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캐나다를 병합하려다 실패한 영미전쟁
미국이 캐나다를 병합하려다 실패한 영미전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3.06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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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이모저모(10)…나폴레옹 전쟁기, 미국이 선전포고, 무승부로 끝나

 

때는 1812, 유럽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페인을 제압하고,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제국을 쳐들어 갔다. 영국은 나폴레옹에 대항하기 위해 모든 병력을 유럽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때 미국이 영국의 등 뒤를 친 것이 영미전쟁이다. 18126월에 시작되어 18152월까지 28개월에 걸친 이 전쟁은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서로 승자라고 주장했다.

 

불씨는 영국이 제공했다.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 상선을 나포해 항해사들을 전쟁에 투입했고, 미국이 프랑스와 교역하는 것을 차단했다. 수입관세에 의존하던 미국 연방정부의 세수는 급감하고, 반영 분위기가 극도로 달아 올랐다.

당시 대통령은 4대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이었다. 매디슨은 주전론에 휘둘려 181261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곧바로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였던 캐나다를 침공했다. 하지만 상공업 중심지였던 뉴잉글랜드를 비롯해 북부주들은 전쟁에 반대했다. 북부에서는 당시 이 전쟁을 매디슨의 전쟁(Mr. Madison's War)이라 비아냥거렸다.

 

영미전쟁 때의 교전지역 /위키피디아
영미전쟁 때의 교전지역 /위키피디아

 

당시 주전론자들의 생각은 유럽의 전쟁으로 영국이 북아메리카를 방어하기 어려운 허점을 이용해 캐나다를 접수하자는 것이었다. 독립한지 40년쯤 되어가는 동안에 국력도 커졌으니 영국인들을 아메리카대륙에서 몰아낼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매디슨 대통령은 영국의 북미식민지를 병합해 세인트루이스 강을 오대호와 연결하는 무역로로 활용할 구상을 가졌다. 또 캐나다의 풍부한 목재를 활용해 전함을 건조해 카리브해를 장악할 해군력을 육성한다는 생각도 했다. 존 아담스 하퍼(John Adams Harper)라는 하원의원은 의회 연설에서 미국 연토는 자연의 경계로 남으로 멕시코만, 북으로 얼어붙은 동토까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영국 해군의 도발은 빌미였고 미국의 속셈은 차제에 캐나다를 병합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캐나다에는 미국 독립전쟁 때 퇴각한 왕당파와 미국 이민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미국 지도부는 공격이 시작되면 미국 이민자들이 영국에 등을 돌리고 자신들을 지지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얼마후 곧바로 허상임이 드러난다.

당시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온타리오 중심의 어퍼 캐나다(Upper Canada)와 퀘벡 지역의 로어 캐나다(Lower Canada)로 분리 통치했다. 게다가 미시건,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 위스콘신 등지의 인디언 원주민들이 테쿰세 연맹(Tecumseh's Confederacy)라는 준국가를 조직해 미국의 서진을 저지하고 있었는데, 영국이 원주민 조직과 동맹을 맺고 무기를 지원했다.

 

테쿰세 /위키피디아
테쿰세 /위키피디아

 

하지만 미국은 캐나다 공격에 실패했다. 윌리엄 헐(William Hull) 장군이 국경선을 넘어 온타리오 윈저를 공격했지만 미국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국경을 넘은지 얼마 되지 않아 보급이 끊어지고 화력이 부족해 졌다. 미군은 영국 정예군대에 퇴각당하고 거꾸로 디트로이트마저 영국군에 넘겨주고 말았다.

패전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전쟁비용 조달이었다. 연방의회는 전비로 1,600만 달러의 차입을 의결했을뿐 어떻게 조달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재무장관 앨버트 갤러틴(Albert Gallatin)은 국채발행을 추진했지만, 1813313일까지 400만 달러밖에 조달하지 못했다. 북부 상공인들이 전쟁을 거부하는 바람에 채권 매각이 어려웠다. 가뜩이나 1811년 제1차 중앙은행을 해산했기 때문에 자금을 유통하는 길은 막막했다.

이때 큰 전주를 찾았는데, 1차 중앙은행 본점을 인수한 스티븐 지라드(Stephen Girard)였다. 프랑스 이민자 출신인 그는 재무장관의 요청에 공모로 조달된 이외의 채권 물량을 매입하겠다고 나왔다. 지라드가 선선하게 나오면서 국채매각이 풀렸고, 전비는 조달되었다. 한 사람의 자금에 의존하는 전쟁은 오래 버티기 어려웠다.

 

1814년 8월 영국군의 워싱턴 D.C. 방화 /위키피디아
1814년 8월 영국군의 워싱턴 D.C. 방화 /위키피디아

 

당시 영국의 해군력은 최강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유럽전선에 주력하는 바람에 아메리카 전선에선 방어전과 기습전을 펼치며 미국의 기력을 약화시키는 전략을 채택했다. 미국군은 캐나다 국경을 돌파하지 못했다. 오히려 영국 해군의 해상 봉쇄로 무역이 중단되어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18148월엔 영국 해군이 체사피크만에 정박헤 수도 워싱턴 D.C.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과 의사당이 불타는 치욕을 당했다.

영국군에 의해 해상과 육상이 봉쇄되면서 미국군은 영내의 인디언들과 전쟁에 몰두했다. 영국은 미군을 교란시키기 위해 서부인디언들의 부족연맹체인 테쿰세 연맹을 지원했다. 영국은 캐나다와 미국 사이에 완충지대를 형성하기 위해 인디언들에게 독립국가를 실현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현재 오하이오, 인디애나, 미시건, 일리노이, 위스콘신의 5개 주는 1783년 미국 독립을 인정한 파리 조약에서 미국 영토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당시 조약 참여국들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인디언들의 존재를 무시했다.

영미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인디언들은 독립을 추구했다. 독립 지도자로 오하이오주 일대에 살던 쇼니족(Shawnee) 출신의 테쿰세(Tecumseh)가 부족회의에서 선출되었다.

미국군은 인디언들과의 전투에서는 연전연승했다. 테쿰세는 1813910일 에리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가 죽은후 인디언 연맹은 해체되었다.

 

영미전쟁 당시 영국군의 해상봉쇄 라인 /위키피디아
영미전쟁 당시 영국군의 해상봉쇄 라인 /위키피디아

 

영미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영국에서 상인들을 중심으로 협상론이 대두되었다. 영국 상인들은 미국과 휴전하고 무역 상대국으로 인정하자고 요구했다. 무엇보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면서 영국 내부에서 염전론(厭戰論)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유럽 전쟁에서 이겼으니, 미국과의 전쟁을 끝내자는 여론에 따라 영국 정부도 협상에 임했다.

협상의 결과는 전쟁 이전의 현상유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북부 국경은 예전대로 유지되면서 미국이 캐나다를 통합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바하마 제도도 영국령으로 남게 되었다.

다만 영국은 협상 초기에 인디언의 나라를 주장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인디언들만 강대국의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진 결과가 되었다.

미국은 전쟁 막바지에 미시시피강 하구의 스페인 식민지 뉴올리언스를 점령해 영토로 만들었다.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은 후에 대통령이 된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하고 세계의 패권을 쥐게 되었다. 이후 미국도 급격한 산업화를 진척시킨다. 두 나라는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았고, 미국은 이후 캐나다를 넘보지 않았다.

 


<참고자료>

Wikipedia, War of 1812

Wikipedia, Burning of Washington

Wikipedia, Tecumseh's confede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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