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없던 시절, 얼음을 전세계에 판 미국인들
냉장고 없던 시절, 얼음을 전세계에 판 미국인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3.09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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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이모저모(13)…튜더가 개척, 북동부 얼음을 열대지방에 수출

 

겨울에 강이나 호수의 얼음을 잘라 석굴과 같은 곳에 저장했다가 여름철에 활용하는 방법은 옛날부터 있었다. 경주에 신라시대에 사용하던 석빙고 유몰이 남아 있고, 조선시대에 얼음을 저장했던 창고를 빙고라 했고, 지금도 빙고동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로마제국 시절에 아펜니노 산맥에서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에 사용했고, 프랑스에선 알프스의 얼음을 이용하기도 했다. 스페인인들이 남아메리카를 지배할 당시 안데스 산맥에 얼음창고를 만들어 여름에 사용했다.

 

프레데릭 튜더 /위키피디아
프레데릭 튜더 /위키피디아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추운 지방의 얼음을 열대지방에 가져다 팔면 장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 사람이 있다. 바로 미국의 프레데릭 튜더(Frederic Tudor, 1783~1864)라는 인물이다.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난 그는 13살때부터 사업을 시작했고, 열대지방인 카리브해 섬을 방문하고는 그곳에 얼음을 팔아보겠다는 돈키호테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23살이던 1806210, 그는 보스턴의 한 호수에서 얼음을 잘라 배에 싣고 2,400km나 떨어진 카리브해의 프랑스 식민지 마리니크(Martinique)로 실어 날랐다. 당시 보스턴 가제트는 이렇게 보도했다. “농담이 아니다. 보스턴에서 마리니크까지 80톤의 얼음을 실은 화물선이 출발했다. 그것이 투기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의 첫 시도는 투기였다. 현지에 얼음 창고가 없었을 뿐 아니라, 열대 기후에 익숙한 사람들이 얼음을 구경만 할 뿐, 아무도 용도를 몰랐다. 얼음은 그냥 녹고 말았다.

하지만 튜더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현지에 냉동창고를 만들고 주민들에게 얼음 사용법을 가르쳤다. 그는 제재소에서 나오는 톱밥이 얼음을 보관하는데 유용한 소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원목 가공업에 성행했는데 톱밥을 강에 흘러보내 민원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었다. 그는 톱밥을 공짜로 가져왔다.

튜더는 고용인력을 늘리고 선박과 창고시설에 투자하며 대량수송 체계를 갖췄다. 수송하는 동안에 상당량의 얼음이 녹아 버렸다. 그는 이문이 날때까지 대대적인 시설투자를 했다. 부채를 갚지못해 감옥에 가기도 했다. 하지만 사업 4년째가 되던 1810년에 손익분기점을 넘어 이문을 남기게 되었자.

1815년에는 쿠바 하바나에 얼음창고를 만들게 되었다. 얼음장사 10년째 되던 1816년에 그는 쿠바에 얼음을 팔고 돌아오는 배에 열대 과일을 남은 얼음으로 냉장보관해 뉴욕에 실어 날랐다. 처음에는 수송 도중에 과일들이 썩어버려 실패했다. 하지만 냉장법을 개발하고 수송기간을 단축하면서 바나나와 오렌지, 라임 등을 온전한 상태로 뉴욕에 실어나를수 있게 되었다. 당시까지 열대과일을 구경하지 못하던 뉴요커들이 싱싱한 이국 과일을 맛볼수 있게 되었다.

그는 톱밥에 대패밥, 겨 등을 넣어 냉장법을 개선하고, 말을 이용해 호수와 강의 얼음을 절단하는 기술도 개발했다. 1830년대가 되면서 그의 얼음 장사는 매우 수익성이 높은 사업이 되었다.

튜더의 얼음 무역이 성공하자, 경쟁자들이 생겼다. 신생 얼음장사꾼들이 시장에 참여하자 튜더는 갸격 인하 전략으로 경쟁자들을 꺾었다. 얼음 무역은 시설투자에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데, 초기의 경쟁자들은 튜더의 공격에 무너져버렸다.

 

뉴욕시 인근 허드슨강에서 얼음 채취와 얼음창고 /위키피디아
뉴욕시 인근 허드슨강에서 얼음 채취와 얼음창고 /위키피디아

 

1933년에 튜더는 영국령 인도의 수도 콜카타(Kolkata, 지금의 캘커타)에 얼음을 수출했다. 튜더는 관세를 철폐해야 얼음을 수출하겠다곤 요구했고, 영국의 식민당국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배에 싣고 온 얼음 100톤 전량을 사들였다. 튜더는 봄베이, 마드라스 등 인도 주요도시로 얼음을 수출했다.

이어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도 수출을 했고, 돌아올 때엔 설탕과 과일, 면화를 싣고 왔다. 호주 시드니, 영국령 홍콩, 네덜란드령 바타비아(자카르타), 페르시아만,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페루에도 시장을 개척했다. 영국에도 얼음을 팔았다. 영국인들은 찬 음식에 익숙치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재미는 보지 못했다.

1860년대 들어 대자본가들이 얼음무역에 뛰어들었다. 경쟁자들은 자본이 든든했기 때문에 튜더의 가격인하 정책도 뚫고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렇지만 튜더의 얼음회사는 세계시장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했다.

 

미국 뉴잉글랜드의 얼음 수출 교역로(1856) /위키피디아
미국 뉴잉글랜드의 얼음 수출 교역로(1856) /위키피디아

 

얼음 장사(ice trade)는 미국 사회는 물론 세계 부자들의 기호를 바꾸어 놓았다. 냉커피와 얼음을 넣은 음료수가 나왔고, 얼린 디저트가 인기를 끌었다. 채소와 과일이 먼 곳까지 수송되었다. 얼음 자체의 수요보다는 채소와 과일, 생선을 보관하는데 더 많은 수요가 생겨 났다. 또 얼음을 보관하는 아이스박스도 생겨났다. 도시인들은 얼음을 배달시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기상전문가들은 겨울에 얼마나 얼음이 얼지 여부를 예측했다. 미국 북동부지역이 겨울에 온난할 경우 그해 여름에 얼음 값이 폭등했다. 어느 해엔가 매사추세츠에 얼음이 얼지 않아 얼음장사꾼들은 메인주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얼음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냉동열차를 개발해 철로로도 얼음을 수송했다.

얼음을 생산하고 보관하기 위해 매사추세츠 주의 호수와 강은 물론, 뉴욕의 허드슨강 주변에는 135개의 얼음창고가 즐비하게 들어섰다. 얼음을 채취하고 보관하기 위해 메인주까지 올라갔다. 미국 서부지역에선 러시아령 알래스카에서도 얼음을 구해왔다.

전성기에 미국의 얼음무역산업에는 9만명의 고용을 창출했으며, 25,000마리의 말이 동원되었다. 허드슨강 주변에만 2만명이 얼음 산업에 일했다. 얼음 무역규모는 19세기말에 2,800만 달러에 이르렀는데, 지금 가치로는 6억 달러를 넘는다.

 

허드슨강 주변의 얼음창고 /위키피디아
허드슨강 주변의 얼음창고 /위키피디아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얼음무역에 경쟁국이 생겨났다. 최대의 경쟁자는 노르웨이였다. 노르웨이는 피요르드와 호수가 많아 양질의 얼음이 생산되었고, 대수요자인 유럽과 지근거리에 있었다.

또 얼음을 제조하는 기계들이 고안되었다. 전기를 이용한 냉장고가 나오기 앞서 암모니아등 화학물질을 냉매로 활용해 얼음을 만드는 공장이 생겨났다. 자연얼음과 공장얼음 사이에 경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공장얼음이 자연얼음에 비해 원가를 맞추지 못했으나, 점차 기술이 개발하면서 공장얼음이 자연얼음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미국의 얼음무역은 1880년대를 정점으로 꺾이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의 얼음 수출량은 800만톤이었다. 기계를 사용해 생산된 얼음이 자연 얼음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호주와 인도는 이 무렵 공장에서 제조된 얼음을 사용하게 되었다.

강이나 호수에서 얼음을 채취해 창고에 보관했다가 여름에 사용하는 방식의 무역은 서서히 막을 내려갔다. 20세기 들어 가정용 냉장고가 개발되면서 얼음 무역은 종지부를 찍었다. 아직도 뉴욕주 허드슨강 주변에는 당시의 얼음창고가 폐허로 남아 있다.

 


<참고자료>

Wikipedia, Frederic Tudor

Wikipedia, Ice tr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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