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 대통령의 편견이 초래한 1837 美 경제공황
잭슨 대통령의 편견이 초래한 1837 美 경제공황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3.0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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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이모저모(11)…은행을 사악한 집단으로 몰아 제2차 중앙은행 해산

 

영미전쟁(1812~1815)을 치르면서 미국은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다시 절감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부채를 상환하고 무질서하게 발행되는 지폐의 가치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정치권에서는 다시 제2차 중앙은행 설립이 논의되었다. 자신의 임기 중에 1차 중앙은행을 해산했던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은 중앙은행의 재개를 추진하게 된다.

 

1815년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 북미에서 영미전쟁이 동시에 끝난후 유럽과 북미의 경제는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특히 미국은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남부의 면화는 높은 가격에 대량으로 수출되고, 서부 개척지가 불하되면서 초유의 호황을 구가했다. 유럽의 자본이 미국으로 유입되면서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에 투기붐이 형성되었다.

은행들은 초유의 호황에 대응해 지폐를 발행했다. 당시 지폐는 중앙은행이 발행하지 않고 은행들이 정화(금과 은)3배를 발행해 유통시켰다. 규제가 느슨한 로드아일랜드에선 자산 대비 2만배의 지폐를 발행하기도 했다. 은행 이외에도 시 정부나 기업, 심지어 개인도 임시지폐를 발행하고, 필라델피아 식료품 협회도 지폐를 찍어낼 정도였다.

지폐의 종류는 수천가지였고, 외국통화, 창고보관증권, 주의 신용장도 혼용되었다. 각종 지폐의 목록과 그림, 가격등을 정리한 책자가 나오기도 했다.

 

통화시장의 안정을 위해 2차 중앙은행 설립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공격과 수비가 전환된다. 18111차 중앙은행 연장안에 반대한 켄터키 주의 헨리 클레이(Henry Clay)와 사우스캐롤라니주의 존 칼훈(John C. Calhoun)이 법안을 지지하는 한편, 중앙은행의 지지자였던 매사추세츠의 대니얼 웹스터 (Daniel Webster)가 반대하고 나섰다. 농업주인 사우스캐롤라이나와 개척주인 켄터키는 금과 은의 정화가 북동부로 유출되는 바람에 부족한데 비해 공업주인 매사추세츠는 굳이 남서부로 정화를 공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2차 중앙은행이 1816년에 설립되었다. 명칭도 1치 때와 같이 합중국은행(the Bank of the United States)이었고, 본점도 필라델피아에 두었다. 인가 기간도 1차 때와 마찬가지로 20년이었고, 연방정부 지분율도 20%였다.

 

하지만 일반은행들이 급격하게 팽창해 있었기 때문에 2차 중앙은행의 역할을 1차 때보다 미약했다. 1819년 미국 최초의 불황이 발생했을 때 중앙은행이 뒤늦게 대처한데다 볼티모어 지점장의 사기 행위에 휘말리는 등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1823년 니콜라스 비들(Nicholas Biddle)이 총재로 부임한 이후 중앙은행은 안정적인 신용과 통화시스템을 유지하는데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은행 제거 명령으로 핍박받는 금융인들. (1833년 삽화) /위키피디아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은행 제거 명령으로 핍박받는 금융인들. (1833년 삽화) /위키피디아

 

이 무렵 강력한 중앙은행 반대자가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그는 바로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이었다. 잭슨은 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공부를 해 테네시 주에서 변호사가 된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그는 부동산 사업을 했는데, 채권자의 사기에 휘말려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한 이후 은행가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은행에 대한 그의 인식은 이때 형성되었다.

잭슨은 그후 후에 테네시 민병대장이 되어 영미전쟁에서 인디언을 격퇴하고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영웅으로 부상했다. 잭슨은 테네시에서 연방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거쳐 1824년에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었는데, 선거에서 선거인단의 다수표를 얻었으나 과반수에 미치지 못해 연방 하원의 투표에서 낙선하게 되었다. 이어 1828년 대선에서 압도적인 표를 얻어 백악관에 입성한다. 그는 극빈층 출신으로 서부의 항구도시가 아닌 테네시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점에서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잭슨은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직설적이고 공격적이며 자신의 신념에 투철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 경험을 진리로 믿었으며, 은행에 대한 그의 반감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잭슨은 부동산 사업을 하면서 사기꾼에 당해 파산의 공포에 시달린 기억을 잊지 않았다. 그는 금과 은의 정화만 돈이며, 지폐와 신용장, 어음, 수표등은 일종의 사기라고 믿었다. 그의 눈에는 은행이 이런 사기꾼들의 집합이며, 중앙은행은 부자와 은행가들의 대변자였다.

 

잭슨은 대통령 취임 이후 연방정부의 부채를 줄이는데 주력했다. 그는 스스로 부채에 시달린 경험이 있기 때문에 국채는 국가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잭슨은 연방정부 부채줄이기에 나서 183511일부로 연방정부의 모든 빚을 청산했다. 미국 역사상 국가부채가 조금도 없던 때는 잭슨 시기 이외에 전무후무하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 국채가 사라진 것은 금융산업에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 은행들은 국채를 담보로 지폐를 발행했는데, 국채가 사라지면서 은행권 발행량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 또한 잭슨이 노리던 바였다.

 

앤드류 잭슨 대통령과 니콜라스 비들 중앙은행 총재와의 싸움을 풍자한 삽화 /위키피디아
앤드류 잭슨 대통령과 니콜라스 비들 중앙은행 총재와의 싸움을 풍자한 삽화 /위키피디아

 

중앙은행 총재 비들은 잭슨의 지지자였다. 잭슨이 취임하기 이전에 연방대법원은 중앙은행의 합헌적 지위를 인정했고, 연방재무부도 중앙은행을 파트너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비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잭슨이 집권한 이후 은행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자, 비들은 중앙은행 수호자로 변신한다. 비들은 잭슨이 재선에 앞서 합중국은행의 시한을 7년 더 연장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했다. 중앙은행의 허가시한은 1836년이었는데, 비들은 1832년 대선을 앞두고 잭슨과 타협을 모색하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 잭슨은 본색을 드러냈다. 그가 재선 임기 중에 합중국은행의 시한이 만료되면 재허가를 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잭슨은 중앙은행 허가 연장안에 이의를 제기했다.

1932년 미국 대선은 중앙은행 허가 연장이 최대이슈로 부상했다. 미국 역사에서 이를 은행전쟁(Bank War)이라 부른다.

비들은 1832년 대선에서 잭슨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경쟁자인 켄터키 주의 헨리 클레이(Henry Clay)를 지지했다. 비들은 1832년 여름 중앙은행 허가를 15년 연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켜달라고 의회를 압박했다. 의회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잭슨 대통령은 법안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잭슨은 중앙은행이 독점기업이며, 부유층을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의회는 대통령의 거부권을 뒤집지 못했다.

 

그해 11월 선거에서 잭슨은 압승을 거뒀다. 중앙은행은 4년이나 기한이 남았지만 사실상 식물은행이 되어 버렸다.

잭슨은 재선 직후 중앙은행에 대해 복수를 가했다. 잭슨 행정부는 1834년 중앙은행에 예치하는 연방예산을 빼내 일반 은행에도 예치하게 했다. 중앙은행은 자산이 줄어들면서 은행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된다.

18362월 제2차 합중국은행은 펜실베이니아 주법에 따라 일반은행으로 전환되어 중앙은행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 은행은 1839년에 지급불능 상태가 되어 1841년 청산되었다.

 

1837년 경기불황 때 앤드류 잭슨을 비난하는 삽화 /위키피디아
1837년 경기불황 때 앤드류 잭슨을 비난하는 삽화 /위키피디아

 

2차 중앙은행이 해산된 이듬해인 1837년 미국은 금융공황을 맞았다. 이번 공황은 1819년의 불황보다 길고 심각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없는데다 잭슨이 선포한 대통령령으로 정화만 유통되었기 때문에 은행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잭슨이 바라던 것이긴 하나 장기불황으로 실업자가 증가하고 공장가동이 중단되는 바람에 미국 경제는 심각한 하강국면을 맞게 되었다. 지도자의 개인적 편견이 얼마나 많은 오류를 초래해 국민들을 가난하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미국은 중앙은행이 없는 시기를 70여년간 보내다가 1907년 금융위4기를 겪은후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다시 깨닫고 1913년에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을 제정해 중앙은행을 다시 설립했다. 이 은행이 진화와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로 이어지고 있다.

 


<참고자료>

Wikipedia, 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

Wikipedia, Bank War

Wikipedia, Panic of 1837

Wikipedia, Andrew Jack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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