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폭동 진압에 직접 출동한 워싱턴 대통령
위스키 폭동 진압에 직접 출동한 워싱턴 대통령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3.04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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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이모저모⑨…위스키 세 부과에 펜실베이니아 서부인들 반발

 

위스키는 보리, 옥수수, 라이, 밀 등을 재료로 만든 증류주다. 이 술은 알코올 농도가 높기 때문에 조금만 마셔도 빨리 취하고, 가격이 비싸다. 제조업자의 입장에서는 위스키가 맥주에 비해 운송비를 절약할수 있다.

미국이 유럽인들에 의해 개척되면서 위스키 생산업자들도 생겨났다. 이민자들은 곡식을 생산하고 남은 것으로 술을 담았다. 대형 증류업자도 있었지만 영세농은 소규모 가내 공업으로 위스키를 생산했다.

미국 독립초기에 위스키 폭동(Whiskey Rebellion, 1791~1794)이란 사건이 있었다. 연방정부가 위스키 제조업자에게 세금을 물리자, 펜실베니아 서부 농민들이 이에 반발하며 일으킨 폭동이다. 폭동규모가 워낙 커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했다. 미국 역사상 군통수권자가 직접 군대를 지휘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발단은 17913월 연방정부가 위스키에 대해 소비세를 과세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연방정부가 독립전쟁을 수행하며 발행한 막대한 국채를 상환하기 위해 수입관세를 한껏 올렸지만 그곳으로 모자라 상품에 대해 최초로 위스키에 세금을 물린 것이다. 입법자들은 사치세 또는 죄악세의 개념으로 위스키에 세금을 부과했다. 청교도 도덕군자들의 눈에는 위스키에 취해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꼴불견이었던 것이다. 위스키 세 부과를 주도한 인물은 연방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튼(Alexander Hamilton)이었다.

세금은 두가지 방식으로 부과되었다. 대형 제조업자에게는 고정금액을 적용했고, 개별 농민에게는 갤런당 세금을 부과했다. 대형업자는 위스키를 많이 생산할수록 세금부담이 줄지만 소규모 가내제조업자는 생산량에 일정비율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따라서 대형업자는 갤런당 6센트, 소형업자는 갤런당 9센트의 세금을 무는 결과가 되었다. 대형업자들은 주로 동부지역에 밀집해 있었다.

특히 펜실베이니아 서부 농민들의 불만이 컸다. 펜실베이니아 서부인들은 제조한 위스키를 소비지인 동부 도시로 수송하기 위해 애팔리치아 산맥을 넘어야 했다. 당시 도로 사정은 엉망이었다. 인디언들이 다니던 길에 나무를 베어 낸 길인데, 여름에는 먼지투성이었고, ·가을에는 진흙탕이 되기 일쑤고, 오히려 길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철이 다니기 수월했다고 한다. 당연히 애팔라치아 산맥 서부에 사는 농민들의 이문이 동부 제조업자에 비해 박할 수밖에 없었다.

펜실베니아 서부인들은 위스키세가 개척자(Frontier)를 차별하는 법이라며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위스키 반란 가담자들이 세리에 타르를 칠하고 깃털을 붙인 다음 작대기에 올려 창피를 주고 있다. (1880년 그림) /위키피디아
위스키 반란 가담자들이 세리에 타르를 칠하고 깃털을 붙인 다음 작대기에 올려 창피를 주고 있다. (1880년 그림) /위키피디아

 

처음에는 청원운동으로 시작되었다. 펜실베이니아 서부 4개 카운티의 위스키 제조농가들은 1791년 위원회를 조직해 위스키세 폐기를 연방의회와 펜실베이니아 주의회에 청원했다. 덕분에 세금은 갤런당 1센트 줄어 들었다. 하지만 세금 부과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 펜실베니이아 서부인들은 청원이 실패했다고 울분을 토했다.

1791911일 펜실베이니아 워싱턴 카운티에서 폭도들이 세금징수원 로버트 존슨을 붙잡아 옷을 벗겨 온몸에 타르를 칠하고 새의 깃털을 붙이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유형의 체벌은 중세 유럽에서 행해지던 것으로 인간 이하의 대우를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해자를 찾아 영장을 발부하는 법원 서기에 대해서도 같은 유형의 린치가 가해졌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서부지역에 세금 징수가 중단되었다. 펜실베이니아의 소식이 전해지자, 메릴랜드, 버지니아, 뉴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의 서부와 켄터키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위스키세 납부를 거부했다.

 

재무장관 해밀턴은 펜실베이니아 서부인들의 세금 거부운동을 연방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군대를 동원해 폭력사태를 진압해야 한다고 강경론을 펼쳤지만, 검찰총장은 구체적인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군의 동원을 반대했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펜실베이니아 서부의 반란 조짐에 당황했다. 당시 연방수도가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에 있었는데, 이러다간 수도가 위협받지 않을까, 걱정했다.

해밀턴은 장군출신 존 네빌(John Neville)을 펜실베이니아 서부로 파견해 세금을 징수하라고 했다. 네빌은 버지니아 태생으로 그 스스로도 위스키 생산업자였다. 그는 처음에는 위스키세를 반대했지만, 얼마후 마음을 바꿨다. 이런 점도 펜실베이니아 소농들을 분노케 한 요인이었다.

네빌은 세무서로 사용하기 위해 한 가옥을 임대했는데, 얼마 안가 주인이 퇴거를 요청했다. 마을 주민들이 연방세리들에게 야합하는 사람들도 비난했기 때문에 집주인이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1722년 여름, 펜실베이니아 서부인들은 밍고 크리크 협회(Mingo Creek Association)를 조직하고 세금징수원과 그들의 협조자에 대해 협박을 가했다.

 

네빌은 서부인들에게 원흉이 되었다. 1793년 내내 애팔라치아 개척지에선 세금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그해 6월 워싱턴 카운티에선 네빌 인형을 태우는 군중집회가 열렸다. 11월엔 세금징수원 벤저민 웰스의 집이 폭도의 공격을 받았다. 워싱턴 대통령은 가해자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하라고 지시했지만, 집행이 불가능했다.

 

1794년엔 폭력사태가 극에 달했다. 연방검찰이 세금납부를 거부한 60명의 위스키 농가에 소환장을 발부했다. 당시 연방 법원은 필라델피아에 있었는데, 서부와의 거리가 500km나 되었다. 법원에 한번 다녀오려면 며칠이 걸려야 했다. 탈세자들은 법원출두를 거부했다.

1794715일 세무공무원 네빌이 연방경찰을 동반해 앨러게니 카운티의 탈세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총이 발사되었다. 다음날 30명의 밍고 크리크 회원들이 네빌의 집을 에워싸고 총을 쏜 연방경찰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네빌은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총을 쏘아댔다. 폭도가운데 한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양측이 총격전을 벌였지만 네빌은 노예들에게도 총을 줘 방어에 성공했다.

717일 폭도들은 600명을 규합하고, 독립전쟁에서 활약하다 소령으로 전역한 제임스 맥파레인(James McFarlane)에게 지휘를 맡겼다. 네빌도 폭도들이 또 몰려 올 것에 대비해 10명의 군인을 보충해 두었다. 그리고 네빌은 야산으로 도주했다.

600명의 무장폭도가 집을 포위하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항복했다. 맥팔레인이 열린 문으로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총성이 울렸다. 멕팔레인은 중상을 당했고, 그 자리에서 2명의 반란자들이 사망했다. 분노에 찬 반란세력은 세리와 연방군인들을 제압했다. 군인들은 돌려보내고, 네빌의 조카와 경찰 한 명을 감금했다.

 

맥팔레인은 이 총격전에서 영웅이 되었다. 서부인들은 분노했고, 온건파들은 입도 열지 못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817,000명의 군중이 브래독 광장(Braddock's Field)에 모였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군중들은 부잣집을 약탈하고 그들은 영국군의 기지였던 파예트 요새를 점거하고 프랑스 혁명가를 불렀다. 데이비드 브래드포드(David Bradford)라는 한 과격파는 프랑스 혁명에서 사용된 기요틴을 세우자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공포정치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임을 자처했다. 일부에선 펜실베이니아 5개 카운티와 버지니아 1개 카운티를 합쳐 미국 연방에서 탈퇴해 독립공화국을 세우고 영국이나 프랑스에 붙자고 주장했다.

 

필라델피아에 있던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반란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각료회의가 열렸다. 대부분 병력 동원을 지지했으나, 국무장관 에드먼드 랜돌프가 홀로 협상을 통해 해결할 것을 주장했다. 대통령은 두 가지 안을 모두 수용했다. 협상팀을 보내되 다른 한편에선 병력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역사평론가들은 워싱턴 대통령이 협상할 의사가 없었다고 분석한다. 대통령은 협상이 명분용이고 군대로 진압할 것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펜실베니아 검찰총장, 법원장, 상원의원으로 구성된 협상팀이 폭도들을 만났다. 서부인들은 정부의 협상중재에 반신반의했다. 일부는 정부와 타협하자고 했고, 일부는 대치하자고 했다.

 

위스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사열하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 /위키피디아
위스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사열하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 /위키피디아

 

협상팀은 결국 군대의 파견을 워싱턴 대통령에게 요구했고, 대통령은 예정대로 군대를 파병했다.

인원은 12,950명으로, 당시로선 동원가능한 최대 병력이었다.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버지니아, 메릴랜드에서 모집되었다. 이들은 간단한 훈련을 거쳐 펜실베이니아 서부로 이동했다.

930일 워싱턴 대통령은 필라델피아를 떠나 군대 주둔지에 도착했다. 그는 전선의 야전을 방문한 최초이자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다.

연방군은 179410월에 펜실베이나아 서부로 진격했다. 반란자들은 연방군의 압도적인 숫자에 놀라 저항하지 않았다. 군인들은 반란자로 지목된 2,000명을 체포했다. 그리고 죄질이 약한 사람 대부분을 풀어주었다. 브래드포드 등 과격파들은 켄터키주로 도망쳤지만 6개월 내에 모두 체포되었다. 법원은 이들 중 2명을 반역죄로 몰아 사형을 언도햤다. 하지만 연방정부는 끝내 모두 사면했다. 이들의 반역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 연방정부의 세금정책이었기 때문이다.

1800년대초, 위스키 세는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에 오르면서 폐기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Whiskey Rebe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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