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비에 굴복한 중국 최대 열차강도사건
토비에 굴복한 중국 최대 열차강도사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2.30 2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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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임성사건…토비들을 정규군에 편입, 보상금 지급 등 굴욕

 

192355일 자정 무렵, 중국 산둥성(山東省) 린청역(臨城驛) 근처를 지나던 열차에 토비(土匪)들이 덮쳤다. 그 열차는 미국에서 막 수입된 최신식 차종으로, 열차 외벽을 남색으로 칠해진 강철로 덮어 남강피(藍鋼皮)라고 했다. 외국인들은 이 열차를 불루 익스프레스’(Blue Express)라 부르며 최고급 열차로 긴주했다.

토비들은 진포철도(津浦鐵道)의 철로를 자르고 열차를 세웠다. 그들은 승객들에게 값진 물건을 내놓으라고 했다. 이를 거절한 한 영국인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이 열차에는 미국 상원의원의 딸 루시 올드리치(Lucy Aldrich)를 포함해 서양인 명사들도 타고 있었다. 인질의 아버지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은 당대 세계 최대부호 존 록펠러와 사돈 사이였다. 이 사건은 중국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토비들은 서양인의 진귀한 물품을 갈취했다. 어느 토비는 로션을 가르키며 먹는 것이냐 묻고, 피부에 바르는 것이란 얘기르 듣고 이내 버리고 말았다. 또다른 토비는 여성용 브레이지어를 빼앗아 허리띠로 여기고 차기도 했다고 한다.

 

임성사건을 보도한 당시 언론 /每日头条
임성사건을 보도한 당시 언론 /每日头条

 

열차강도사건의 수괴 손미요(孫美瑶)는 전직 군인이었다. 그의 형제는 후난성(湖南省)과 안후이성(安徽省) 일대를 지배하던 안후이군벌 장경요(張敬堯)의 휘하에서 정규군으로 편입되었다가 1920년 직예파(直隸派)와의 전쟁(安直戰爭) 전쟁에서 패배한 후 군대가 해산되면서 실업자가 되었다.

중국 군벌시대에 군대가 해산되면 토비가 되고, 토비가 다시 정규군화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군대와 토비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안후이 군벌 해산 이후 그의 형 손미주(孫美珠)를 사령관으로 하는 산동건국자치군을 형성하고, 손미요는 부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그들은 부호들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이를 진압하려는 북양정부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19227월 북양정부 군과 전투를 하던 중에 형 손미주가 사망하고, 아우 손미요가 24세의 나이로 총사령관이 되었다.

손미요는 1,500명의 토비를 이끌고 산둥(山東), 안후이(安徽), 허난(河南)의 경계지역인 포독고(抱犊崮)라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본거지로 삼아 북양정부 군과 대치했다. 19234월에 북양정부의 지휘를 반는 산동군(山東軍)이 손미요의 소굴을 포위하면서 양식과 물이 바닥나 궤멸의 위기에 처했다.

 

진포철도 구간 /김현민
진포철도 구간 /김현민

 

손미요의 토비집단은 탈로를 모색하는 대책회의를 열어 묘안을 찾아냈다. 그들의 계획은 인근을 지나는 진포철도의 열차를 습격해 외국인들을 납치하고 이들을 인질로 삼아 관군의 포위망을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진포철도는 상하이(上海)에서 난징(南京)을 거쳐 텐진(天津)으로 가는 중국 간선철도망으로, 상하이와 베이징을 오가는 외국인들이 주로 타는 철도였다.

그들이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 임성사건(臨城事件)이다.

 

토비들은 중국인 71, 외국인 39명을 납치했다. 손미요는 독일인 선교사에게 우리는 예전에 군인이었으나 해산된 이후 생계가 막막해 약탈로 연명하고 있는데, 이번에 외국인들을 납치한 것은 정부에 정규군으로 다시 편제시켜줄 것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돈을 탐하기 위해 저지른 행위가 아님을 강조했다.

베이징 정부는 인질구출 작전에 군대 15,000명을 투입했다.

손미요 일당은 포독고 산간지대로 인질들을 끌고 갔다. 곧이어 정부측 대표와 외국대사관측 대표와 협상이 벌어졌다. 토비들의 요구는 정부군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말 것, 토비들을 정규 관군으로 편성할 것, 1년치 식량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며, 정부군의 공격이 시작되면 인질들을 살해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대총통 여원홍(黎元洪)은 협상단에게 조속히 협상을 타결해 외국인들을 석방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여성 인질들은 협상이 진행된지 며칠만에 곧바로 석방되었다. 한달간 밀고 당기는 협상이 진행된 후에 612일 베이정 정부 미국인 고문 앤더슨(Roy Scott Anderson)이 보증하는 가운데 양측은 합의에 도달했다.

합의 내용은 3,000명의 토비들을 정규군으로 편입한다 손미요를 정규군화한 토비들의 여단장으로 임명한다 모든 토비들에게 1인당 20원을 지급한다 모든 인질들을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토비들의 완벽한 승리였다. 협상 타결후 토비들은 산동군 휘하로 당당하게 들어가 정규군이 되었다. 중국으로선 국제망신이었다.

 

임성사건의 주범들 /每日头条
임성사건의 주범들 /每日头条

 

임성사건의 타결은 토비들이 인질을 잡아 협상하면 돈도 받고 정규군이 된다는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 이 사건 이후 임성사건을 모방해 토비들이 창궐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해 526일 토비 무리가 경한철도(京漢鐵道)를 습격했지만 경비대에 격퇴당해 미수에 그친 사건이 벌어졌다. 8월엔 산둥성 101개 현 가운데 43개 현에서 토비들이 창궐해 정규군 편제를 요구했다. 1012일 뤼양(洛陽)발 쉬저우(徐州)행 열차가 토비에 의해 전복되어 약탈당해 129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1월에는 산둥성에서 토비가 프랑스신부와 선교사를 납치해 정규군에 넣어 달라고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113일에는 진포철도에서 다시 토비가 출몰해 부자 10명을 납치해 몸값을 요구하기도 했다.

 

19231010일에 취임한 조곤(曹錕) 대총통은 손미요등을 이대로 두었다가는 토비의 발호를 막을수 없다고 판단했다. 신임 대총통은 부하에게 손미요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정부군은 1219일 손미요와 그의 일당 11명을 유인해 살해했다. 손미요가 살해된 이후 정규군에 편입된 옛 토비들이 도주하자 중국 당국은 이들에게 죽이지 않는다는 증명서(免死證)을 주고 무기를 돈을 주고 회수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臨城事件(일본어판)

Wikipedia, Lincheng Outrage

Wikipedia, TianjinPukou railway

김지환, 세계를 놀라게 한 중국발 열차강도사건, 2014, 학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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