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기름 대체하기 위해 출발한 미국 석유개발
고래기름 대체하기 위해 출발한 미국 석유개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3.08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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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이모저모(12)…남획으로 고래기름 가격 급등, 대체재로 석유 부상

 

1790년대에 스코틀랜드의 발명가 윌리엄 머독(William Murdoch)이 석탄을 가열하면 노란 불꽃을 내는 기체가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해 가스등(gas lighting)을 발명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 시는 1796년에 이 첨단 제품을 바로 수입했고, 볼티모어도 가로등을 가스등으로 교체했다.

볼티모어의 미국 최초 가스등 /위키피디아
볼티모어의 미국 최초 가스등 /위키피디아

 

가스등을 켜기 위해선 가스제조업자가 석탄에서 가스를 생산해 파이프라인으로 수요처에 공급해야 했다. 도시의 가정에도 가스가 공급되었는데, 처음에는 폭발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켰지만 서서히 가정용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가스등은 밤에 마음 놓고 불을 밝힐수 있게 했고, 사람들은 취침 시간을 늦추고 책을 읽을수 있었다. 가스등으로 인해 책과 잡지 신문, 악보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가스등은 결정적 약점이 있었다. 파이프라인으로 연료를 공급했기 때문에 대도시에서만 사용할수 있었고, 가스가 타면서 지저분한 냄새와 이상한 소리를 발생시켰다. 폭발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해 준 것이 고래기름이었다.

고래기름을 사용한 등은 냄새와 연기도 없고 불빛이 밝고 광도가 높았다. 미국처럼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에선 파이프라인을 깔 필요가 없는 고래기름이 적격이었다.

 

고래잡이는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에 도착하기 이전에 인디언 원주민들에 의해 이뤄져 왔다. 초기 이민자들도 고래 잡이에 나서면서 뉴욕주 롱아일랜드와 매사추세츠주 앞바다의 섬 낸터컷이 중심지가 되었다. 초기에 포경 대상은 수염고래였는데, 잡기도 쉽고 죽으면 물에 떠 가져오기도 쉬워 ‘right whale’이라 불렀다. 당시 사람들은 수염고래의 수염을 활용했다. 고래 수염은 잘 휘고 잘 부러지지 않아 여성들의 의류 장식품과 코르셋 제품을 만드는데 유용했다.

1712년에 조업중에 풍랑을 만나 폭풍에 휩쓸려 먼바다로 나간 한 포경선이 향유고래(sperm whale)를 잡아 가져왔다. 향유고래의 머리에는 상당한 양의 향유(香油)가 나왔다. 향유고래의 기름은 양초를 만들기에 적합한 밀랍성 물질이었다. 이 기름을 태우면 밝고 깨끗한 빛이 나온다. 게다가 고래기름은 윤활유로도 쓰였다. 산업화 초기의 미국은 공장을 돌리는데 윤활유 사용이 급증하고 있었다.

 

향유고래는 돈이 되었다. 미국 동부바다에서 향유고래가 잡히면서 고래기름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한때는 3,000명의 선원들이 뉴욕주와 매사추세츠 항구에서 고래잡이에 나섰다. 향유고래는 먼바다에서 잡혔기 때문에 포경업자들은 원양어선을 건조하고 최신 작살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포경선들은 동부 해안을 벗어나 포르투갈령 아조레스군도, 알래스카, 뉴펀들랜드로 향했고, 1770년대에 뉴잉글랜드에서 생산한 고래기름은 14~18kg에 달했다.

 

1860년대 뉴잉글랜드의 고래잡이 /위키피디아
1860년대 뉴잉글랜드의 고래잡이 /위키피디아

 

포경선은 한번 출항하면 최소 1, 길게는 4년 동안 바다를 누비는데 때로는 물과 식품을 조달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먼 곳에 항구를 개발하기도 했다. 증기선의 경우 원료인 석탄을 공급받을 항구도 필요로 했다. 포경선이 드나드는 항구는 신흥도시로 발전했다. 알래스카와 캐나다 북부 이누이트족 거주지가 개발된 것도 고래 사냥 때문이었다. 태평양의 자그마한 섬들도 포경선에 의해 발견되었다. 1808년 남태평양의 핏케언 섬(Pitcairn Islands)에 바운티호 선원들이 숨어 살었는데 이를 발견한 것도 미국 포경선이었다.

1800년대에 접어 들면서 300여척의 포경선이 뉴잉글랜드의 프로빈스타운, 낸터컷, 뉴베드퍼드, 마블헤드의 항구를 거점으로 고래잡이에 나섰고, 1840년대엔 그 숫자가 700여척으로 늘어났다. 포경선 한척은 400의 고래기름을 싣고 돌아왓다.

미국의 포경산업은 1850~186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1851년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백경’(Moby-Dick)은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국의 고래기름과 향유 수입 추이 /위키피디아
미국의 고래기름과 향유 수입 추이 /위키피디아

 

하지만 지구상의 고래는 한정되어 있다. 인간이 등불로 사용하려고 남획하면서 고래의 개체는 줄어들었고, 포경선이 점점 더 먼 곳으로 가서 고래를 잡는 바람에 기름 값이 뛰었다. 1950년대에 고래기름 5의 가격이 3달러50센트였는데, 당시 숙련노동자의 주급이 5달러였던 시절이었다.

기술자들은 고래기름을 대체하는 연료의 개발에 나섰다. 석탄에서 추출한 등유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제조원가가 너무 비쌌다.

 

타이터스빌의 드레이크 유정박물관. 최초로 유전 개발에 성공한 곳이다. /위키피디아
타이터스빌의 드레이크 유정박물관. 최초로 유전 개발에 성공한 곳이다. /위키피디아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킨 사람이 조지 비셀(George Bissell)이란 청년이었다. 다트머스대 출신인 그는 1853년 황열병에 걸려 집에서 쉬던 중에 모교 교수인 딕시 크로스비(Dixi Crosby)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곳에 펜실베이니아에서 뽑아올린 석유(rock oil) 샘플을 보게 되었다. 당시 석유는 지표면에서 극소수 채취되었고, 의약품 정도로만 사용되었다.

비셀은 교수의 설명을 듣고 석유가 연소하면서 빛을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두뇌는 비상했다. 저 기름으로 등잔을 켜면 비싼 고래기름을 쓰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그는 석유를 양산하면 고래유와 석탄유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2살이었다.

비셀은 뉴욕으로 돌아가 자금을 조달하고 석유가 날만한 곳을 찾아 돌아다녔는데, 그곳이 펜실베이니아주 타이터스빌(Titusville)이었다.

비셀은 예일대의 화학자 벤저민 실리먼(Benjamin Silliman Jr)의 자문을 얻고 에드윈 드레이크(Edwin Drake)라는 기술자를 끌어들여 석유시추에 나서 1859828일 마침내 지하 21m 지점에서 석유를 발견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산유국가로 전환된다. 동시에 미국 불빛의 연료는 고래기름에서 석유로 대체되었다. 후에 각국은 고래 자원 보호를 위해 포경 제한에 관한 국제협약을 체결했다. 고래를 보호한 것은 이런 조약에 앞서 석유의 발견 때문이었다.

석유 등잔은 얼마 안가 전기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석유는 빛을 내는 연료뿐 아니라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여러 화학제품을 만드는 연료로서 지금까지 인류 최대의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참고자료>

Wikipedia, History of whaling

Wikipedia, Whaling in the United States

Wikipedia, Whale oil

Wikipedia, George Bissell (industria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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