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카혼타스와 담배…버지니아 성공 토대를 놓다
포카혼타스와 담배…버지니아 성공 토대를 놓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2.05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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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이모저모①…인디언 재배기술 도입으로 담배 재배 성공

 

포카혼타스는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로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다. 주인공 포카혼타스(Pocahontas)는 실제 인물이다. 포카혼타스는 아메리카 원주민 포우하탄(Powhatan) 부족연합체 추장의 딸로, 영국인 이민자 존 롤프(John Rolfe)와 결혼했다.

포카혼타스의 이야기는 미국인들에게 낭만적 상상을 자극해 예술과 문학,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그런데 포카혼타스의 결혼이 버지니아 초기 이민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의 장면 /IMDb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의 장면 /IMDb

 

미국 최초의 유럽 정착촌은 스페인에 의해 건설되었다. 스페인 정착지는 1572년 건설되었다가 인디언의 공격을 받아 곧바로 사라졌고, 미국 동부 해안은 오랫동안 유럽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후 미국 땅을 개척한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기업이었다. 1606년 영국 국왕 제임스 1(James I)가 런던회사(London Company)에 특허장을 부여하고 북아메리카에 정착촌 건설을 허가했다. 이 런던회사는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y)로 불렸다.

버지니아 회사는 런던 상인들이 출자한 주식회사로, 160612월 신대륙에 가겠다는 남자들을 태우고 런던을 떠나 이듬해 4월에 버지니아 체사피크만에 도착했다. 런던의 실업자, 모험가들로 구성된 이들은 항해 도중에 39명이 사망하고 105명이 땅에 내렸다. 이들은 스페인에 들키지 않으려고 강을 거슬러 젇악촌을 만들고 국왕의 이름을 따 제임스타운(Jamestown)이라 불렀다.

초기 이민자에겐 생존 그 자체가 투쟁이었다. 정착촌의 우물엔 소금기가 올라왔고, 여름엔 모기떼가 습격해 말라리아를 퍼트렸다. 또 강의 수위가 낮아지면 오수가 빠져나가지 못해 장티푸스와 이질에 걸렸다. 9개월후 105명의 이주자 가운데 생존자는 38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 회사는 식민지에서 이익을 내기 위해 두 번째 이민자를 실어 날랐다. 하층민들은 일단 런던을 떠나고자 배를 탔다. 160912월 제임스타운의 정착자는 220명이었지만 이듬해 봄에 60명만 살아 남았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한 남자는 아내를 잡아 먹기도 했다.

 

1607년 제임스타운 정착자들의 무덤 /위키피디아
1607년 제임스타운 정착자들의 무덤 /위키피디아

 

포카혼타스의 남편 존 롤프는 1610년 세 번째 이민자 그룹에 끼어 제임스타운에 도착했다. 아버지를 따라 온 존은 나이가 25세였다.

당시 연초는 스페인의 식민지인 페루와 에콰도르에서 재배되어 유럽에 수출되었다. 스페인 식민지의 연초는 유럽인의 습관을 바꾸었다. 영국에서도 담배 소비가 급속히 늘었고, 연초는 스페인에서 수입해 왔다.

존은 연초 재배에 나섰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도 연초를 생산하고 피웠지만, 그들의 연초는 영국인의 입맛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1611년 존은 생각을 바꿔 스페인 식민지인 카리브해의 트리니다드(Trinidad)에서 어렵게 연초 씨앗을 구해 재배했다. 그 연초는 잘 자랐지만 스페인 식민지에서 생산된 연초의 맛을 따라가지 못했다.

 

존 롤프와 포카혼타스 /위키피디아
존 롤프와 포카혼타스 /위키피디아

 

16133월 포카혼타스가 제임스타운의 영국인들에 의해 납치되었다. 포카혼타스는 1년간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에 존 롤프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롤프는 전부인이 사별한 후 이민을 와 홀아비였다. 16144월 존과 포카혼타스는 결혼했다.

존은 결혼을 통해 알게 된 인디언들에게서 담배를 재배하고 건조시키는 기술을 습득했다. 존이 재배한 담배는 스페인 식민지에서 생산된 담배의 수준에 근접했다.

1616년 존은 아내 포카혼타스와 함께 런던을 방문했다. 버지니아 회사가 영국인의 이민을 독려하기 위해 존과 포카혼타스를 센세이셔널하게 활용하는 측면도 있었다. 계획대로 포카혼타스 부부는 영국에서 큰 화제거리가 되었고, 존은 버지니아산 담배를 홍보했다.

하지만 포카혼타스는 돌아오기 직전에 그곳에서 원인불명의 병에 걸려 숨지고 만다. 풍토가 달라서 생긴 병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이 21세였다.

 

포카혼타스 기념우표(1907) /위키피디아
포카혼타스 기념우표(1907) /위키피디아

 

존은 버지니아산 담배를 오리노코(Orinoco)라고 명명했다. 오리노코는 영국인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담배는 버지니아에게 구세주와 같았다. 버지니아 이민자들은 담배 생산을 통해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1618년 버지니아는 9,000kg 이상의 담배를 영국에 보냈다. 그로부터 4년후 담배 생산은 세배로 늘었고, 1627년엔 22kg, 1629년엔 68kg을 생산했다. 1938년경에 버지니아는 영국에 136kg의 담배를 수출해 카리브해를 제치고 유럽의 주요 담배공급기지가 되었다.

이로써 북미 지역의 영국인 최초 정착지는 초기의 역경을 극복하고 호황을 맛보게 되었다.

 

1614년 제임스타운의 모습 /위키피디아
1614년 제임스타운의 모습 /위키피디아

 

버지니아가 살만한 곳이 되면서, 버지니아 회사는 토지정책을 변경해 이민자에게 토지를 소유하게 했다. 경작가능한 이민자에게 한 사람당 20의 토지를 주었다. 가족은 구성원의 수에 따라 40~80또는 그 이상의 땅을 경작하게 되었다. 80는 엄청난 넓이의 땅이다. 소유의식은 농민의 생산의욕을 북돋우었고, 그들은 담배와 기타 식물을 재배했다.

 

담배가 성공하면서 버지니아는 죽음의 땅이 아니라 희망의 땅으로 변해갔다. 첫 식민자가 도착한지 12년후인 1619, 버지니아에선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첫째는 영국에서 90명의 여성 이민자를 데려온 것이다. 현지 총각들에게 1인당 60kg의 담배를 내면 여자를 데려가게 했더니 줄을 섰다고 한다. 남자 위주로 병영처럼 살던 곳에 여자가 들어오면서 식민지의 모습이 달라졌다. 가정을 형성하고, 후손을 낳아 사람 사는 곳이 된 것이다.

둘째로 버지니아 의회가 생겼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는 식민지 일에 일일이 간섭할수 없었다. 요즘처럼 통신시설이 잘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배가 한번 왕복하면 반년 이상 걸리는 시대에 식민자에 자체 의회를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이 해에 네덜란드 배 한척이 아프리카 흑인을 싣고 체사피크만에 도착했다. 이들이 미국 최초의 흑인 노예다. 처음에는 노예는 종신계약이 아니었다. 일정기간 노동계약서를 체결하고, 기한이 만료되면 노예는 자유인이 되었다. 식민지 초기 버지니아엔 자유인이 된 흑인이 토지를 소유하고 심지어 노예를 거느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버지니아는 틀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Pocahontas

Wikipedia, John Rolfe

Wikipedia, Jamestown, Virginia

Wikipedia, Colony of Virgi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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