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인플레③…카르타고처럼 붕괴된 패전국들
현대 인플레③…카르타고처럼 붕괴된 패전국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1.14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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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GASP)에 하이퍼인플레이션 발생

 

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은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렸다.

산업시설은 파괴되었고 수많은 인명을 잃었다. 참전국들은 막대한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금본위제도를 이탈했고, 대부분 나리에서 부채비율이 GDP100%를 넘어섰다. 농지가 전쟁터가 되고, 농민들이 군대로 끌려가는 바람에 곡물생산이 급감했다. 생산물자가 부족해 물가는 대부분 나라에서 치솟았다.

전후 패전국들에게 가장 큰 압박은 전쟁배상금이었다. 승전국들은 패전국에 대한 복수심에 타오른데다 자국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패전국에게 가혹한 배상금을 물렸다.

패전국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산업시설이 파괴된 가운데 세수는 걷히지 않고 배상금은 물어야 했다. 결국 돈을 찍어내야 했다.

독일의 전후 하이퍼인플레이션은 잘 알려져 있다.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여러나라로 쪼개졌다. 국토가 쪼그라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도 극도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폴란드는 전승국에 포함되지만 전후 소련과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다.

독일(Germany), 오스트리아(Austria), 헝가리(Hungary), 폴란드(Poland)로 대표되는 GAPH 국가들은 전쟁의 업보를 짊어지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받아들여야 했다.

 

1918~1923 시기에 독일 금마르크 대비 지폐마르크의 교환비율 추이 /위키피디아
1918~1923 시기에 독일 금마르크 대비 지폐마르크의 교환비율 추이 /위키피디아

 

1921독일에 부과된 전쟁배상금은 1,320억 금마르크였다. 지폐가 아닌 금으로 환산한 가치였다. 협상에 참가한 영국 경제학자 존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이 가혹한 금액에 대해 독일 경제플 파괴하기 위한 카르타고 조약이라고 혹평했다.

독일 경제는 카르타고처럼 파괴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독일이 전쟁배상금을 갚지 않자 1923111일 국경을 넘어 독일 최대 석탄산지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하지만 독일 좌파는 파업으로 대응하고 민족주의자들은 재무장을 주장하는 바람에 프랑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독일은 전쟁배상금을 갚기 위해 돈을 찍어 냈다. 독일의 마르크화는 1922년부터 자유낙하했고, 인플레이션은 1923년에 사상 최고치에 이르렀다.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 기사)

독일 조폐창의 인쇄기는 풀가동했고, 한계가 드러나자 정부는 민간 인쇄업자에게 인쇄를 맡겼다. 200개의 인쇄공장이 풀가동해서 돈을 찍어 냈다. 화폐를 찍기 위해 종이와 잉크를 사는 비용이 화폐의 액면 가격보다 높아지게 되었다. 독일 마르크화는 휴지 조각의 가치도 없었다. 사람들은 지폐를 난로에 불을 지피기 위한 불쏘시개로 사용했다. 지폐로 살수 있는 석탄보다 열량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도 돈을 버는 사람이 있었다. 토지를 소유한 융커계급은 초인플레이션의 승자였다. 대기업들은 인플레이션을 이용해 공장을 회복시켰다. 기업가 후고 스티네스(Hugo Stinnes)독일의 새로운 황제로 등장했다.

 

벽지로 사용되는 독일 지폐 (1923) /위키피디아
벽지로 사용되는 독일 지폐 (1923)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는 이미 전쟁 기간에 통화량이 팽창했고, 물가가 급등해 있는 상태였다. 전쟁 직전인 19147월 오스트리아의 통화량은 34억 크로네였으나, 전쟁중인 1916년에 이미 110억 크로네로 증가해 있었다. 전쟁이 끝난후인 191811월엔 통화량이 335억 크로네로 늘어났다. 4년 사이에 10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생활물가는 1914년을 100으로 설정할 때, 191811월에 1,640으로 치솟았다.

전쟁이 끝난후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종전후 국토가 6분의1로 줄어들었고, 합스부르크가 왕실이 퇴진하고 공화정이 되었다. 경제는 마비되었다. 생활필수품은 부족했고 세금은 걷히지 않았다. 승전국은 배상금을 달라고 압박했다.

쪼그라든 오스트리아는 내부에도 많은 문제를 노정시켰다. 좌우 갈등이 증폭되었고, 주정부들이 교역장벽을 쌓았다. 수도 빈에는 식량이 공급되지 않았다. 석탄 공급이 부족해 빈 시민들은 산으로 올라가 땔감을 만들어야 했다. 굶주린 어린이 수백명이 빈의 호텔과 식당가를 서성거렸다.

신생 오스트리아 정부는 돈을 찍어내는 길을 선택했다. 정부는 돈 찍어내는데는 재정을 아끼지 않았다. 19193월부터 12월까지 신규 지폐 발행량은 83,160만 크로네에서 121억 크로네로 급증했고, 192012월엔 306억 크로네, 192212월엔 4조 크로네, 1923년 말엔 71,000억 크로네를 찍어냈다.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오스트리아 화폐공급량은 14,250% 증가했다.

생활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다. 물가지수는 1914년을 100으로 할 때 191811월에 1,640, 19201월엔 4,922, 19211월엔 9,956, 19221월엔 83,000, 19231월엔 1183,600으로 수직상승했다.

외국환과의 교환가치도 떨어져 19191월 미국돈 1달러가 16.1 크로네였으나, 19235월엔 7800 크로네로 교환되었다. 이 기간 인쇄기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풀가동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1922년말에서 1923년초에 진정되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국제연맹에 자금지원을 호소했고, 국제연맹이 이에 응했다. 정부는 공무원수를 7만명이나 줄이며 예산을 절감하고,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금본위제도로 복귀하면서 인플레이션을 잡게 되었다.

 

1925년 오스트리아 크로네 /위키피디아
1925년 오스트리아 크로네 /위키피디아

 

헝가리의 하이퍼인플레이션도 오스트리아와 같은 과정을 거쳤다. 1차 대전후 헝가리도 산업시설이 파괴된 상태에서 패전국의 일원으로 전쟁배상금을 갚느라 지폐를 찍어냈다. 헝가리도 국제연맹의 지원금을 받아 가까스로 인플레이션을 잡았다.

 

폴란드 새 지폐 5즐로티(1930) /위키피디아
폴란드 새 지폐 5즐로티(1930) /위키피디아

 

폴란드는 1차 대전 직후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독립했다. 신생 폴란드는 소련이 적백 내전에 휘말려 있는 사이에 옛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소련과 전쟁을 벌였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와 리투아니아에 군대를 파병해 1차 대전의 상흔이 아물기도 전에 전쟁비용이 폭증했다.

폴란드도 별수 없이 돈을 찍어 냈다. 폴란드의 통화가치는 1918년 미국돈 1달러에 대해 9마르크였으나, 1923년말에 637만 달러로 급락했다. 폴란드의 인플레이션은 1924년 그라브스키(Władysław Grabski) 총리의 통화개혁조치로 한풀 꺾였다.

폴란드 정부는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즐로티(złoty)라는 새 통화를 발행했다. 1즐로티는 구통화 180만 마르크와 교환되었다. 새 통화 즐로티는 미국 화폐 1달러에 대해 5.18로 고정시켰다.

 


<참고자료>

Jose A. Lopez, Uncertainty and Hyperinflation: European Inflation Dynamics after World War I

Economic Education, The Great Austrian Inflation

Wikipedia, Hyperinflation

Wikipedia, History of Poland (19181939)

Wikipedia, Władysław Grab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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