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은 지식인의 울분’ 황현의 절명시, 문화재로
‘나라 잃은 지식인의 울분’ 황현의 절명시, 문화재로
  • 아틀라스
  • 승인 2019.03.11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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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야록 등 황현 유산 4건 문화재 예고…윤희순 의병가사집과 한양대 구본관도

 

난리 통에 어느새 머리만 희어졌구나/ 몇 번 목숨을 버리려 하였건만 그러질 못하였네/ 하지만 오늘만은 진정 어쩔 수가 없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

요사한 기운 뒤덮어 천제성(天帝星)도 자리를 옮기니/ 구중궁궐 침침해라 낮 누수(漏水)소리만 길고나/ 상감 조서(詔書) 이제부턴 다시 없을 테지/ 아름다운 한 장 글에 눈물만 하염없구나.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악 해수 다 찡기는 듯/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영락되다니/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승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정히 어렵구나.

일찍이 조정을 버틸만한 하찮은 공도 없었으니/ 그저 내 마음 차마 말 수 없어 죽을 뿐 충성하려는 건 아니라/ 기껏 겨우 윤곡(尹穀)을 뒤따름에 그칠 뿐/ 당시 진동(陳東)의 뒤를 밟지 못함이 부끄러워라.

 

1910829일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것을 통분해 910일 소주에 아편을 타서 마시고 순국한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유서로 쓴 절명시(絶命詩)의 구절이다.

이승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어려웠던 황현은 18551211일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났다. 세종 때 명재상 황희 정승의 후손으로, 왕석보(王錫輔)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시문에 능했다. 1885(고종 22) 생원진사시에 장원했지만,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해 벼슬을 포기하고 전라남도 구례로 낙향하여 구안당(苟安堂)이라고 이름 지은 집에 은거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뺏기자 '나라가 선비를 양성한지 500년이나 되었지만 나라가 망하는날 한 명의 선비도 스스로 죽는 자가 없으니 슬프지 않겠는가' 라는 말을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황현 매천야록(梅泉野錄) 표지 /문화재청
황현 매천야록(梅泉野錄) 표지 /문화재청

 

 

문화재청이 조선말 시인이자 우국지사인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 시문, 관련 유묵자료첩, 교지시권백패통, 대월헌절필첩 등 문화유산 4건에 대해 문화재로 등록예고했다. 아울러 윤희순 의병가사집과 항일독립 유산과 서울 한양대학교 구 본관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이번에 등록 예고한 매천야록 등 6건은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등록될 예정이다.

문화재청은 또 서울 구 공군사관학교 교회를 문화재로 등록했다.

 

매천야록(梅泉野錄)

조선말부터 대한제국기의 역사가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매천 황현(1855~1910)1864년 대원군 집정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약 47년간의 역사 등을 기록한 친필 원본 7책으로, 한국 근대사 연구에 중대한 가치를 지닌 사료다.

이 책에는 한말에 세상을 어지럽게 하였던 위정자의 사적인 비리비행과 특히, 일제의 침략상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으며, 이에 대한 우리 민족의 끈질긴 저항 등이 담겨 있다. 자유로운 방식으로 당시의 역사를 보고 들은 대로 기록했다.

 

황현 매천야록(梅泉野錄) 내지 /문화재청
황현 매천야록(梅泉野錄) 내지 /문화재청

 

 

오하기문(梧下記聞)

황현이 저술한 친필 원본 7책으로, 자유로운 방식으로 당시의 역사를 보고 들은 대로 기록했다. 흔히 매천야록의 저본(底本, 초고)으로 추정된다. 19세기 후반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적 사실과 의병항쟁 등을 비롯한 항일활동을 상세하게 전함으로써 한국 근대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오하기문이란 표제는 황현이 거처한 정원에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서 이 글을 기술했다는데서 유래했다.

 

매천 황현 시문, 관련 유묵자료첩, 교지시권백패통

한말삼재’(韓末三才), ‘호남삼걸’(湖南三傑)로 이름을 날린 문장가였던 매천 황현이 지은 친필 시문(詩文) 7책과 황현의 저술그의 지기(知己)들이 보낸 서간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기사 모음과 같은 다양한 자료를 포함한 유묵자료첩 11, 황현이 1888년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급제한 교지(敎旨)와 시권(試券) 그리고 이를 보관한 백패(白牌)통이다.

* 한말삼재(韓末三才): 김택영, 이건창, 황현

호남삼걸(湖南三傑): 이기, 이정직, 황현

* 시권(試券): 과거를 볼 때 글을 지어 올리던 종이

* 백패(白牌): 소과에 급제한 생원이나 진사에게 주던 흰 종이의 증서

 

황현의 시는 우국충절의 지식인으로서 책임의식이 깊이 투영된 구국애민의 시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당대 제일의 문장가들과 교유한 서간, 신문기사 모음 등을 통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국가적 위기와 사회 상황, 지식인들의 동향을 살필 수 있는 희귀한 자료이다.

 

대월헌절필첩(待月軒絶筆帖)

황현이 19108월 경술국치 다음 달인 9월에 지은 절명시(絶命詩) 4수가 담겨있는 첩으로, 양면으로 되어 있으며 서간과 상량문 등도 포함되어 있다. 황현은 절명시를 남기고 사랑채였던 대월헌(待月軒)에서 순절했고,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윤희순 의병가사집

여성 독립운동가인 윤희순(尹熙順, 1860~1935)이 의병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지은 낱장의 친필 가사들을 절첩(折帖)의 형태로 이어붙인 순한글 가사집이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문집이라는 점에서 희소성이 크고, 근대 가사와 한글 표기방식 등 국어학·국문학 연구 등의 중요 기록 자료로도 가치가 크다.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가’, ‘의병군가등을 작사·작곡하여 부르게 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의병운동을 고취(鼓吹)하고 지원했다. 대한독립단에서 활동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치열한 항일운동을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서울 한양대학교 구 본관 전경 /문화재청
서울 한양대학교 구 본관 전경 /문화재청

 

 

서울 한양대학교 구 본관

한국전쟁 직후, 한양대학교 캠퍼스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1956년 대학 본부로 처음 건립되었다. 외관을 석재로 마감하고 정면 중앙부에 열주랑(列柱廊)을 세우는 등 당시 대학 본관건물에서 보여지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디자인적인 요소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공학을 모태로 성장한 대학으로 경제개발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기술 인력을 배출한 한양대학교의 역사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열주랑(列柱廊):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다수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공간

 

등록문화재 제744, 서울 구 공군사관학교 교회

1964년 건축가 최창규가 설계한 건물로 1985년에 공군사관학교가 충북 청주로 이전하면서 조성된 보라매공원 안에 있다. 옛 공군사관학교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건물은 급경사로 디자인된 지붕형태와 수직성을 강조한 내부 공간 등이 당시 일반적인 교회건축의 형식에서 벗어난 독특한 건축기법으로서 의미가 있다. 지금은 서울시 동작구청에서 문화·예술공간(동작아트갤러리)으로 활용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등록된 서울 구 공군사관학교 교회를 해당 지방자치단체, 소유자(관리자) 등과 협력하여 체계적으로 보존관리, 활용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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