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⑥…프랑스혁명 좌절시킨 지폐 남발
인플레이션⑥…프랑스혁명 좌절시킨 지폐 남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1.0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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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적자 메우려 아시냐 지폐 발행…하이퍼인플레이션 발생

 

프랑스 혁명은 왕정을 타도하고 부르죠아들이 권력을 쟁취한 시민혁명이다. 혁명은 절대군주의 재정낭비에서 촉발되어 재정위기로 끝났다. 권력 교체는 있었을지언정, 국민들의 삶은 개선되지 못했다. 혁명주체세력들의 미숙한 경제운용은 오히려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조장했다.

 

혁명의 발단은 루이 16세 치하의 재정위기였다. 1787년 왕실은 정부 공채에 대한 이자 지급을 잠정중단했다. 이어 1788년초 재무부가 신규공채를 발행가의 50%에 매각했는데도 필요한 금액을 조달하기 힘들었다. 정부의 디폴트가 예고되었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들이 공채를 기피했다. 결국은 공채발행을 취소했다. 왕실은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지폐를 발행할 것이란 포고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지폐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70여년 전인 1715년 스코틀랜드 출신 경제학자 존 로(John Law)의 건의로 지폐를 발행했다가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에 시달린 경험을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 지폐 발생계획은 취소되고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를 재무장관에 다시 기용했다. 네케르가 아무리 유능하다해도 이미 기울어진 재정난을 해결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은 세금을 더 부과해야 하는데, 루이 16세도 마지못해 네케르의 건의를 받아들여 삼부회를 소집한다고 발표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공장이 섰고 실업자가 파리시내에 득실했다. 농업은 대흉작으로, 프랑스 인구의 다수가 아사의 위협에 놓였다.

178955일 열린 삼부회가 열렸다. 삼부회는 1계급인 성직자, 2계급 귀족, 3계급인 부르죠아로 각기 원()을 구성하는 체제다. 국왕은 부르죠아의 반발을 왕당파로 간주되는 1계급과 2계급의 원으로 저지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삼부회가 열리자 자산가계급은 곧바로 저항했다. 그들은 성직자와 귀족에게 세금을 물리지 않는 불평등 법률에 불만을 품고 납세거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루이 16세는 혹 떼려다 오히려 혹을 하나 더 붙인 셈이 되었다.

 

1790년 발행된 아시냐 화폐 (500리브르) /위키피디아
1790년 발행된 아시냐 화폐 (500리브르) /위키피디아

 

그후 제3계급인 부르죠아들이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대표권을 행사하게 된다. 국고는 텅 비었다. 루이 16세는 네케르를 해임했다. 왕실은 곧 디폴트를 선언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714일 성난 군중은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하고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국민의회는 네케르를 다시 불러 재무장관에 앉혔다.

부르죠아들이 장악한 국민의회는 당면한 국가파산을 해결하기 위해 400만 리브르(livre)의 공채를 발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모금액은 200만 리브르에 그쳤다. 10월에 다시 재정이 고갈되었다. 의회는 모든 소득자의 소득에 25%를 과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군주의 세금을 깎으려던 의회가 오히려 증세를 하게 된 것이다.

의회는 왕실과 교회의 토지를 몰수해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로 했다. 의회는 몰수한 토지를 유동화하기 위해 지폐를 발행하기로 했는데, 이는 프랑스혁명기 아시냐(Assignat) 지폐의 기원이다.

아시냐 지폐는 연 5%의 금리를 제공하고 5년에 걸쳐 연차로 회수할 예정이었다. 아시냐는 처음에는 법화(legal tender)로 사용할 생각은 아니었고, 일종의 어음 성격을 띠었다.

178911월에 첫 발생된 아시냐는 4억 리브르였다. 이시냐는 발행과 동시에 매진되었고, 국민의회는 재정난의 급한 불은 끄게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재정위기는 완전하게 해소되었다. 다음해에 또다시 채무 만기가 돌아왔고, 세수가 세출에 크게 미흡했다. 의회에선 다시 이시냐 발행 논란이 불붙었다. 중농주의자들은 통화량 확대가 자본가를 위축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노동 욕구를 감퇴시킨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반대 목소리보다 지폐 추가발행에 대한 요구가 더 컸다. 네케르도 신규 지폐 발행에 반대했다. 그는 의회에서 모욕을 당하고 사직서를 내고 프랑스를 떠나 버렸다.

17909월 국민의회는 8억 리브르의 이시냐를 신규 발행했다. 이번에 발행한 아시냐는 이자가 붙지 않았고, 사실상 법화로 사용되었다. 순식간에 통화량이 50%나 늘어났다.

 

프랑스 정부채(10년물) 수익률 추이/Capitalist Exlpoits
프랑스 정부채(10년물) 수익률 추이/Capitalist Exlpoits

 

초기 지폐발행은 산업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우선 재정 적자를 보전함에 따라 공무원들에게 밀린 봉급을 줄수 있었고, 부채 원리금 상환도 지폐로 이뤄졌다. 인쇄기에 종이만 돌리면서 재정이 확 달라지게 된 것이다. 산업도 활성화되고 노동자들에게도 임금이 돌아갔다. 돈이 풀리면서 소비도 늘어났다. 농민들은 몰수한 교회 토지를 경작해 자영농이 되었다.

손 쉽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게 되면서 추가로 지폐를 찍어내자는 유혹이 생겨났다. 1791년 국민의회는 3차로 6억 리브르의 아시냐를 발행했다. 세수가 모자란 게 주요 이유였다.

하지만 통화 증발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투기가 조장되었다. 1791년 파리의 주식시장은 투기열풍에 휩싸였다. 부유한 귀족, 부르죠아는 물론 농민들도 주식에 투자했다. 아시냐 지폐가 은화와 같은 가격으로 교환되던 것이 10% 하락했다.

1791821일 루이 16세가 왕비와 가족과 함께 도주하려다 발각되어 돌아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왕 가족이 바렌(Varennes)이란 국경마을에서 우방국에서 보낸 지원병을 기다리던 중에 한 노동자가 마차 안에 지폐에 그려진 초상화와 동일한 얼굴을 알아보는 바람에 들통나고 만 것이다.

 

국왕 탈주 미수사건 이후 1791930일에 새로 선출된 입법의회는 중도온건파인 지롱드당과 좌파 자코뱅등으로 나눠졌다. 합스부르크와 프로이센, 영국, 벨기에의 침공가능성이 높아졌다.

지롱드당은 오스트리아와의 예방전쟁을 위해 3억 리브르의 아시냐 지폐를 추가 발행했다. 반혁명 왕당파들은 지폐를 은화로 바꾸어 해외로 도주했고, 지폐의 가치는 은화에 비해 현저하게 하락했다. 1791년말에 아시냐는 은화에 비해 77% 수준으로 떨어졌고, 생활물가는 15% 정도 상승했다. 전쟁이 임박한데다 물가급등 가능성이 보이면서 지폐를 은화로 바꾸려는 현상도 가속화되었다. 이듬해 초 아시냐는 은화의 47%로 떨어졌고, 빵값은 50% 상승했다.

17924월 입법의회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지롱드당 소속 의원들은 더 많은 지폐를 발행할 것을 주장했다. 그해 7월 입법의회는 7억 리브르의 이시냐 발행을 승인했고, 총발행액은 24억 리브르에 달했다.

 

아시냐의 가치(은화대비) /위키피디아
아시냐의 가치(은화대비) /위키피디아

 

반프랑스 동맹군과의 전쟁이 시작되고 17929월 국민공회가 구성되면서 자코뱅파가 집권했다. 국민공회는 허울만 남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듬해 17931월 루이 16세는 기요틴에서 처형되었고, 그해말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이 공포의 시대에 로베스피에르의 국민공회는 지폐를 남발했다. 1793년 한해에 그동안 찍어낸 것보다 많은 30억 리브르의 지폐를 발행했다. 프랑스군은 벨기에를 점령하면서 그곳의 주화를 약탈해 안정책을 취하려 했으나, 벨기에인들은 주화를 감췄고 프랑스 지폐로 곡물을 교환하지 않았다.

물가는 고공행진했다. 1793년 빵값은 1790년에 비해 두 배로, 육류는 세 배로 치솟았고, 지폐의 가치는 은화의 30%로 떨어졌다. 파리 시민들은 의사당에 난입해 약탈을 벌이기도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가격통제에 나섰다. 농민들은 밀을 은닉하거나 암시장에서 거래했다. 곡물 이외의 상품도 통제될 것이란 소문에 모든 물가가 상승했다. 양초 가격은 혁명 이전에 13(sou)에서 1793년에 44수로, 달걀은 10수에서 50수로, 양모 1마는 20수에서 65수로 올랐다. 1793년 국민공회는 40개 품목에 대한 가격 통제를 입법했다. 아울러 지폐를 받기를 거부하는 자는 감옥에 보내고 3범 이상의 경우에는 사형에 처하는 법도 통과되었다. 기요틴으로 물가를 통제하려 한 것이다.

1793년말 현재 유통되는 이시냐는 40억 리브르였는데, 1794년엔 40억 리브르가 추가로 발행되어 80억 리브르에 이르렀다.

17947월 로베스피에르는 테르미도르파의 반격으로 실각하고 기요틴에서 처형되었다. 그 결과는 억압적인 가격통제를 해제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시냐 지폐는 그후에도 지속적으로 하락해 17951월 은화의 22%로 떨어졌고, 2월엔 17%, 37.5%, 83%, 120.125%로 하락했다. 지폐는 더 이상 구매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경제사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1790년 기준으로 생활필수품 상승률은 17954월에 9, 0월에 31, 12월에 129배 올랐고, 이듬해인 17963월엔 388배나 올랐다. 1795년 하반기엔 기초상품의 가격이 하루에 두배나 뛰었다. 빵가게는 품절이 되었고, 농부들은 농산물 출하를 거부했다. 너무 오래 저장한 곡물은 썩어들어 갔는데, 그나마 시장에 나오면 극빈층들은 사갔다.

정부는 군대와 공무원 봉급을 현물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현되지 못했고, 국민공회 의원들은 자신의 봉급을 치즈로 가져갔다.

 

이시냐 지폐를 폐기한 후 등장한 망다 지폐(100프랑) /위키피디아
이시냐 지폐를 폐기한 후 등장한 망다 지폐(100프랑) /위키피디아

 

179512월 입법부는 이시냐 추가발행을 금지했다. 그때까지 지폐 통화량은 400억 리브르에 달했다. 179625명의 총재정부는 이시냐 지폐를 폐기하고 301의 교환비율로 새 지폐 망다(Mandat)를 발행했다.

프랑스 혁명기의 통화팽창은 결국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허용하는 조건을 형성했다. 179911월 나폴레옹은 입법부를 해산하고 금속화폐제도를 다시 확립한다고 공포했다. 나폴레옹은 윤전기 작동을 중지시키고 화폐량의 적정 수준을 유지했다. 재정 질서는 회복되었고, 인플레이션은 마침내 사라졌다.

 


<참고자료>

Wikipedia, Assignat

Wikipedia, French Revolution

Wikipedia, Mandats territoriaux

맥스 샤피로, 인플레로 돈버는 사람들, 1991, 도서출판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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