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인플레④…나치에 약탈당한 그리스
현대 인플레④…나치에 약탈당한 그리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1.15 12: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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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강요로 부역정권, 지폐 남발…극심한 식량난으로 30만명 아사

 

그리스가 2차 대전 중에 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수 없다. 국토는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불가리아에게 분할되고, 중앙은행에 쌓아두었던 금덩어리는 나치에게 강탈당했다. 그리스인들은 점령군에 대항하거나 나치의 요구를 거절하다가 죽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 굶어 죽었다. 극도의 식량부족으로 30만명이 아사했고, 부역정권이 돈을 찍어내느라 전례 없는 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다. 1941~1946년에 그리스인들이 겪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은 1923~1924년 독일이 겪은 인플레이션을 버금갔다.

 

2차 대전중 그리스 분할 /위키피디아
2차 대전중 그리스 분할 /위키피디아

 

그리스의 인플레이션은 194010월 이탈리아가 침공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그리스 정부는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중앙은행에서 돈을 빌렸고, 중앙은행은 지폐를 발행했다. 이탈리아와의 전쟁 6개월 동안에 중앙은행의 지폐발행으로 통화량이 72% 증가했고, 소비자물가는 12% 상승했다. 그리스는 국토를 수호하기 위해 이 정도는 감내할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19414월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지원하고 불가리아군이 진주하면서 그해말에 그리스 본토와 에게해 섬들은 세 나라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그리스 정부는 런던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나치 독일은 아테네와 테살로니카 등 그리스의 수도 주변을 장악하고, 부역정권을 수립했다.

 

나치독일 점령하의 아테네 /위키피디아
나치독일 점령하의 아테네 /위키피디아

 

세 나라 군대는 그리스를 철저히 파괴했다. 산업시설의 80%, 항만, 도로, 철도, 교량의 90%가 파괴되었다. 물자 이동은 중단되었다. 연합군의 포위와 국내 교통망 두절로 아테네를 비롯해 주요도시들에 물자공급이 차단되었다.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돈 되는 물자는 모두 약탈해 갔다. 중앙은행의 금괴는 일찌감치 베를린으로 수송했고, 곡물과 생활필수품도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Afrika Korps)을 지원하기 위해 무상으로 몰수, 징발했다. 그리스는 전쟁 이전에도 식량의 3분의1을 해외에서 수입했는데, 전쟁이 나면서 외국에서 식량 수입이 차단된데다 국내에서의 조달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농민들은 곡식을 징발당하지 않기 위해 감췄다. 중간도매상은 매점매석했다.

 

식량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나치 정부는 그리스인의 굶주림에 신경쓰지 않았다. 괴뢰정부는 대책이 없었다. 아테네와 외항 피레우스에서만 4만명이 굶어 죽었다. 그리스 전역에서 2차 대전 기간에 아사자와 성장지체로 조기사망한 사람을 합치면 3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약탈은 점령군 사이에 경쟁적으로 이뤄졌다. 독일군은 이탈리아군이 징발하기 앞서 먼저 약탈에 나섰다. 독일군은 데그리게스(DEGRIGES)라는 무역상사를 조직해 부역정권이 설립한 중앙은행으로부터 47,600만 마르크를 차입했다. 독일은 이 돈을 갚을 생각도 없었다. 조건은 전쟁이 끝난후에 갚는다는 것이었다. 독일군의 주둔비는 그리스 정부가 지불하도록 했다.

 

2억 드라크마 지폐 /위키피디아
2억 드라크마 지폐 /위키피디아

 

그리스 부역정권의 중앙은행은 부역정권의 경비를 마련하고 독일의 수탈로 인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돈을 찍어 냈다.

괴뢰 정부의 통화남발은 정통성 있는 그리스 정부의 그것과 질적으로 달랐다. 중앙은행에 금도 없었다. 지급보증이 전혀 되지 않는 지폐가 유일한 재정수단이었다. 독일군이 점령한 19415월부터 그들이 퇴각한 194410월까지 부역정부는 한도 없이 드라크마(drachma) 지폐를 찍어 냈다.

독일군 침략 이전인 19414월을 1로 할 때, 드라크마 발행량은 194212월에 15.7, 194312월에 135.5, 194410월에 2276,320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생활물가는 19414월을 기준으로 194212월에 127.7, 1943121,319.2, 194410월에 163354만배 올랐다.

굳이 계산하자면 하루 평균 인플레이션은 17.88%였고, 가격이 두배 오르는 기간은 4.21일이었다. 인플레이션에 극에 달했을 때 1조 드라크마 지폐가 발행되었다.

 

그리스 상점을 약탈하는 독일군 /위키피디아
그리스 상점을 약탈하는 독일군 /위키피디아

 

런던의 그리스 망명정부는 본국인들의 고난을 보다 못해 영국 정부에 구호를 위한 통상교역에 대해서는 해상봉쇄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영국은 구호선에 한해 해상봉쇄를 풀었다. 그후 스웨덴, 터키 등 중립국들이 그리스에 식량을 공급하면서 그리스 식량위기는 조금 완화되었다. 하지만 부역정부가 구호물자를 전량 통제하면서 암거래시장으로 팔아넘기거나 점령군에게 주었다고 한다.

 

194410월 독일군이 그리스에서 퇴각했다.

그리스 신정부는 인플레이션부터 잡아야 했다. 19441111일 그리스 정부는 통화개혁을 단행하고 새 지폐를 발행했다. 신화폐 1 드라크마는 구화폐 500만 드라크마로 교환되었다. 새로 설립된 중앙은행은 금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 파운드에 드라크마를 연동시켰다. 신화폐 600 드라크마는 영국돈 1 파운드로 교환되었다.

인플레이션은 곧바로 잡히지 않았다. 좌우의 내전이 지속되면서 재정적자는 불가피했고, 무역수지도 개선되지 않았다. 자원과 상품의 부족은 여전했고, 은행에 잔고가 부족했다. 하지만 전후의 플레이션은 2차 대전중의 하이퍼인플레이션보다는 심각하지 않았다. 내전이 종식되고, 세제가 개편되고, 무역이 재개되면서 그리스는 통화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참고자료>

A.J. Kondonassis, The Greek inflation and the Flight from the Drachma, 19401948

Wikipedia, Axis occupation of Greece

Wikipedia, Hyperinf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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