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통화로 인플레이션 잡은 브라질 헤알개혁
가짜통화로 인플레이션 잡은 브라질 헤알개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1.1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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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인플레⑧…연간 1천%대의 인플레, 헤알 개혁으로 통제

 

브라질 돈의 단위는 헤알(real)이다. 199471일 도입된 헤알화는 포르투갈어 real에서 나왔는데, ‘진짜’(real)라는 뜻이다. 진짜 돈이란 의미다. 헤알은 원래 동전도, 지폐도 발행하지 않은 가상의 통화 개념에서 출발했다. 즉 가짜 돈(fake money)이었다. 이 가공의 화폐단위가 진짜 화폐로 통용되는데는 사연이 있다.

 

브라질 200헤알 지폐 /위키피디아
브라질 200헤알 지폐 /위키피디아

 

1985년 브라질은 20년간의 군사독재 시절을 거쳐 민주 정부로 이양했다. 군사정부 시절에 브라질은 연평균 11.1~13.1%의 고도성장을 구가했으나, 말기에 대외부채를 갚지 못해 침체의 늪에 빠졌다.

1985년부터 시작된 민선 대통령 시기에 각 정권은 의욕에 찬 공약을 내걸었다. 선거 제도는 그 자체로 포퓰리즘을 수반한다. 어느 정권은 브라질리아 건설을 공약으로 내걸고 돈을 찍어 건설비용을 충당했다. 또 다른 정권은 새로운 복지공약을 내놓고 돈을 풀었다. 각 정권마다 공약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폐를 남발했고, 그 결과는 인플레이션이었다.

브라질의 민주화는 인플레이션을 동반했다. 정부 지출은 늘 세수를 두배 가까이 초과했고, 부족분은 통화 발행으로 해결했다. 민주화 첫해인 1995년에 인플레이션율은 200%에 달했고, 1991~1994년 사이엔 연간 1,000~3,000%에 달했다. 조폐창이 풀가동되었고, 나중엔 인쇄능력이 모자라 한쪽 면만 찍어내기도 했다.

1985~1994년 사이에 한달 평균 인플에이션은 80%에 달했고, 이 기간 총인플레이션율을 계산하면 184,901,570,954.39% (1.849×1011%)이란 천문학적 숫자가 나온다.

 

브라질 인플레이션 (연간) /ResearchGate
브라질 인플레이션 (연간) /ResearchGate

 

상점에선 매일 가격표를 바꿔 붙였다. 달걀 하나가 10 크루제이루(cruzeiro)라면 한달 후에 20 크루제이루가 되고, 1년후에는 1만 크루제이루로 뛰어 올랐다.

점원이 아침 일찍 출근해서 하는 일이 새 가격표를 다는 일이었다.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점원이 가격표를 붙이지 않은 곳을 먼저 달려가 물건을 사는 진풍경이 빚어지기도 했다. 어제의 가격표를 떼지 않은 점포에선 다른 색깔의 새 가격표를 덧붙였는데, 가격표의 색깔로 그날 가격을 구분했다고 한다.

인플레이션이 10년 가까이 계속되다보니, 점포에서는 관성적으로 가격을 올렸다. 이를 경제용어로 관성인플레이션(Inertial inflation)이라고 한다. 정부도 여러 변수들을 조합해 가격 지수를 도입해 점포에서 활용하도록 친절하게(?) 안내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역대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방치하지는 않았다. 정부는 매년 물가안정대책을 내놓았다. 어떤 해에는 가격을 동결하기도 하고, 또 어느 때엔 임금을 동결했다. 그때마다 두어달 물가기 잡히는 듯 했지만 대책의 허점을 헤집고 물가는 다시 올랐다.

 

브라질 인플레이션(월별) /ecnofiz
브라질 인플레이션(월별) /ecnofiz

 

199212월 이타마르 프랑쿠(Itamar Franco)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프랑쿠 대통령은 루벤스 리쿠페루(Rubens Ricupero)를 재무장관으로 지명했다. 그런데 신임 재무장관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외교·정치 분야에 오래 근무한 인물이었다. 경제를 모르는 그는 에드마르 바차(Edmar Bacha)라는 경제학자를 불렀다.

에드마르 바차 /위키미디어
에드마르 바차 /위키미디어

 

재무장관은 바차에게 나는 경제를 모르오. 물가를 잡아야 하는데, 어떤 방법이 있는지 연구를 해 주시오.”라고 주문했다. 바차는 대학 술집에서 매일 함께 하는 친구 셋을 불러 재무장관의 부탁이 왔는데, 어떤 방법이 좋겠는가를 물었다.

네명의 친구들은 매일 바에서 만나 아이디어를 교환했다. 그들이 고안해 낸 묘수는 매일 달라지는 상품 가격에서 진짜 가치(real value)을 찾아 내는 것이었다. 미국 달러가치는 변하지 않았는데, 브라질 크루제이루는 매일 변했다. 그러면 달러 가격에 고정시킨 진짜 가격을 찾아내서 국민들에게 가르쳐 주자는 것이었다.

브라질 국민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물가는 오를 것이라고 믿었고, 어떤 대책을 내놓아도 신뢰를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바차와 그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묘수가 먹혀들어갈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어느날 바차는 프랑쿠 대통령을 접견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대책을 꺼내 놓았다. 바차는 동전도 필요없고, 지폐도 필요없다. 다만 가짜 통화단위를 만들어 내자.”고 제안했다.

대통령은 그 대책에 찬성했다.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가상의 통화단위는 진짜 가치 단위’(URV, Unit of Real Value)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통화단위였다.

URV는 미국 달러를 기본으로 평가되었다. 브라질 전역의 상점에 두 개의 가격표가 붙었다. URV로 표시한 가격과 통용화폐인 크루제이루로 표시된 가격이 나란히 옷과 식품, 자동차, 이발소 등등, 모든 상점의 가격표에 붙었다.

노동자의 임금과 교통요금, 세금에도 가상화폐와 통용화폐의 두 개의 가격이 표시되었다.

 

몇 개월이 지나면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 1URV=10크루제이루의 가격을 붙인 우유가 한달 후에 1URV20크루제이루로 바뀌어 있었다. 가상화폐의 가격은 변하지 않고 통용화폐의 가격은 올라간 것이다. 브라질 국민들이 가상화폐의 가격을 믿고, 통용화폐를 불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바차와 그의 친구들은 이제 크루제이루를 폐지하고, URV를 통용화폐로 할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해 대통령과 재무장관에 그들의 의견을 제시했다. 프랑쿠 대통령과 리쿠페루 재무장관은 그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URV라는 가짜 돈을 진짜 돈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 화폐가 헤알(real), 즉 진짜 돈이 된 것이다.

헤알화 화폐개혁을 단행할 때 기자들이 바차에게 물었다. “정말로 물가가 잡이는 건거요.” 바차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장담합니다.”

 

페르난두 카르두수 /위키피디아
페르난두 카르두수 /위키피디아

 

헤알은 미국돈 1달러의 가치로 고정시켰다. 구화폐와 신화폐의 교환비율은 2.75 × 1018이었다.

프랑코 대통령은 화폐개혁을 단행한 후 경제학자를 재무장관에 기용했다. 그가 헤알 개혁의 완성자, 페르난두 카르두수(Fernando Henrique Cardoso). 그는 재무장관에 이어 1995년에 대통령에 오른다.

카르두수는 젊은 시절에 좌파 종속이론(depedency theory)의 대가로 1980년대 우리 대학가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한때 좌익이론가였던 그는 외국인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 정치 및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무엇보다 인민에게 빵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카르두수는 20년전에 세웠던 자신의 이론을 과감히 포기하고, 개혁과 개방을 부르짖었다. 1994년에 단행한 이른바 헤알 개혁은 물가 안정을 통해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화폐개혁과 동시에 긴축재정을 실시했다. 공기업 민영화도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정부가 운영하던 항만을 민간에 불하했고, 국영철도공사가 운영하는 국철 6개 노선를 민간에 넘겼다.

헤알화 도입과 헤알 개혁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잡는데 성공했다. 인플레이션은 1994648%에서 77.8%, 8월엔 1.9%로 가라앉았다. 이로써 브라질의 인플레이션은 끝났다.

 


<참고자료>

NPR, How Fake Money Saved Brazil

Wikipedia, Brazilian real

Wikipedia, Hyperinflation in Brazil

Wikipedia, Plano Real

Wikipedia, Economic history of Braz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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