다. 그에게 부활집필을 자극한 것은 억압받는 두호보르 교도(Dukhobortsy)들을 돕기위해서였다. 두호보르교는 기독교 종파로 교회를 비판하고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거부해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톨스토이는 이 소식을 접하고 이들에 대한 폭력을 중지하고 이들의 캐나다 이민을 지원하기 위해 부활을 집필해 선금 12,000루블에 출판 계약을 맺어 그 돈을 그들의 이주비에 보탰다. 그는 71세가 되던 1899년에 부활의 집필을 마쳤다.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두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었던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토지 사유는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부친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약간의 토지를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집안식구들은 놀라워 했고, 친척들의 조소와 비난이 따랐다. 토지를 나눠 가진 농부들의 생활이 부유해지기는커녕 마을에다 술집을 세 군데나 세우고 이예 일을 않게 되어 오히려 더욱 가난해졌다고들 이야기했다. 2)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는 선이라고 믿는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악으로 보일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았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투쟁을 멈추고 술과 담배를 피우고 다시 타락했다.

 

법정에 선 카츄샤 (Leonid Pasternak) /위키피디아
법정에 선 카츄샤 (Leonid Pasternak) /위키피디아

 

어쩌면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카츄샤는 주인공이 아니다. 네흘류도프의 내부에서 동물적 자아가 지배하는 동안에 카츄샤는 네흘류도프가 자기만의 행복을 찾는 과정에 희생된 사람이다. 네흘류도프가 이성적 자아로 돌아왔을 때, 그는 카츄샤에 대한 도덕적 죄악을 씻기 위해 카츄샤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노력하고 결혼까지 생각하게 된다.

네흘류도프에게 부활은 무슨 의미일까. 왕족 다음의 고위 귀족인 공작이란 지위를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찾는 것이다. 귀족 지위를 포기하는 것은 토지를 내놓는 것이다. 토지는 농민을 옭아맨다. 토지를 내놓는다는 것은 농민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가 누리던 쾌락은 토지에서 발생한다. 귀족들은 일하지 않고 농민이 생산해 바친 소작료로 부를 형성하고 그 부로 쾌락을 추구한다. 한때 네흘류도프의 쾌락 상대가 카츄샤였다. 그가 카츄샤에 대한 죄악을 씻고자 재산을 포기한다.

 

네흘류도프는 농부들을 불러놓고 토지 사유에 대한 자기 의견을 들려 주었다.

내 생각에 토지란 매매할수 없는 것이요. 그 이유는 만일 토지를 팔수 있다면 돈 있는 사람들은 이를 모조리 사버릴 것이고, 만일 토지가 없는 사람들이 이를 이용하게 될 경우에는 그 권리로 자기가 받고 싶은 만큼의 액수를 얼마든지 받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오. …… 개인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려는 것이오.”

농부들은 네흘류도프가 비싼 값에 토지를 빌려주려고 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네흘류도프는 토지를 더 이상 소유하고 싶지가 않다고 잘라 말한다.

이 대목에서도 네흘류도프는 헨리 조지의 토지 이론을 설명했다.

토지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오. 하느님이 것을 뿐이오. …… 토지에 개인 소유란 없소. 누그든 토지에 대해서 똑같은 권리가 있는 거요.”

농민들 사이에 서로 좋은 토지를 갖고 싶어 설왕설래했다. 네흘류도프는 토지 분배 방식에 대해서도 헨리 조지의 방법을 소개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에게 지불해야 되는가? 이것을 정하기란 매우 어렵소. 더욱이 공동자금을 모을 필요성도 있으니 토지를 가질 사람들은 자기 토지 값만큼의 금액을 공동자금으로 지불하면 되는 것이오. 그렇게 하면 하나 차별이 없을 거요. 그러니까 좋은 토지를 소유하고 싶은 사람은 그보다 못한 토지보다 땅값을 더 지불하고 토지를 가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땅값을 내지 않으면 된다는 얘기요. 한마디로 토지를 쓰는 사람만이 공동자금으로 땅값을 낸다는 얘기요.”

네흘류도프의 땅을 부쳐 먹던 농부 중의 한 노인이 조지란 사람 현명한 모양이로군하고 말했다. 3)

이렇게 네흘류도프는 귀족에게 부여된 토지 특권을 포기하고 카츄사 무죄 입증과 석방을 위해 시베리아까지 따라간다.

 

톨스토이와 헨리 조지는 서로 서신을 교환했다. 서로 감사의 표시를 하며 존경과 존중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헨리 조지는 1879년에 자신의 토지이론을 담아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이란 책을 출간했는데, 그 책이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의 철학은 영국 사회주의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그의 사상을 조지주의(Georgism)라 칭한다.

 


1) 레프 톨스토이, 부활I, 박형규역, 민음사 P32~33

2) 레프 톨스토이, 부활I, 박형규역, 민음사 P87

3) 레프 톨스토이, 부활II, 박형규역, 민음사 P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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