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④…지폐 남발로 무너진 몽골제국
인플레이션④…지폐 남발로 무너진 몽골제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1.0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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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을 지급보증수단으로 했으나, 후에 신화폐 발행, 통화증발로 무력화

 

몽골제국은 인류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다. 이 제국은 또한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지폐를 공용화폐로 사용했다. 그러나 몽골의 지폐남발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야기했고, 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중국에서 최초로 지폐를 사용한 나라는 여진족의 금()나라였다. 여진족은 동화(銅貨)를 기본통화로 했는데, 북송(北宋)을 멸망시키고 화북지방을 점령한 후 구리가 절대 부족해 1142년에 처음으로 지폐를 발행했다. 지폐의 보증수단은 비단이었다.

이어 금 4대 황제 해릉왕(海陵王. 재위 1150~1161)의 시기에 교초(交鈔)라는 지폐를 발행했다.

금나라는 은화를 동시에 발행했다. 금의 은화로는 승안보화(承安寶貨)와 무게를 달아 가격을 정하는 말발굽형 원보은(元寶銀)이 있다. 이와 별도로 동화도 발행했다.

 

금(金)나라의 말발굽형 칭량화폐인 원보은 /위키피디아
금(金)나라의 말발굽형 칭량화폐인 원보은 /위키피디아

 

금나라 지폐는 10종류였다. 작은 단위는 100, 200, 300, 500, 700 ()5가지가 있었고, 큰 단위는 1, 2, 3, 5, 10 () 짜리 5종류가 있었다. 지폐를 동화로 교환할 때 1관당 15문의 수수료를 지불했다.

금의 교초는 처음에 유통기간이 7년으로 정해진 어음 형태였으나, 1189년에 유통기한에 폐지되고 영구 통화가 되었다. 일종의 통화팽창을 시도한 것이다.

금나라가 수시로 남송(南宋)과 교전하고 북쪽의 몽골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지폐가 남발되었고, 말기에는 1,000관 짜리 지폐도 발행되었다. 1214년 무렵엔 심각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해, 화폐개혁 차원에 새로운 지폐인 보천(寶泉)을 발행했으나, 유통시장에서 거부되었다. 사람들은 지폐와 은을 교환하지 않았고, 과도한 지폐남발은 금나라 멸만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금나라는 1234년에 몽골에 멸망했다.

한편 남송시기에 쓰촨(四川) 지방에서 회자(會子)라는 지폐가 통용되었으나, 지역 통화로 국한되었다.

 

중국 진저우 한 공원의 야율초재 상 /위키피디아
중국 진저우 한 공원의 야율초재 상 /위키피디아

 

금나라에서 관료로 일했던 요()나라 출신 야율초재(耶律楚材)는 징기스칸의 눈에 들어 몽골에서도 재무담당 관료로 일했다. 야율초재는 금나라에서 사용하던 지폐를 활용할 것을 건의해 몽골 2대 황제 오고타이(태종) 시기인 1236년에 최초로 지폐 교초(交鈔)를 발행했다. 몽골이 지폐를 사용한 것은 금나라와 마찬가지로 구리가 모자라 동화를 주조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야율초재는 금에서 지폐유통이 실패한 것을 거울 삼아 발행량을 조절할 것을 건의했고, 몽골은 1만정()에 한정해 지폐를 발행했다. 이 물량은 50만관에 해당한다. 오고타이 시기엔 중앙정부가 발행하는 지폐와 지방의 몽골족, 한족 제후들이 별도로 지폐를 발행해 지폐가 통일되지 않았다.

몽골의 원()나라가 지폐를 통일한 것은 5대 황제 쿠빌라이(세조) 때였다. 12607, 쿠빌라이는 제로통행중통원보교초(諸路通行中統元寶交鈔) 73,000(365만관)을 발행해 전국적으로 유통했다. 이를 줄여 중통초(中統鈔)라 했다.

중통초는 은과 교환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에서 기준통화가 구리에서 은으로 전환된다. 교환비율은 중통보 2관이 은 1()이었다. 쿠빌라이 초기엔 금 왕조의 전철을 받지 않기 위해 지폐와 은의 철저한 교환비율을 지켰고, 지폐 발행액만큼 은을 확보했다. 아울러 원 조정은 구지폐의 유통을 금하고, 새 지폐로 교환토록 했다. 모든 세금은 중통초로 내도록 했고, 지폐를 거래하지 않거나 위조하는 자에겐 사형에 처하는 엄격한 제도를 만들었다.

중국의 전국적인 지폐 통용은 유럽과 미국보다 앞섰다. 미국에서 처음 지폐가 도입된 것은 1692, 프랑스에선 1712, 영국에선 나폴레옹 전쟁시기인 19세기초였다. 중국에선 원나라 시절인 13세기에 지폐 통용을 시도한 것이다.

원나라는 지폐 인쇄를 위해 수도 연경(燕京, 베이징)에 조폐창을 두었다.

 

중통초 /Guan Hanhui, Mao Jie
중통초 /Guan Hanhui, Mao Jie

 

1270년대에 접어들면서 쿠빌라이는 양쯔강 이남의 한족정권 남송을 공략했다. 1275, 원 조정은 남송의 회자를 중통초로 교환해주었다. 교환비율은 회자 50관에 중통초 1관이었다. 양쯔강 하류를 점령한 후 원나라는 남송의 동화 3관을 중통초 1관으로 교환해 주었다. 점령지의 통화를 원나라 지폐로 통일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윈난(雲南) 지방에선 조개화폐가 사용되었는데, 원 조정은 윈난의 조개통화 20수오를 1,5관의 중통초로 교환해 주며 산간 오지에도 지폐를 권장했다.

원조는 또 물가 안정을 위해 대규모 식량창고를 각 지역에 설치해 흉년과 풍년에 맞춰 식량수급을 조절했다. 쿠빌라이 초기에 이런 노력 덕분에 지폐는 안정적으로 유통되었다.

 

몽골 5대 황제 쿠빌라이 칸 /위키피디아
몽골 5대 황제 쿠빌라이 칸 /위키피디아

 

남송과의 전쟁이 격화하면서 원조정은 은화를 전비로 사용하게 되었다. 1276년에 원 조정이 보유한 은은 전쟁 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강제했는데, 이는 시중에 지폐와 교환해줄 은이 모자라게 되었음 의미한다. 보유 은이 감소함에 따라 신규지폐 발행을 줄일 수밖에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쿠빌라이는 1260년에서 1273년까지 수만 정의 지폐를 추가로 찍어 냈다.

이후 1274~1286년 사이에 원은 1,350만정의 지폐를 발행했다. 지폐가치가 하락하면서 원 조정은 은과 지폐의 교환비율을 고정시키는 법령을 제정하며 지폐의 안정을 유도했지만, 사람들은 은을 지폐와 교환하지 않았다.

결국 쿠빌라이는 시장의 압력에 굴복했다. 그는 1287년에 중통초를 평가절하한 지원통행보초(至元通行寶鈔, 지원초)를 발행했다. 조정은 중통초를 지원초와 51 교환비율로 회수했다. 그리곤 지원초 1관에 은 1()으로 고정시켰다. 중통초의 통화가치가 새 통화의 발행으로 60% 절하된 것이다.

 

원 조정의 씀씀이도 컸다. 황제는 황실과 지방 제후들에게 막대한 양의 하사금을 내려 통치자금으로 활용했다. 전쟁비용과 황제의 하사금은 지폐 발행을 확대시켰다. 쿠빌라이 말기인 1292, 원의 예산은 2978,305 ()이었는데, 그해 10월에 지출이 3638,543냥으로 66만냥의 결손이 발생했다.

1294년 쿠빌라이가 사망한후 후임 황제들의 정권유지비는 더 불어났다. 재정 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졌고, 그 공백은 지폐발행으로 메워졌다.

7대황제 시기인 1309년엔 신화폐 지대은초(至大銀鈔)를 발행해 구화폐와 또다시 51로 교환했다. 잠시 안정책이 취해지기도 했지만, 말기 들어 다시 통화절하 조치가 취해졌다. 1350년에 지정교초(至正交鈔)가 발행되어 앞서의 통화는 다시 51 교환비율로 회수되었다.

금 값을 기준으로 물가를 환산할 때, 원나라 말기인 1355년의 상품 가격은 초기에 비해 267배 올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폐의 단위 기준으로 쌀값은 250, 은은 400, 동화는 800배나 상승했다. 그만큼 지폐 값이 폭락한 것이다.

은이 부족한 상황에서 지폐를 남발하면서 원은 은 대신에 소금을 지불보증 수단으로 삼게 되었다. 결국 지폐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원나라는 1356년에 지폐(교초) 제도를 폐지했다. 그후 10년 조금 지나 1368년에 몽골 조정은 한족정권()에 쫓겨 몽골고원으로 도주했다.

 

중국 원나라 지폐인 至元寳鈔 인쇄 원판과 인쇄본 /위키피디아
중국 원나라 지폐인 至元寳鈔 인쇄 원판과 인쇄본 /위키피디아

 

원나라 교초는 뽕나무 껍질로 섬유 모양으로 만든 내피에 아교를 섞어 얇게 펴서 세로로 자르고, 동판화로 인쇄해 황제의 옥새를 날인해 발행되었다. 중통초는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용이나 동전의 도안, 액면가, 발행소, 발행소의 관리 이름, 제조소, 그리고 위조하는 자는 참살한다는 경고 문구가 인쇄되었다. 이러한 교초 제작 형식은 후세 국가의 지폐에도 영향을 끼쳤다. 중통초의 크기는 272×188mm, 지원교초의 크기는 300×222mm로 정해져 있었다.

원나라 지폐는 중세 유럽이나 이슬람 세계로부터 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3세기 말 베네치아 출신의 여행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피렌체 출신의 상인 프란체스코 발두치 페골로티(Francesco Balducci Pegolotti)1330년대 무렵에 편찬한 통상지남’(Practica della mercatura), 이슬람 여행가인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등에서 교초가 언급되었다.

이란 지방의 몽골 정권인 일 칸국에서도 1294년에 챠브()를 발행했는데, 이는 서아시아 최초의 지폐였다. 일 칸국의 지폐에는 한자도 인쇄되었다. 챠브는 제대로 정착하지 못해 발행 두달반에 회수되었다.

원 왕조가 멸망시킨 명() 왕조는 초기에 구리 부족으로 대명보초(大明宝鈔)라는 지폐를 발행했다. 그러나 명조는 보초를 국내용 통화로 정하고 동화를 교역용 화폐로 사용하다가 은본위제로 돌아서게 된다.

 


<참고자료>

Wikipedia(일본어판), 交鈔

Wikipedia, Jiaochao

Guan Hanhui, Mao Jie, The Silver Standard, Warfare and Inflation: The Mechanism of Paper Money in Yuan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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