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석우로와 일본 신공황후를 꿰는 미스터리
신라 석우로와 일본 신공황후를 꿰는 미스터리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07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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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국 사신에게 죽임 당한 신라 장군…신공황후 신화는 석우로 전설 왜곡?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석우로(昔于老)는 신라의 용맹한 장군이자 아주 불행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신라 10대 내해(奈解) 이사금의 아들로, 차기 임금이 될 태자였다. 그의 공적은 삼국사기에 자세하게 나온다.

 

내해 14(209),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포상팔국)(아라)가라를 침범하자, 임금은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에게 명하여 6부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게 했다.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조분 2(231), 이찬 우로(于老)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해 격파하고, 그 땅을 군()으로 삼았다.

조분 4(233),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沙道)에서 싸웠다.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배를 불태우니, 적들이 물에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

조분 15(244), 이찬 우로를 서불한(舒弗邯)으로 삼고 병마의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조분 16(245),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침입했다. 우로가 병사를 이끌고 나가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馬頭柵)을 지켰다. 그날 밤은 매우 추웠는데, 우로가 병졸들을 위로하고 몸소 나무로 불을 지펴 따뜻하게 해주니 모두 마음속으로 감격했다.

첨해왕 초기, 예전부터 우리(신라)에게 속해 있던 사량벌국(沙梁伐國)이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에 붙으니, 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여 멸망시켰다.

 

이런 기록들만 보면 석우로는 부왕인 내해이사금 대부터 조분, 첨해왕 때까지 3대에 걸쳐 나라의 군권을 쥐고 서불한이라는 재상의 자리에서 석씨 왕조를 보위하는 중심인물이었다. 남해안 포구에서 활동하던 가야연맹 소속 여덟 나라를 굴복시키고, 감문국(경북 김천)과 사량벌국(경북 상주)을 토벌하고, 신라를 침공한 고구려와 왜()를 격퇴한 장군이다.

그러던 이 용맹무쌍한 장수가 농담 한마디에 죽임을 당했다. 그의 죽은 해도 명확치 않다. 신라본기에는 첨해 3(249)이라고 했고, 열전 석우로전에서는 첨해 7(253)이라 했다.

 

경북 상주시 사벌면 화달리 산44-1에 있는 (전)사벌왕릉. 신라 첨해이사금 때 우로(于老)가 사량벌국을 토벌해 사벌주를 설치했다. 시도기념물 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
경북 상주시 사벌면 화달리 산44-1에 있는 (전)사벌왕릉. 신라 첨해이사금 때 우로(于老)가 사량벌국을 토벌해 사벌주를 설치했다. 시도기념물 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

 

삼국사기 열전에는 석우로의 죽음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분왕(助賁王) 7년 계유(서기 253)에 왜국(倭國)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객관()에 있을 때 우로(于老)가 그를 접대하며 농담으로 말했다.

조만간 당신네 국왕을 염전의 노비로 만들고, 왕비는 부엌데기로 만들 것이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공격하자, 대왕이 궁궐을 나가 유촌(柚村)에 기거하게 되었다. 우로가 아뢰었다.

지금의 환란은 제가 말을 삼가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마침내 왜군에게 가서 말했다.

전에 한 말은 농담일 뿐이었는데 어찌 군대를 일으켜 이 지경까지 이를 것을 생각하였겠느냐?”

왜인이 대답을 하지 않고 그를 붙잡아 장작더미 위에 얹어 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가버렸다.“

 

정리해보자. 석우로는 왜국 사신에게 자신의 용맹함을 과장해서 농담을 했다. 일본 사신이 본국에 돌아가 그 농담을 일러주었다. 이에 일본 왕이 분노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침공했고, 첨해 임금은 유촌(영덕 또는 울진)이란 먼 곳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우로는 스스로 책임을 지고 일본 장수에게 찾아가 사과했지만, 일본장수는 그를 붙잡아 태워 죽였다.

 

우로가 아무리 원수지간이지만 왜국 사신에게 당신네 나라 국왕을 붙잡아 염전 노비로 만들고, 왕비를 부엌데기로 삼겠다고 한 것은 외교적 발언으로는 분명한 실수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도 한마디 했다. 그는 사관으로써 말 한 마디를 잘못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불러들였을 뿐만 아니라 두 나라 사이에 전쟁까지 일으킨 것은 올바른 길은 아니었다고 논평했다.

여기서 궁금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왜국이 쳐들어 왔는데, 임금은 국력을 총동원해 맞서 싸울 생각을 않고, 모든 책임을 우로의 탓으로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 우로가 군사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의 몸으로 왜국 장수에게 해명하러 가도록, 임금이 방치한 게 아닐까. 임금은 왜국 병사들이 우로를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는데도 응징을 하지 않고 순순히 귀국하도록 내버려 둔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 석씨왕조 족보 /위키피디아
신라 석씨왕조 족보 /위키피디아

 

이런 의문에 대해 역사서는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다만 첨해 임금과 우로의 족보를 보면 납득이 된다.

석우로는 부왕 내해 임금이 재위할 때 차기 임금 1순위인 태자였다. 삼국사기 내해이사금조에 태자 우로란 표현이 있다. 하지만 부왕이 죽고 그는 임금이 되지 못했다. 조분(助賁)이 이사금 자리에 오른다.

석씨 왕조를 다시 열게 된 9대 벌휴 임금은 태자 골정(骨正)과 둘째 아들 이매(伊買)를 두었는데, 두 아들 모두 먼저 죽었다. 벌휴가 죽고 이매의 아들 내해가 10대 임금이 된다. 그러자 장자 계열의 골정계가 이매계에 대항하게 된다.

우로의 아버지인 내해 임금이 죽고 11대 임금에 골정계인 조분이 올라선다. 조분의 어머니 옥모부인(玉帽夫人)은 김씨 세력의 대부격인 구도(仇道)의 딸이다. 우로는 김씨 세력을 등에 업은 조분에 의해 이사금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조분 이사금은 우로를 내치지 못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군권과 지지도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재상격인 서불한(舒弗邯)으로 삼고 군권(병마의 일)도 맡겼다.

그 다음 임금 자리도 조분의 친동생 첨해(沾解)에게 넘어갔다. 첨해에게 우로는 눈에 가시였을 것이다.

첨해는 임금 자리에 오른지 이듬해에 이찬 장훤(長萱)을 서불한으로 삼는다. 우로가 맡고 있던 재상 자리를 무력화한 것이다.

그 다음해 (신라본기 기준으로 첨해 3) “왜인이 우로(于老)를 죽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첨해의 입장에서는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의 사태가 아니었을까.

 

우로가 죽은후 그의 부인이 원수를 갚는 장면도 흥미롭다. 우로의 부인은 명원부인(命元夫人)인데 조분왕(助賁王)의 딸이다.

삼국사기 열전 석우로전에는 그 얘기를 전한다.

 

미추왕(味鄒王) 때 왜국 대신이 와서 예방하였는데, 우로의 처가 국왕에게 청하여 왜국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하게 되었다. 그가 흠뻑 술에 취하였을 때, 그녀가 장사(壯士)를 시켜 뜰에 끌어내려 불태워서 지난날의 원수를 갚았다. 왜인들이 분개하여 몰려와 금성을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여인의 복수극이다. 여기서도 의문점이 남는다. 미추왕은 어찌하여 남편을 죽인 왜국 사신을 접대하겠다는 우로 부인의 청을 불허하지 않았을까. 임금이 공주의 신분인데다 재상의 부인으로 하여금 일본 사신을 접대케 허용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추 임금은 조분왕의 사위로, 석씨 골정계를 지원한 김씨 구도의 아들이다. 골정계와 손잡은 김씨가 임금 자리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미추는 골정계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로의 부인이 무리한 청을 넣었는데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미추의 입장에서 그녀가 죽어도 무방하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우로 부인의 북수는 성공한다. 그 다음 왜국은 신라를 침공하는데 신라가 이를 물리친다.

 

우로 부인의 복수극과 비슷한 얘기는 일본서기에도 나온다. 이른바 삼한을 정벌했다는 신공황후(神功皇后) 편 속설로 등장한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신라왕을 포로로 한 뒤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신라에 있는 일본의 使()로 하고 돌아 갔다.

그 후에 신라왕의 처는 남편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을 모르고, 혼자서 를 유혹할 생각을 가졌다. 를 꾀어서, “그대는 왕의 시신을 묻은 곳을 알려주면, 마땅히 후하게 보답하겠다. 또 그대의 처가 되겠다라고 말하였다.

는 꼬이는 말을 믿고, 가만히 시신이 묻혀 있는 곳을 말하였다. 왕의 처와 국인(國人)이 공모하여 를 죽였다. 왕의 시신을 꺼내서 다른 곳에 묻었다.

천황이 이를 듣고 심히 노하여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를 멸망시키려 하였다. 군신은 바다에 가득하여 건너갔다.“

 

일본서기 같은 장에 소개된 또다른 속설에 신라왕의 이름을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이라고 소개했다. ‘우로 서불한과 음()이 비슷하지 않은가.

신공황후의 섭정기간은 서기 201년부터 269년까지다. 석우로는 언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역사서에 첫 등장한 해는 209년이고, 죽은 해는 253년이다. 일본서기에 서술된 신공황후의 기간과 석우로가 활약한 시기가 비슷하다.

일본서기는 신공황후가 삼한을 두 번 정벌하면서 신라왕의 항복을 받고 박제와 고구려의 조공을 받게 된다고 서술한다. 우리 역사학계는 신공황후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다.

각설하고, 일본서기 신공황후 편에서 몇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일본서기의 저자들은 신공황후의 삼한정벌론을 전개하면서, 왜 석우로전과 비슷한 속설 두가지를 별도로 소개했을까. 그들 스스로 역사를 왜곡했음을 인정하면서 사실에 접근하는 얘기를 버리지 못했던 것 아닐까.

일본서기의 스토리를 나름 해석해보자. 왜국은 석우로를 신라왕으로 표현했다. 그를 죽인 사실은 삼국사기에도 적혀 있다. 일본서기가 전하는 그의 부인 얘기도 신라 땅에서 전해지는 전설과 비슷하다. 다만 자기네 입맛에 맞게 스토리를 바꿨을 뿐이다.

종합하면 신공황후 섭정 시절에 왜국이 신라를 침공한 것은 사실인데, 신라왕의 항복을 받은게 아니라 석씨 왕가의 일파를 죽이고 돌아간 것이다. 그가 석우로일 가능성이 높다. 이 사실을 일본서기는 과대포장하고 왜곡한 것이 아닐까.

김씨 세력의 미추왕이 죽은후 다시 석씨 왕조로 이어지는데, 14대 유례, 15대 기림 임금이 골정계다. 우로의 아들 흘해(訖解)는 마침내 16대 임금이 되어 아버지의 한을 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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