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은 궁궐현판 글씨 남긴 조선 왕은 영조
가장 많은 궁궐현판 글씨 남긴 조선 왕은 영조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1.03.04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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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궁궐에 왕과 왕세자의 글과 글씨는 120여점…이중 영조의 것은 50점

 

우리 조상들은 궁궐이나 전각, (), (), () 등의 건물에 나무판으로 현판(懸板)을 만들어 내걸었다. 특히 궁궐의 현판은 왕이 내린 지침이나 좋은 글귀, (), 명구(名句) 등을 양각(陽刻) 또는 음각(陰刻) 등으로 새겨져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현판 770점은 2018년에 조선왕조 궁중현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에 등재되어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바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현판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궁궐의 여러 전각이 훼철되면서 철거되어 별도로 모아 관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꺼번에 모아두다 보니, 원래 걸었던 전각의 위치 파악에 어려움이 있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도록 『조선왕실의 현판Ⅰ』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도록 『조선왕실의 현판Ⅰ』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 시대 궁궐에 걸렸던 현판들을 조사해, 그 결과를 조선왕실의 현판Ⅰ』이라는 책자로 정리했다. 이 책자는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경복궁 현판 184, 창덕궁 현판 91, 창경궁 현판 44, 경희궁 현판 41, 덕수궁 현판 25점과 참고도판(13) 등을 권역별로 세분화해 수록했다. 책자는 궁궐별로 도면을 그려 현판의 게시 장소를 명확히 했고, 현판에 담긴 다양한 내용을 풀이해 국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궁궐 현판 중에서 시기가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것은 창덕궁 홍문관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1652(효종 3)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쓴 옥당 현판이며, 가장 늦은 시기에 제작된 것은 1904(광무 6) 덕수궁 화재 이후 제작된 20세기 초 덕수궁에 걸었던 현판들이다.

이번에 새롭게 확인된 내용도 있다.

1980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간한 한국의 고궁책자에 수록된 1958년경 사진 자료를 통해, 경복궁 근정전 권역의 융문루(隆文樓), 융무루(隆武樓) 같은 현판들이 원래 걸려 있던 위치를 파악했다.

양화당(養和堂) · 대은원(戴恩院) 현판과 같이 현판을 만들 때 양각(돋움새김, )이나 음각(오목새김, )뿐만 아니라 금박을 붙이거나 나무 등으로 글자를 별도로 만들어 부착하는 제작 방식을 의궤기록과 실물 현판을 통해서도 확인했다.

또한, 덕수궁의 정문이었던 인화문(仁化門) 현판이 본래 걸려 있었던 모습을 독일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1902년 촬영된 새로운 사진 자료를 통해 확인했다.

창덕궁의 대은원 중수 내용을 새긴 현판은 내관이 글을 짓고 쓰기도 한 매우 희귀한 사례로 밝혀졌다.

 

인화문(1902) /문화재청
인화문(1902) /문화재청

 

조선 시대 궁궐은 국가 운영의 공간이자 왕실의 생활 터전으로 유교 통치 이념과 오행사상, 풍수지리를 반영하여 세워졌다. 궁궐의 여러 전각과 당(), (), () 등의 건물에는 그 성격과 기능에 따라 좋은 글귀를 따서 이름을 짓고 현판으로 만들어 걸어 간판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밖에 현판에는 국왕의 선현에 대한 추모, 신하들이나 후손들에게 내린 지침이나 감회를 읊은 시를 비롯하여 조선의 국가 이념과 왕실에서 추구했던 가치관이 담긴 글이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현판은 선조, 숙종, 영조, 정조, 고종 등 왕이 쓴 글씨와 당대 최고 명필가의 글씨를 받아 장인들이 정교하게 새겼고, 화려한 문양과 조각으로 장식했다.

특히 왕과 왕세자의 글과 글씨는 120여 점에 달하는데, 그중 영조는 오랜 재위 만큼 50점에 달하는 가장 많은 어제(御製, 왕이 지은 글)와 어필(御筆, 왕이 쓴 글씨) 현판을 남긴 왕이기도 하다. 어필과 예필 현판은 작은 글씨로 어필, 예필(睿筆. 왕세자가 쓴 글씨)이라고 새겨 존귀한 글씨임을 나타냈고, 봉황, 칠보, 꽃문양 등을 섬세하게 그린 테두리를 둘러 격을 높였다. 또한, 사롱(紗籠)이라는 직물로 덮거나 여닫이 문을 달아 왕의 글과 글씨로 된 현판을 보호하기도 했다. 이처럼 현판은 건축과 서예, 공예가 접목된 기록물이자 종합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올해 종묘, 능원묘(陵園墓), 수원 화성 등에 걸었던 현판도 중점적으로 조사 연구하고, 안료 분석 자료, 사롱 분석 결과 등을 수록한 조선왕실의 현판Ⅱ』12월 발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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