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인플레①…비싼 댓가 치른 볼셰비키 혁명
현대 인플레①…비싼 댓가 치른 볼셰비키 혁명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1.12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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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오판에 공산혁명 초기 하이퍼인플레이션 발생…농민 저항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돈을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자본가를 몰락시키고 조용히 그들의 재산을 몰수할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917년말, 볼셰비키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 자신의 생각을 현실에 적용했다. 지폐를 남발해 자본가의 돈을 무용지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레닌은 가장 먼저 은행을 접수했다. 그는 은행이 자본주의의 핵심이고, 자본가가 은행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한다고 믿었다. 레닌은 국영은행을 인민은행(People's Bank)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불환지폐를 발행할 권리를 줬다.

초기 볼셰비키는 교조적이었다. 그들은 전세계에 한번도 적용해보지 않은 공산주의 이론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혁명정부는 은행에 이어 산업 국유화에 착수했다. 대기업부터 차례로 소유권을 뺏으며 1인 기업까지 인민위원회가 접수했다. 볼셰비키 정권은 자본가의 재산을 뺏는데 성공했지만, 공장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선출한 대표는 공장 경영에 무능했고 생산이 마비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볼셰비키 혁명 초기의 2억5,000만 루블 지폐 /위키피디아
볼셰비키 혁명 초기의 2억5,000만 루블 지폐 /위키피디아

 

1918년 여름부터 반혁명 백군이 조직되어 모스크바를 압박하고 서방국가들이 침공하면서 전 제조업은 군수물자 생산에 주력하게 되었다. 인민들에게 필요한 생활물자는 바닥이 났다. 재정은 이미 차르 시대부터 바닥이 났고, 내전 와중에 전쟁비용은 치솟았다.

볼셰비키는 인쇄기를 가동해 돈을 찍어 냈다. 레닌이 바라던 바였다. 혁명전인 1916년 통화발행량은 35억 루블이었는데, 혁명이 터진 1917년에 164억 루블, 1918년에 335억 루블로 부풀었다. 영국화폐 1파운드와 루블의 교환비율은 19181분기에 45에서 그해말 150로 치솟았다. 러시아 화폐 루블의 가치가 폭락한 것이다.

 

볼셰비키 정권은 민간인의 상업적 거래도 차단했다. 자본가 계급이 상업거래를 통해 이윤을 챙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화폐가치가 떨어지고 상업거래가 막히면서 소비에트 사회는 물물교환의 시대로 되돌아 갔다.

물가가 상승하고 지폐가치가 떨어지자 농민들은 곡식을 내놓지 않았다.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가 반군 세력권으로 넘어가고, 또다른 식량공급원이었던 폴란드는 독립했다. 모스크바를 비롯해 도시에는 식량이 공급되지 않았다. 도시민들은 기아선상에 몰렸다.

공장 근로자들은 봉급을 받지 못하고 현물로 배급되었다. 대다수의 공장은 멈춰 섰고, 대량의 실직자가 발행했다. 소련 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의 공업생산량은 혁명전의 생산량에 비해 85%나 감축되었다.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공장이 제대로 없었고, 어쩌다 돌아가는 공장은 군수공장 뿐이었다.

 

1921년 페트로그라드의 복권 광고. 한 장에 200억 루블이다. /위키피디아
1921년 페트로그라드의 복권 광고. 한 장에 200억 루블이다. /위키피디아

 

19186월 레닌은 백군과의 내전과 외국군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비상경제체제에 돌입했다. 후에 이를 전시공산주의(war communism)라고 이름을 붙였다.

전시공산주의는 전쟁을 이유로 개인 재산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볼셰비키는 농가로 들어가 곡물을 징발했다. 곡물 징발을 거부하거나 감추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극단적인 공포 분위기에도 상당수의 농민들은 농작물을 파기하거나 아주 깊숙한 지하에 감추어 버렸다. 일부 농산물은 썩어 들어갔다.

인플레이션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에게 이익이 되지 못했다. 일부 귀족과 부르죠아지는 숨겨둔 재화로 빈곤의 시대를 버틸수 있었다. 오히려 가진 자의 재화는 엄청난 이득을 보는 역효과도 발생했다.

 

새 가격의 우표 (1922) /위키피디아
새 가격의 우표 (1922) /위키피디아

 

그런데도 볼셰비키는 19195월 인민은행에 지폐를 더 많이 찍어내라고 명령했다. 지폐는 무한정 발행되었다. 볼셰비키는 그나마 중앙은행 역할을 하던 인민은행마저 폐지하고 공산당이 직접 인민통화위원회(Narkomfin)를 구성해 지폐를 찍어냈다.

1919년부터 루블 지폐는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1919년 지폐 발행량은 1,642억 루블, 1920년엔 9,436억 루블, 1921년엔 163753억 루블, 1922년엔 1,9769,000억 루블, 1923년엔 무려 176,5055,000억 루블을 찍어냈다. 영국돈 1파운드당 루블 환율은 1919년말 3,000에서 1922년말 7,173, 1823년말 504,000만으로 수직상승했다.

지폐를 찍어내는 인쇄공장은 풀가동되었다. 공산정권은 차르 시대에 보관하던 금과 은으로 해외에서 팔아 잉크와 종이를 샀다. 인쇄기 공장은 1919년말 무려 14,000명의 근로자를 고용했다. 당시 유일하게 풀가동된 산업이 조폐창이었다고 한다.

상품의 가격 표시는 매일 바뀌어야 했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해 우표를 찍어 놓으면 가격이 변동해 쓸수 없게 되었다. 우표 위에 새 가격을 덧씌워 사용하기도 했다. 로또 한 장 가격이 200억 루블에 달했다.

 

레닌은 자본주의 질서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이론의 토대가 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누구를 위한 공산주의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다.

1921년초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정책이 경제를 붕괴시키고 농민반란을 확산시켰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가진 것을 빼앗을 때 저항이 엄청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그들은 교조적 공산주의 이론이 바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공산주의로 가는 도중에 과도적 단계가 필요하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찾아 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가 1921년 채택된 신경제정책(NEP, New Economic Policy)이다. 누군가는 NEP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평가했지만, 소련 공산주의는 그후 일보도 전진하지 못했다.

레닌은 더 이상 농민들에게 농산물을 수탈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세금 형태로 곡물을 걷고 부족분은 사는 방식을 채택했다. 공장 노동자들에게도 현물로 봉급을 주던 것을 화폐로 주는 방식을 채택한다.

 

1922년 발행된 체르보네츠. 금으로 태환되는 지폐였다. /위키피디아
1922년 발행된 체르보네츠. 금으로 태환되는 지폐였다. /위키피디아

 

그리고 화폐개혁(denomination)을 단행했다. 화폐개혁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192211일 통화단위를 1만대1로 절하했고, 19231월엔 1001, 19243월에 5만대1로 절하했다.

1922년에 중앙은행(Gosbank)을 설립해 과거 차르 체제의 금본위제도로 복귀했다. 레닌은 부르죠아 은행가 나콜라스 쿠틀러(Nicholas Kutler)를 영입해 중앙은행을 관리토록 했다. 소련 공산당은 금으로 태환하는 새 은행권으로 체르보네츠(Chervonets)라는 발행했다.

이로써 소비에트 초기에 7년에 걸친 하이퍼인플레이션은 가까스로 잡히게 되었다. 이때 굶주린 사람 1,300만명이 후에 조기사망하는 결과를 빚었다. 당시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러시아는 공산주의 실험을 했다.

 


<참고자료>

Mark Harrison, Russia’'s Home Front, 1914-1922: The Economy

Steven M. Efremov, The Role of Inflation in Soviet History: Prices, Living Standards, and Political Change

Wikipedia, Inflationism

Wikipedia, Hyperinflation in early Soviet Russia

Wikipedia, Monetary reform in the Soviet Union, 19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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