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스라엘 왕국, 분열-혼란 끝에 앗시리아에 멸망
북이스라엘 왕국, 분열-혼란 끝에 앗시리아에 멸망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02.2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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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 지파로 구성, 7명 왕 살해, 10번 왕조교체…210년간 19대왕 등극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유대민족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에브라임 지파의 여로보암(Jeroboam)이 북쪽 10개 지파를 대표해 독립을 선언하고 초대 왕이 되었다. 북왕국은 이스라엘이란 국명을 사용했다.

북왕국은 10개 지파가 모여 하나의 나라를 건설했기 때문에 왕조가 안정되지 못했다. 200년 동안에 19명의 왕이 등극했지만, 그중 무려 7명이 살해되고, 10번의 왕조교체가 있었다. 이에 비해 유다 왕국은 멸망할 때까지 다윗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갔다.

 

여로보암이 독자적인 신전을 짓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 (Claes Corneliszoon Moeyaert, 1641) /위키피디아
여로보암이 독자적인 신전을 짓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 (Claes Corneliszoon Moeyaert, 1641) /위키피디아

 

북왕국의 초대왕 여로보암은 독자적인 성전을 만든다. 금송아지 두 마리를 만들어 하나는 베델(Bethel)에 두고, 다른 하나는 북쪽의 단(Dan)에 두었다. 베델은 남왕국의 수도 예루살렘보다 유서 깊은 성지였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곳이며, 야곱이 꿈에서 주님의 계약을 확인한 곳이다. 하나님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사다리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북왕국은 베델에 성전을 지어 남왕국으로부터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북왕국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예배보러 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금송아지는 우상숭배로, 이종교의 산물이었다.

새 나라를 건설한 여로보암은 왜 금송아지의 우상을 신전에 세웠을까. 일부 성서학자는 그가 아브라함의 엘(El)로 되돌아가려 했을 것으로 해석한다. 유대인들의 원시종교 속에 농업의 신인 송아지가 존재하고, 농업을 하는 백성들이 그 신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서의 저술자들은 여로보암이 죄를 지었다고 규정했다, 당장에 예언자 한 사람이 나타나 여로보암이 지은 베델 제단을 규탄했다. 예언자는 이 제단이 갈라지고. 그 위에 재가 쏟아질 것이라고 한다.

여로보암은 2대를 넘기지 못하고 잇사갈 지파의 바아사(Baasha)에게 왕위를 뺏기고 만다. 바아사 가문도 2대를 넘기지 못하고 시므리와 오므리로 왕조로 교체된다.

 

오므리 왕의 석판(Mesha Stele) /위키피디아
오므리 왕의 석판(Mesha Stele) /위키피디아

 

오므리(Omri) 왕은 수도를 사마리아(Samaria)로 옮겼다. 성서에는 오므리 왕이 소유자 세멜(Shemer)에게서 이 땅을 샀다고 해서 사마리아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했는데,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구역 나블루스(Nablus)엔 그 유적이 발굴되었다.

오므리 왕 시기에 다윗과 솔로몬 시절에 이스라엘의 동북쪽 국경에 있던 조공국가 아람-다마스쿠스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 국경을 위협했다. 성서에는 이 나라가 시리아(Syria)로 등장한다. 오므리 왕은 시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페니키아의 도시국가 시돈(Sidon)과 결혼동맹을 통해 연대를 형성했다.

 

선지자 엘리야가 아합왕과 왕비 이세벨을 만나고 있다. (Francis Dicksee) /위키피디아
선지자 엘리야가 아합왕과 왕비 이세벨을 만나고 있다. (Francis Dicksee) /위키피디아

 

오므리의 아들 아합(Ahab) 왕은 시돈왕 엣바알(Ethobaal)의 딸 이세벨(Jezebel)을 아내로 맞았으므로, 시돈의 신인 바알(Baal)을 주신으로 모셨다.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짓고 제단을 세웠고, 아세라(Aherah) 목상도 세웠다.

구약성서 저술자들은 아합 왕이 그 이전의 이스라엘 왕들보다 더 심하게 주 이스라엘의 하나남을 진노케 하였다고 설명했다. (열왕기상 17:33) 이때 엘리야(Elijah)라는 선지자가 나타나 바알 신의 예언자와 대결한다. 물론 성서에는 엘리야가 승리하는 것으로 결말지어진다.

 

시리아는 북이스라엘 왕국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시리아보다 더 강력한 강력한 적이 등장했으니 앗시리아(Assyria).

앗시리아는 BC 30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이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앗시리아는 아브라함 시대까지만 해도 바빌로니아의 예속국가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BC 15세기 이후 점차 세력을 확대해 독립국가로 발전하면서 BC 9세기 경에 메소포타미아 북쪽 지역을 거의 다 차지했다.

가나안 동북쪽에 거대한 세력이 등장하면서 오랫동안 반목 관계에 있던 이스라엘, 시리아, 이집트, 페니키아가 동맹 관계를 맺었다.

 

앗시리아와 반앗시리아 동맹국의 전투가 BC 853년에 시리아 북부 카르카르(Qarqar)에서 벌어졌다. 카르카르 전투(Battle of Qarqar)는 구약성서에 기록되지 않고, 1861년 터키 남동쪽 쿠르크(Kurkh)에서 발견된 석판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앗시리아 왕은 살만에셀 3(Shalmaneser III)이고, 반앗시리아 동맹에는 이스라엘, 시리아, 암몬, 아리비아, 이집트, 하맛 등 12개국이 포함되었다. 이스라엘군의 지도자는 아하부라고 표시되었는데, 아합왕일 가능성이 높다. 석판에는 앗시리아의 승리로 기록되었지만, 역사가들은 이 전투가 무승부로 관측한다.

 

검은 오벨리스크에 그려진 그림, 북이스라엘의 예후 왕이 살만에셀 3세에게 허리를 굽혀 조공을 바치고 있다. /위키피디아
검은 오벨리스크에 그려진 그림, 북이스라엘의 예후 왕이 살만에셀 3세에게 허리를 굽혀 조공을 바치고 있다. /위키피디아

 

이 전투 이후 앗시리아는 잠시 공격을 멈추었으나 힘을 비축한 후 북이스라엘의 예후(Jehu) 왕 시절에 다시 압박해 조공을 받았다. 구약성서 열왕기엔 이런 기록이 없다. 하지만 1846년 고대 앗시리아의 도시 님루드(Nimrud)에서 발견된 검은 오벨리스크 석상에는 예후 왕이 허리를 굽혀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북이스라엘 왕국이 앗시리아의 조공국이 된 것이다.

 

구약성서 열왕기에 예후 왕은 국내에 바일 숭배자들을 척결하고 야훼 종교로 철저하게 복귀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앗시리아에게 굴욕당하면서 종교로 내부를 단결시켰음을 반증한다.

하지만 야훼의 종교가 앗시리아의 야욕을 꺾지는 못했다. 앗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조공국으로 두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베가(Pekah) 왕 시절에 앗시리아 디글랏빌레셀(Tiglath-Pileser III) 왕이 북이스라엘을 쳐들어와 아온과 아벨벳, 마아가, 야노아, 게데스, 하솔, 길르앗, 갈릴리, 납달리등을 점령한다. 그리고 그 지역의 주민들을 앗시리아로 데려갔다. (열왕기하 16:29) 북이스라엘은 수도 사마리아만 남겨놓고 모두 점령되었다.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은 호세아(Hoshea). 그는 앗시리아가 베가 왕을 쫓아내고 세운 괴뢰 왕으로 추정된다. 호세아 왕은 이집트와 연대해 앗시리아에 대항할 것을 시도하다가 앗시리아 군에 잡혀 감옥에 갇힌다. 이어 사마리아 성이 함락된다.

이로써 북이스라엘 왕국(BA 930~BC 720)은 여로보암이 독자왕국을 수립한지 210년만에 멸망한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윙위계승 /위키피디아
북이스라엘 왕국의 윙위계승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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