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는 몽골 법전, 보물 되다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는 몽골 법전, 보물 되다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1.02.1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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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엔 없고 경주손씨 문중에 600년 이상 전래된 원나라 법전 ‘지정조격’

 

문화재청이 중국 원나라 시대에 제작된 법전인 지정조격(至正條格)을 보물로 지정했다.

보물 2118호로 지정된 원나라 법전은 지정조격’(至正條格) 112, 2334.

비록 완질은 아니지만 국내외를 통틀어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된 현존하는 유일의 원나라 법전으로, 경주 양동마을의 경주손씨(慶州孫氏) 문중에 600년 넘게 전래되어 온 문적이다.

이 책자는 조선 시대 명문가 중 하나인 경주손씨 집안에 지정조격이 전래된 배경으로 학계에서는 손사성(孫士晟, 13961435), 손소(孫昭, 14331484) 등 조선 초기에 활동한 선조들이 승문원(承文院, 조선 시대 외교문서를 담당한 관청)에서 외교문서를 담당하면서 외국의 법률, 풍습 등을 습득하고자 지정조격을 접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정조격(至正條格)1346(고려 충목왕 2, 원나라 순제 6)에 간행된 원나라 최후의 법전으로, 서명의 뜻은 지정 연간(至正 年間, 1341~1367)에 법률 조목의 일종인 조격(條格)’을 모았다는 의미이다.

원나라는 1323, 1346년 두 차례에 걸쳐 법전을 편찬했지만 명나라 초기에 이미 중국에서는 원본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나 2003년 우리나라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조사 연구진이 발견해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지정조격의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고 서명과 목록만이 흠정사고전서총목(欽定四庫全書總目)(청나라 건륭제 명에 의해 간행한 역대 중국서적 목록) 등 후대의 문헌에 전해져 개략적인 내용만 알려져 왔다.

지정조격은 고려 말에 전래되어 우리나라 법제사와 문화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려 말까지 형사법(刑事法) 등의 기본법제로 채택되었고 조선에서는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의 기본법전)반포 이전까지 중국의 법률과 외교, 문화 제도를 연구하는데 주요 참고서로 활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등 여러 사료에서 1423(세종 5) 원나라 간행본을 토대로 따로 50부를 간행하였고, 1493(성종 24) 성종이 문신들에게 하사해 읽게 하였다는 내용 등이 확인된다.

이상의 역사학술 가치에 비추어 경주 양동마을 경주손씨 소장 지정조격 권112, 2334는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알려진 원나라 법전이라는 희소가치, 고려와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법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우리나라와 세계문화사에서 탁월한 의미를 갖는 중요한 유물이라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하고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

문화재청은 외국에서 만들어진 문화재도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제11조 제1항에 따라 국보나 보물로 지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보물 제2118호로 지정된 중국 원나라 법전 지정조격 권1~12, 23~34 (내지) /문화재청
보물 제2118호로 지정된 중국 원나라 법전 지정조격 권1~12, 23~34 (내지) /문화재청

 

한편 문화재청은 조선왕실의 문서인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가 국보로, 지정조격을 포함해 사찰목판, 전적불교문화재 등 12건을 보물로 지정했다.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保社功臣錄勳後)(국보 제335)

1680(숙종 6) 830일 열린 왕실의 의식인 회맹제(會盟祭, 임금이 공신들과 함께 천지신명에게 지내는 제사)’를 기념하기 위해 1694(숙종 20) 녹훈도감(復勳都監)에서 제작한 왕실 문서다. 이 의식에서 왕실에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는 공신(功臣)’ 중 개국공신(開國功臣)부터 보사공신(保社功臣)에 이르는 역대 20종의 공신이 된 인물들과 그 자손들이 참석해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회맹제가 거행된 시기와 이 회맹축을 조성한 시기가 15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숙종 재위(16741720) 중 일어난 여러 정치적 변동 때문이었다. 당시 남인(南人)과 더불어 정치 중심세력 중 하나였던 서인(西人)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을 계기로 집권해 공신이 되었으나, 1689(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공신으로서 지위가 박탈되었다. 이후 서인은 1694(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집권하면서 공신 지위를 회복했고, 이때 1~3등까지 총 6(김만기, 김석주, 이입신, 남두북, 정원로, 박빈)에게 보사공신칭호가 내려졌다.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회맹축은 숙종 연간 보사공신이 있기까지 공신으로 지위 부여(녹훈, 錄勳)와 박탈(삭훈, 削勳), 회복(복훈, 復勳)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물자료다.

이 그림은 1680년 회맹제 거행 당시의 회맹문(會盟文, 종묘사직에 고하는 제문)과 보사공신을 비롯한 역대 공신들, 그 후손들을 포함해 총 489명의 명단을 기록한 회맹록(會盟錄), 종묘에 올리는 축문(祝文, 제사 때 신에게 축원하는 글)과 제문(祭文)으로 구성되었다. 축의 말미에 제작 사유와 제작 연대를 적었고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국새를 마지막으로 찍어 왕실 문서로서 완전한 형식을 갖추었다. 1680년 회맹연에는 참석대상 총 489명 중 412명이 참석했으며,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은 연로하거나 상()을 당한 사람, 귀향 등으로 인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공신회맹제가 있을 때마다 어람용 회맹축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1910년까지 문헌을 통해 전래가 확인된 회맹축은 3건에 불과하다. 1646(인조 24)년과 1694(숙종 20) 제작된 회맹축, 1728(영조 4) 분무공신(奮武功臣) 녹훈 때의 회맹축이 그것이다. 이 중 영조 때 만들어진 이십공신회맹축의 실물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고, 1646년에 제작된 이십공신회맹축-영국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寧國功臣錄勳後)(보물 제1512)는 국새가 날인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어람용이자 형식상내용상 완전한 형태로 전래된 회맹축은 이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가 유일하다.

이 회맹축은 17세기 후반 숙종 대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을 거치면서 서인과 남인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당시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사료이며, 왕실유물 중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로 제작되어 조선 후기 왕실 공예품의 백미(白眉)로서 예술성이 우수하다.

 

국보 제335호 보사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앞부분) /문화재청
국보 제335호 보사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앞부분) /문화재청

 

하동 쌍계사 소장 목판 3

문화재청이 ()불교문화재연구소와 함께 2016년에 조사한 경상남도 지역 사찰에서 소장한 목판 중 완전성, 제작 시기, 보존상태, 희소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총 3건을 지정대상으로 선정했다.

선원제전집도서 목판(禪源諸詮集都序 木板)(보물 제2111)

지정 대상 중 제작 시기가 가장 빠르다. 지리산 신흥사 판본(1579)과 순천 송광사 판본을 저본(底本)으로 해 1603(선조 36) 조성된 목판으로, 22판 완질이다.

선원제전집도서는 당나라 규봉 종밀(圭峰 宗密, 780841)이 자신의 찬술인 선원제전집’ 100여 권에서 요점만 뽑아 다시 정리한 것으로 그 체제는 서()권상(卷上)권하(卷下)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참선의 5가지 종류(外道禪凡夫禪小乘禪大乘禪最上乘禪)의 분류와 저술 목적, 선종과 교종을 비교하고 화합의 방편을 제시했다.

판각에는 당시 지리산과 조계산 일대에서 큰 세력을 형성한 대선사(大禪師) 선수(善修, 15431615)를 비롯해 약 115명 내외의 승려가 참여했다. 하동 쌍계사 소장 선원제전집도서 목판은 병자호란(1636) 이전에 판각된 것으로, 전래되는 동종 목판 중 시기가 가장 이르고 희소성, 역사적학술적인쇄사적 가치가 인정된다.

원돈성불론간화결의론 합각 목판(圓頓成佛論看話決疑論 合刻 木板) (보물 제2112)

고려 승려 지눌(知訥, 11581210)이 지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1604(선조 37) 능인암에서 판각해 쌍계사로 옮긴 불경 목판으로 총 11판의 완질이다.

이 목판은 병자호란(1636) 이전에 판각되어 관련 경전으로서는 유일하게 전래되고 있는 목판이다. 자료적 희귀성과 판각 시기, 전래 현황 등으로 볼 때, 보물로 지정해 연구하고 보존관리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목판(大方廣圓覺修多羅了儀經 木板) (보물 제2113)

1455(세조 1)에 주조한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로 간행한 판본을 저본으로 해 1611(광해군 3) 여름 지리산 능인암에서 판각되어 쌍계사로 옮겨진 불경 목판으로, 335판의 완질이 전래되고 있다.

이 목판은 1636년 병자호란 이전에 조성된 경판으로서 희귀성이 높고 조성 당시의 판각 조직체계를 비롯해 인력, 불교사상적 경향, 능인암과 쌍계사의 관계 등 역사·문화적인 시대상을 조명할 수 있는 기록유산이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의 보물 지정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조선왕조실록등 우리나라 고대와 조선 시대사 관련 중요 문헌들이 모두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상황에서, 그동안 고려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사서인 고려사역시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평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새롭게 역사학술서지적 가치를 검토한 결과다.

고려사는 고려 말 문신 이제현(李齊賢), 안축(安軸) 등이 편찬을 시도했으나, 완성하지 못했고,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등이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후 1414(태종 14) 태종이 변계량(卞季良), 이숙번(李叔蕃) 등에게 명해 고려국사의 수정편찬을 명했으나 완성되지 못다. 결국 세종이 즉위해 고려국사의 오류를 지적해 편찬을 지시했고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 1449(세종 31) 편찬에 착수해 1451(문종 1) 완성되었다. 그러나 바로 인쇄되지 못하고 1454(단종 2) 인쇄반포되었다.

보물 지정 대상은 현존 고려사판본 중 가장 오래된 을해자 금속활자본과 목판 완질본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해자 2, 각 보물 제2114-1, 2114-2/ 목판본 2, 각 보물 제2115-1, 2115-2) 소장본을 비롯해, 연세대학교 도서관(목판본 1, 보물 제2115-3),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목판본 1, 보물 제2115-4) 3개 소장처에 보관된 총 6건이다.

이들 6건은 고려의 정사(正史)로서 고려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원천 사료라는 점, 비록 조선 초기에 편찬되었으나, 고려 시대 원사료를 그대로 수록해 사실관계의 객관성과 신뢰성이 뛰어나다는 점, 고려의 문물과 제도에 대한 풍부한 정보가 수록되었다는 점 등에서 역사문화사문헌학적 가치가 탁월하다는 가치가 인정되었다. 특히, 해당 판본들은 지금까지 전해진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자 목판 번각본이라는 점에서 서지적 가치 또한 높게 평가된다.

 

상주 남장사 영산회 괘불도 및 복장유물 (보물 제2116)

높이 11m에 이르는 대형 불화 1폭과 각종 복장물을 넣은 복장낭(腹藏囊), 복장낭을 보관한 함을 포함한 복장유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불화와 함께 복장유물을 놓은 복장낭이 온전하게 일괄로 남아 있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이 괘불도는 1776(정조 1) 조선 후기 대표적 수화승 유성(有誠)을 비롯한 경상도 지역에서 활약한 화승 23여 명이 참여하여 제작한 18세기 후반기 불화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또한, 조선 1718세기 제작 괘불이 여러 번 보수를 거치는 동안 원래의 모습을 상실한 것과 달리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은 이 괘불만의 독보적인 가치로 꼽을 수 있다.

화면 중앙에 압도적인 크기로 배치된 건장한 체구의 석가여래는 마치 앞으로 걸어 나오는 듯 다른 존상들보다 돋보이게 표현하였고, 옷 주름은 명암과 아기자기한 문양을 넣어 입체적이다. 좌우, 위아래에 배치된 보살과 사천왕, 용왕과 용녀 등의 모습 또한 권위적이지 않은 친근한 얼굴에 존격(尊格)에 따라 신체의 색을 달리 하여 강약을 조절한 점 등 작자의 재치와 개성을 발휘해 예술성이 높은 작품으로, 18세기 불교회화 연구에 중요한 참고가 된다.

 

구미 대둔사 경장 (보물 제2117)

1630(인조 8)에 조성된 경장(불교경전을 보관한 장)으로, 조선 시대 불교 목공예품 중 명문을 통해 제작 시기가 명확하게 파악된 매우 희소한 사례다.

조선 후기 불교 목공예품으로 경장을 비롯해 목어(木魚), 불연(불연, 의식용 가마), 촛대, 업경대(業鏡臺, 생전에 지은 죄를 비추는 거울), 대좌(臺座, 불보살이 앉은 자리), 불단(佛壇) 등 다양한 종류가 제작되었으나, ‘구미 대둔사 경장처럼 제작 연대와 제작자를 알 수 있는 작품은 매우 드물다. 이러한 점에서 구미 대둔사 경장은 왼쪽 경장의 뒷면과 밑면에 제작 시기와 제작자, 용도 등을 두루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 후기 목공예를 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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