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미국 선박에 미시시피강 통행 봉쇄하다
스페인, 미국 선박에 미시시피강 통행 봉쇄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2.10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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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이모저모⑥…미국인 서부진출에 스페인 제재, 남부와 북부 대립

 

지금의 미국 루이지애나 주는 미시시피강 하구에 있는 하나의 주이지만, 미국 독립 당시 루이지애나(Louisiana)는 미국 중부 미시시피강 유역 전체를 지칭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루이지애나는 1682년 루이 14세때 프랑스인들에 의해 개척되었다. 유럽에서 7년전쟁(1756~1763)이 벌어졌을 때 프랑스는 스페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게 비밀리에 양도했다.

스페인은 17663월에 루이지애나 식민총독으로 안토니오 데 울로아(Don Antonio de Ulloa)를 파견하고, 1769년에는 24척의 전함과 2,000명의 병력을 주둔시켜 본격적인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스페인의 식민지는 플로리다와 루이지애나였다.

 

스페인은 미국 독립전쟁 때에 프랑스와 함께 미국을 지원했다. 미국은 존 제이(John Jay)를 마드리드 주재 대사로 파견해 전쟁 자금을 얻고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스페인은 미국 독립에 대해 이중정책을 취했다. 반영 동맹에는 합류하면서도 미국의 독립은 인정하지 않았다. 스페인 왕실은 미국의 자유민민주주의를 지지하지 않은데다 미국 승인이 멕시코와 남미의 독립운동세력을 자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미국의 독립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취했다. 스페인은 미국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와 함께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미국에 무기를 제공했다. 하지만 루이지애나 주둔 스페인군은 미시시피 계곡의 영국기지를 공격해 미국 독립운동을 기회로 테네시와 앨라바마 일대의 영국 점령지를 빼앗았다.

1783년 독립전쟁이 끝나고 스페인은 디에고 데 가르도키(Diego de Gardoqui)를 뉴욕 주재 대사로 파견해 두 나라의 우호관계를 추진했다. 조지 워싱턴 초대대통령은 취임식에 스페인 대사와 함께 행진하고, 스페인 국왕 카를 3세는 워싱턴의 농장에서 기를 가축을 선물하기도 했다.

 

독립직후 미국이 주장한 경계 /위키피디아
독립직후 미국이 주장한 경계 /위키피디아

 

미국이 독립한 후 스페인은 미국 견제 전책으로 전환했다. 미국인들이 애팔라치아 산맥을 넘어 미시시피 유역으로 넘어 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연방헌법을 제정하면서 미시시피 동부 지역을 영토로 규정했는데, 스페인의 루이지애나와 겹쳤다. 특히 앨라배머, 조지아는 양국이 서로 자국령이라 주장했고, 켄터키 주민들은 미국이 독립주로 인정하지 않은데 불만을 품고 스페인에 기웃거렸다. 남부 버지니아와 노스 캐롤라이나 주는 애팔라치아 서쪽 지역도 자기 주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스페인과 마찰을 빚었다.

스페인 식민당국은 미국인들의 서부진출을 막기 위해 토착 인디언들과 연합해 충성을 요구했다. 또 미국 장군에게 뇌물을 주어 미국의 서부개척지를 스페인에게 넘어오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도 밀려오는 미국인들을 막지 못했다. 인디언들은 스페인보다 미국과 거래하고 싶어했다.

 

1784년 스페인은 미시시피강에 대해 미국 선박의 통행권을 금지했다. 미시시피강 하구 뉴올리언스에서 미국 배는 스페인 당국의 검열을 받아야 했고, 강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스페인의 조치는 더 이상 신생독립국이 커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서부로 밀려오는 미국 개척자들이 스페인 식민지를 무단으로 잠식해 들어왔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서부 미국인들을 고립시킬 필요가 있었다.

철도나 자동차가 없던 시절이었다. 애팔라치아 산맥 건너 서부인들은 농산물을 미시시피 강을 통해 운반해 동부로 이동시켰다. 말이나 마차로 산맥을 넘는 것은 시간도 걸리고 수송에 한계가 있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주는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 주였다. 남부 주의 주민들은 애팔라치아 서쪽에도 농지를 개척했는데 농산물 수송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미시시피강 유역 /위키피디아
미시시피강 유역 /위키피디아

 

스페인 식민당국의 통행금지조치는 스페인 상인들에게도 불만이었다. 뉴스페인(멕시코)과 카리브해의 스페인 상인들은 미국이 영국의 항해조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새로운 교역로 개척하려 했다. 또한 뉴잉글랜드와 뉴욕의 미국 상인들도 카리브해와 스페인 식민지와 거래를 하고 싶어했다.

두 나라 상인들의 이해가 일치하면서 미국과 스페인은 미시시피 통행금지에 대한 협상을 벌였다. 미국의 존 제이가 마드리드로 가 미시시피강의 자유항행권을 요구했다. 1785년 가르도키가 스페인 대표로 뉴욕(당시 수도)에 와 미국측과 협상을 벌였다. 오랜 협상 끝에 1786년 영국은 합의문을 만들었다. 이를 제이-가르도키 조약(JayGardoqui Treaty)이라고 한다.

뉴욕상인 출신인 존 제이가 상인들엑 유리하도록 협상을 타결했다. 조약에는 미국이 25년간 미시시피 통행권을 포기하되, 스페인 식민지와의 교역을 허용하는 내용이 담겼다. 북부 상인들은 조약안을 수락했지만, 남부 농민들은 25년간의 금지조치를 참지 못했다.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등 남부 정치인들이 조약에 반대하고 나섰다. 대표적인 인물이 후에 연방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과 제임스 먼로(James Monroe)였다. 남부 정치인들은 조약이 북부 상인들에게 유리하게 맞춰져 있다며, 남부 주들이 독립해 별도의 연방을 구성하자고 주장했다. 조약안은 결국 연방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미국은 한동안 미시시피강을 통해 배를 움직이지 못했다.

 

피크니 조약에 의한 미국과 스페인의 영토 규정 /위키피디아
피크니 조약에 의한 미국과 스페인의 영토 규정 /위키피디아

 

그후 프랑스는 루이지애나를 되찾으려고 했다. 스페인은 미국보다 프랑스를 우려했다. 또한 미국도 해군력을 증강하면서 스페인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미국과 스페인은 179510월 플로리다를 스페인령으로 인정하고 미시시피강에 대한 미국선박의 항해권을 허용하는 내용의 피크니 조약(Pinckney's Treaty)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1796년 연방의회를 통과했다.

 


<참고자료>

CSAC, The United States, Spain, and the Navigation of the Mississippi River

Library of Congress, Louisiana as a Spanish Colony

Wikipeiida, Louisiana (New Spain)

Wikipeiida, Confederation Period

Wikipeiida, SpainUnited States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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